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우의 부감쇼트] ‘리버럴(Liberal)’ 하기 위해서는 ‘시버럴' 할 줄 알아야 한다
[임동우의 부감쇼트] ‘리버럴(Liberal)’ 하기 위해서는 ‘시버럴' 할 줄 알아야 한다
  • 임동우 기자
  • 승인 2019.08.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른 말로 버즈 아이 뷰 쇼트(bird’s eye view shot).
보통에서 벗어난 시각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싶습니다.
임동우 기자 dwlim@laborplus.co.kr
임동우 기자
dwlim@laborplus.co.kr

내 인생에 ‘까짓 거 뭐든 못할 게 뭐야’ 라고 자신했던 적이 딱 두 번 있다. 수능 끝났을 때, 전역 했을 때. 수능이 끝난 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문의 길에 합류한 싯다르타처럼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섭렵하고 있던 도중, 택배 상하차를 마주했다.

지시만큼은 꽤나 심플했다. 오직 ‘까!’, ‘옮겨!’ 뿐이었으니 말이다. 누구나 레시피를 보고 완성된 요리만을 떠올린다. 일은 지시만큼 심플하지 않았다. 아침 7시에 출근을 하면 컨베이어벨트가 금속음을 내며 돌아갔고, 작업장의 사람들은 그 소리에 졸음을 덜어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일을 하면서 옷이 젖지 않은 날이 없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빗물이 흥건히 고였고, 와이퍼로 우레탄 바닥을 미는데 여념이 없었다. 온몸이 젖은 우리들, 그래도 배송물품이 젖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웃었더랬다. 그러던 어느 화창한 날이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새가 많이 울었던 것뿐이다. 그날 아침 7시는 욕과 고성으로 뒤엉켜 있었다. 사람들은 자석처럼 붙으려는 두 사람을 막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겨우 마무리된 상하차 이후 배송보조로 지정된 나는 방화동 담당 트럭에 탑승했고, 기사님께 오늘 아침 싸움의 원인을 물었다. 그런데 내 옆에서 운전을 하고 있는 그, 보통 내공이 아니었다.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냥 뭐, 원래 저래. 저러고 또 와가지고 ‘형님, 아우’ 한다니까”란다. 하루 일과가 끝나고 작업장에 돌아와 보니 둘이 앉아서 정말 ‘형님, 아우’ 하고 있었다. 갈등의 발단이 목장갑이었다나?

허공에 난무하던 욕설이 저무는 해와 함께 사라진 그날 저녁. 나는 아침 7시를 떠올리며 머릿속에 ‘대화’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사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누군가와의 ‘대화’란 우리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듯이 이성적이고 정형화된 형태만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대화’란 결국 ‘소통’이며, ‘소통’이란 서로의 감정이 공명할 때 가능했다. 나는 그때, 그 두 사람이 어쩌면 작업장 내에서 가장 친밀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빨갛고도 파란 막대자석처럼.

아르헨티나 작가 보르헤스는 <틀뢴, 우르바크,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라는 단편을 통해 영토 없는 국가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영토 없는 국가라니? 보편적인 사유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국가가 영토를 기반으로 역사라는 흐름을 파생시키듯이, 우리는 원본을 기점으로 생각을 이어나가는 연역적 사유방식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사람들이 가진 기존의 관점을 깨부수고 싶었나보다. 보르헤스는 <틀뢴, 우르바크, 오르비스 테르티우스>를 통해 소문의 파편으로 시작한 허구가 되레 실재(實在) 속에 침투하는 과정을 그려보였다. 보르헤스의 귀납적 소설쓰기는 그렇게 현대소설의 패러다임을 창조했다.

생각해보면 작업장의 두 사람은 보르헤스의 소설과 닮아있다. 명료하게 말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적의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진로든 목표든 뭐든 명료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를 때가 많다. 어쩌면 일상이 너무 혼잡스럽기도 하고, 괜시리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쿵따리샤바라 빠빠빠빠!’ 같은 기표의 나열만을 내뱉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독일의 실증주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도대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 우리들은 침묵해야 한다”고 했으나, 나는 이 말에 영 동의하지 못하겠다. 식물의 언어(침묵)로 본질에 다가가는 것과 수없이 많은 말들로 본질에 다가가는 것은 결국 막대자석처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차라리 그날의 두 사람처럼, ‘말할 수 없는 말’을 허공에 내던지면서라도 각자의 공명점을 찾을 용기가 있다면, 우리의 자리가 좀 더 확고해지진 않을까.

얼마 전 파업 800일을 훌쩍 넘긴 노동조합을 보았다. 조합원들은 사측의 임금삭감 조치에 대출로 생활을 영위했다.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잃은 사람도, 뇌졸중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긴 사람도 있었다. 그럼에도 왜 이들은 파업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가.

지난 14일에는 1,400차 수요시위 및 제7차 세계 일본군‘위안부’기림일 세계연대집회가 있었다. 1992년 1월 8일부터 시작된 수요시위의 외침은 무슨 이유로 지칠 줄 모르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는가.

우리는 우리로부터 얼마나 진실한가. 진실의 한가운데에 감정이 있고, 감정의 한가운데에 존재가 있다. 지금 우리들이 있는 ‘이곳’에서 숨 쉬며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 비록 비효율적이라도, ‘리버럴(liberal)’하기 위해,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공명할 때까지.

침묵했던 우리들, 부당해서 화는 나는데 머릿속이 하얗다면 가끔 이렇게 시작해도 좋다.

“에이, 시버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