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모의 노동일기] 서생과 상인 사이, 정치라는 생물
[손광모의 노동일기] 서생과 상인 사이, 정치라는 생물
  • 손광모 기자
  • 승인 2019.08.20 10:32
  • 수정 2019.08.20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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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동을 글로 적습니다. 노동이 글이 되는 순간 노동자의 삶은 충만해진다고 믿습니다. 당신의 노동도 글로 담고 싶습니다. 우리 함께. 충만해지고 싶습니다.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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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은 김대중 대통령의 서거 10주기였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몸소 겪었던 ‘인동초’ 김대중 대통령은 타고난 달변가로 후배 정치인에게 교훈이 될 만한 어록을 많이 남겼다. 그 중 하나가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생전에 전매특허처럼 이 말을 쓰곤 했다.

상인의 현실감각이 늘 마음 한 켠에 있어서였을까. ‘김대중 정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IMF 경제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는 평가의 대척점에는 신자유주의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가 항상 붙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우리 사회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의 우직한 ‘서생의 문제의식’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김대중 대통령이 말한 서생적 문제의식은 그른 것과는 타협하지 않음을 뜻한다. 정적의 소행으로 의심되는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해 평생 지팡이를 짚는 처지가 돼도, 박정희에 의해 납치돼 일본에 끌려가도, 자식이 평생 장애의 후유증을 앓아도, ‘대통령병’에 걸렸다는 비난을 받아도,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대의(大義)에 충실했던 숭고한 모습에 우리는 아직도 김대중 대통령을 회자한다.

하지만 오늘날 정치권에서 상인은 흔하지만, 서생은 드물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거래’가 정치의 생리라고는 하지만, 이 생리 때문에 정치는 위기다. 수 싸움과 정쟁에 사람들은 냉소하고, ‘정치라는 생물’은 말라간다. 세계적인 ‘탈정치’의 흐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깨어있는 서생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앞 뒤 따지지 않고 옳은 뜻을 추구하는,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이 순수한 사람 말이다. 벽안의 서생 한 명이 떠오른다.

스웨덴의 그레타 툰베리는 2018년 만 16세의 나이에 기후변화를 막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등교를 거부하고 1인 시위에 나섰다. 어린 소녀의 시위는 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켜, 제24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4)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 툰베리는 당시 연설에서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것은 자녀들의 미래를 훔치는 것"이라고 기성 정치권을 비판했다. 기성 정치인들은 원색적 비난으로 대응했다. 툰베리의 나이가 어리며, 정신질환(야스퍼거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부수적인 사실’로 툰베리가 말하는 ‘기후변화의 심각성’은 무시한 것이다.

하지만 툰베리는 여전히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툰베리를 두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청소년들은 복잡한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류가 위기에 처했는데도 기후변화를 정치적 수사로 전락시키는 정치인들의 복잡한 현실을 말이다. 그래서 오직 청소년들만이 기후변화를 막아야 한다는 과학자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너무나 순수하기에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는 말이다.

2000년 집무실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 ⓒ 대통령기록관
2000년 집무실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모습 ⓒ 대통령기록관

정치인들의 ‘복잡한 현실’을 따지지 않는 툰베리 같은 이가 김대중 대통령이 말하는 ‘온전한 서생’일 것이다. 분명 정치인들에게 상인적 현실감각이 필요하다. 하지만 김대중의 상인적 감각은 단지 재집권이나 선거 승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도정치의 ‘현실적 사정’을 전혀 개의치 않는 툰베리와 같은 서생의 요구를 어떻게 현실정치 내에서 실현시킬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에 더 가깝다. 서생의 문제의식이 없는 정치는 그저 ‘거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는 생물”이라고 말했다. ‘20년 집권’이나 ‘총선 승리’를 위해 본래 추구하려는 대의까지 내놓는 정치인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눈앞의 승리를 위해 정치라는 생물을 말려 죽이는 모습이다. 우리나라에는 툰베리와 같은 순수한 백면서생이 없다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캐노피에도, 영남대병원 옥상에도, 강남역 사거리 앞 CCTV관제탑에서 고고한 서생들이 세상을 향해 일침하고 있다.

촛불 정부를 자처하던 문재인 정부의 빛바랜 대선 공약을 보며, 본디 그들의 문제의식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묻고 싶다. 혹시 서생의 문제의식까지 정치거래에 팔아치운 것은 아닌지. 혹시 가장 먼저 ‘노동권’을 팔아치운 건 아닌지. 그렇다면 지금 남아있는 문제의식은 도대체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