[손광모의 노동일기] 우리는 ‘일본인 노사카 산조’를 구할 수 있을까?
[손광모의 노동일기] 우리는 ‘일본인 노사카 산조’를 구할 수 있을까?
  • 손광모 기자
  • 승인 2019.08.06 10:00
  • 수정 2019.08.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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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동을 글로 적습니다. 노동이 글이 되는 순간 노동자의 삶은 충만해진다고 믿습니다. 당신의 노동도 글로 담고 싶습니다. 우리 함께. 충만해지고 싶습니다.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대한민국이 ‘반(反)일본’의 깃발 아래 똘똘 뭉쳤다. 정치권에서는 ‘기술독립’, ‘제2의 독립운동’, ‘경제전면전’ 등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슬로건을 내놓고 있다. 북한을 향해서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자유한국당만이 미심쩍게도 ‘합리적 대응’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국민적 분노는 더 거세다. “이 기회에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이 회자되기도 한다. 일본을 꺾기 위해서 어떠한 고난도 불사할 기세다. 그러나 무릇 전쟁에서 이기려면 누가 적인지를 명확하게 판단해야 한다. 소설 속 농담이 한 가지 떠오른다.

언젠가 여운형이 “만일 일본 공산당 당수 노사카 산조와 이승만이 같이 물에 빠지면 박헌영은 노사카를 먼저 건지겠지만 나는 이승만을 살려내고 여력이 있으면 노사카를 건질 것”이라 한 적 있다. (「세 여자 2」, 조선희 저, 한겨레출판. P182)

소설 속 여운형의 농담은 해방 후 한국의 정치세력에게 ‘민족주의’란 어떠한 의미였는지를 간결하게 보여준다. 중도와 실리를 추구했던 여운형은 친(親) 일본적 제스처가 한국의 인민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념적 지향이 유사했던 노사카 산조보다는 기꺼이 ‘정적’ 이승만을 구하겠다고 말한다. 그런 여운형에게 적은 ‘제국주의’였다. 여운형은 민족주의를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힘으로 삼으려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민족을 포기하지 않았던 여운형은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민족에게 희생당한다.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여운형은 한지근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40년 후 한지근의 테러는 우익테러단체 ‘백의사’의 사주였음이 드러난다.

백의사와 깊은 관계였던 김구와 이승만에게는 두 개의 적이 있었다. 하나는 민족을 탄압했던 일본이라는 나라였고,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이념과 대치되는 좌파세력이었다. 그들은 ‘민족’의 이름으로 반(反)일본을 외쳤다. 반(反)공산주의를 외칠 때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됐다. 그들이 추구하는 ‘민족주의’의 내용이었다. 훗날 김구는 이승만과 관계를 단절하고 좌우합작 운동에 가담한다. 좌파세력을 ‘적’이 아닌 ‘협력해야 될 파트너’로 본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잘 알듯이 김구의 노력은 실패했다. 조선희 작가는 이렇게 적는다. “‘38선을 베고 죽을망정 가겠다’던 백범의 말에 진심이 있었다면 불행히도 그것은 너무 늦어버린 진심이었다.”

민족보다 이념이 중요했던 박헌영에게 노사카 산조의 ‘국적’은 중요하지 않았다. 노사카 산조가 일본인이라고 해도 일본 내부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그는 박헌영의 ‘동지’였다. 반대로 박헌영에게 이승만은 ‘미국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적’이었다. 박헌영에게 민족주의란 ‘유령’이었다. 민족 간의 갈등보다는 무산자와 유산자, 계급적 갈등이 우선한다고 봤다. 하지만 박헌영의 실패는 예견된 결과였다. 미국이 점령하고 있는 남한에서 좌익세력은 생존 자체가 어려웠다. 타협을 모르던 철저한 공산주의자, 박헌영의 성격도 내부분열을 자초하게 했다. 결국 박헌영은 남한에서의 조직기반을 거의 다 잃고 1948년 4월 미군정의 수배를 피해 월북한다. 그런 박헌영이 남한에 돌아온 건 한국전쟁 때다. 박헌영의 적은 ‘제국주의’가 아닌 ‘남한’으로 바뀌어 있었다. 박헌영 인생 최대 패착이었다.

결국 승리자는 이승만(과 김일성)이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이승만이 주창했던 대로 반-일본주의와 반-공산주의로 채워졌다. 이승만식 민족주의 아래 일본과 북한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적’이 됐다. 일본 내에서 제국주의적 행보에 대항하는 시민들과 재일동포 ‘자이니치’는 한국사회에서 잊혔다. 일본은 단지 ‘적’이었기 때문이다. 사할린 동포들이나 북한 정권 수립에 가담한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의 운명이었다. 북한도 마찬가지로 ‘적’일 뿐이었다. 일본제국주의가 가장 큰 현상금을 내걸었던 ‘김원봉’에게 대한민국이 서훈을 줄 수 없는 이유였다.

우리는 우리의 적이 단순히 ‘일본’이라고 말하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맞불 대응이 잘못됐다고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일본 내 자민당 세력이 한국의 경제보복을 빌미로 득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본의 잘못된 역사인식은 어찌됐든 일본 내에서 ‘민주적 세력’이 세를 잡아야 바로 세워진다. 또한, 일본의 경제제재에 맞서 대규모 기반산업을 육성하는 정책이 잘못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동시에 그 정책의 수혜자가 주로 한국의 대기업이 될 것이라는 의심도 거둘 수 없다. 지난날 독재정권이 그러했던 것처럼 ‘국익’이라는 명분 속에 한국의 노동자들은 또다시 희생될 수 있다.

우리의 적은 과연 일본일까? 우리의 적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게 하는 ‘이승만식 민족주의’가 가장 큰 적이 아닐까? 우리는 ‘일본인 노사카 산조’를 구할 수 있을 때 일본과의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한국과 일본의 더 나은 민주주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