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오늘밤도 ‘내일’이라는 콜을 기다린다
그들은 오늘밤도 ‘내일’이라는 콜을 기다린다
  • 정다솜 기자
  • 승인 2019.08.30 17:05
  • 수정 2019.08.31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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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여름, 서울 강남 한복판 이동노동자 쉼터의 밤

[리포트] 休 서울이동노동자 서초쉼터

대리기사는 도로 위 노동자다. 주로 밤에 술을 마신 차주를 대리해 운전한다. 대리운전은 언제부터 생겨난 노동 형태일까? 야간 음주문화의 확산과 경기 호황으로 차를 가진 사람이 크게 늘어난 198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음주운전이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정부는 음주단속 강화로 대응했다. 그러자 대리운전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다. 공급도 발맞췄다. IMF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일자리에서 밀려난 실업자 중 여럿이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일할 수 있는 대리운전 시장에 뛰어들었다.

대리기사는 보통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하루 평균 10시간 일한다. 실제 운전 시간은 반도 안 된다. 그 외에는 길 위에서 콜을 기다린다. 멀뚱멀뚱 한자리에 서 있는 건 아니다. 추위를 피해 편의점에 잠깐 들르고 PC방에 들어가기도 한다. 문이 열린 건물 1층이나 ATM 박스를 찾거나 빈 버스 정류소에 앉기도 한다.

休 서초이동노동자쉼터의 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休 서울이동노동자 서초쉼터의 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대리기사는 정해진 노동장소가 없고 주된 노동이 이동을 통해 이뤄지는 ‘이동노동자’다. 퀵서비스 기사, 간병인, 학습지 교사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직업 특성상 밖에서 대기시간이 길고 짬짬이 휴대폰을 충전하거나 쉴 공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서울시는 ‘休 서울이동노동자쉼터’를 마련했다. 2016년 3월 18일 서초쉼터를 시작으로 서울에는 장교, 합정, 상암, 녹번 등 총 5곳에 이동노동자를 위한 쉼터가 생겼다.

그중 서초쉼터는 대리기사의 거점인 논현역 교보타워 사거리, 일명 ‘대리타워 사거리’ 근처에 자리 잡았다. 운영시간은 대리기사의 주 업무시간인 평일 오후 6시부터 새벽 6시까지다. 방문하는 이동노동자의 98%는 대리기사다. 쉼터에서는 쉼뿐 아니라 교육, 상담, 모임 지원 등 이동노동자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광복절 다음 날인 16일, 더위가 한풀 꺾인 금요일에 쉼터를 찾아갔다. 12시간 동안 쉼터에 앉아 대리노동의 풍경을 엿봤다.

쉼 없이 떠드는 쉼터

오후 6시, 쉼터의 문을 열면 정면에는 ‘휴게실’이, 오른쪽엔 이동노동자 기초상담과 행정을 위한 공간인 ‘운영지원실’이 보인다. 운영지원실에는 한 명의 사무장과 두 명의 간사가 근무한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면 이동노동자 모임과 교육을 진행할 수 있는 ‘서로배움터’가 왼편에는 ‘여성휴게실’이 마련되어 있다. 휴게실에는 조용히 쉬고 싶은 이동노동자가, 서로배움터는 담소를 나누고 싶은 이가 나눠 자리 잡는다. 쉼터 내부에는 근골격계 질환 예방을 위한 전신안마기, 길 위에서 걷고 뛰는 시간이 길어 족저근막염에 자주 시달리는 이동노동자를 위한 발마시지기, 혈압측정기 등이 놓여 있다.

休 서울이동노동자 서초쉼터 구조

“형님, 오랜만에 나오셨네?”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쉼터는 금세 왁자지껄하다. 30분 만에 대리기사 7명이 들어왔다. 이들은 방명록을 적은 뒤 테이블에 모여 앉아 안부를 묻기에 바빴다. 서초쉼터는 하루 평균 이동노동자 62명이 이용하는데 20~30명은 거의 매일 온다. 서로 얼굴이 익은 대리기사들이 많다. 이들은 혼자 일하는 야간노동자이자 대부분 취한 고객을 대하는 감정노동자로서 받은 스트레스를 동료와 떠들면서 풀어낸다.

“3일 동안 집에만 있으니까 소화가 안 돼 가지고 장이 운동을 안 하니까 설사를 하는 거야 설사를. 내가 알았어. 사람은 운동을 해야 된다. 움직여야지 된다. 그래서 나왔어.”

“형님 그러면 과자나 한번 쏘세요~”

“과자는 무슨 과자야. 애도 아니고. 밥을 먹어야지. 이 사람아!”

“애라 그래요. 인생은 50부터니까 나 이제 두 살이야 두 살.”

한바탕 인사가 끝나면 대리기사들은 테이블 위 충전기에 연결한 스마트폰에 눈을 고정한 채 말을 이어간다. 대리운전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들어오는 ‘콜’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다. 서초쉼터에는 충전선만 55개가 마련되어 있다. 대리기사들은 보통 오른쪽 검지손가락 하나를 살살 흔들며 언제든 ‘수락’ 버튼을 누를 준비를 하고 있다.

대부분 깔끔한 차림이다. 카라티나 반팔셔츠에 면바지가 기본이다. 가끔 정장바지에 재킷까지 갖추거나 반대로 반바지에 자유로운 복장으로 쉼터를 찾는 기사도 있다. 다만 운동화는 필수다. 대리기사들은 매일 약 10km씩 걷거나 뛰며 일하기 때문이다. 가방은 선택이다. 주로 적당한 크기의 크로스백을 메거나 한 손에 든다. 물론 휴대전화 하나만 들고 다니는 기사도 있다.

말은 여기저기서 끊이지 않는다. 건너편 순댓국집 맛 평가, 야구 중계, 새로 산 에어프라이어기 후기, 미역국 맛있게 끓이는 법, 대리회사의 갑질, 월 600만 원씩 벌다가 위암 수술 받은 가양동 대리기사의 사연 등 간간이 욕이 섞인 대리기사의 말들은 사방으로 튀었다.

쉼터가 활기찬 이유는 대리기사에겐 밤이 낮이고 하루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밤낮의 역전은 곧 관계의 단절로 이어진다. 밤에 일하고 낮에 자면 만남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쉽게 고립된다. 그래서 하루의 시작에 동료 대리기사들과의 만남은 일종의 ‘오아시스’다.

“차 사고가 났는데 우리 보험으로 손님 렌트비도 해주나요?”

문을 연 채 두리번대던 초보 대리운전 기사는 방승범 사무장의 안내를 받아 방명록을 적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최근에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손님이 렌트비를 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요?” 대리기사 보험을 들었기 때문에 면책금 30만 원만 내면 된다는 선배 기사들의 조언이 이어졌다. 손님에게 어떤 멘트를 해야 하는지까지 접수한 초보 기사는 그제야 근심이 풀렸는지 커피를 한잔 마시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쉼터는 길 위에 뿔뿔이 흩어져 노동하는 대리기사에게 ‘쉼’뿐 아니라 커뮤니티로서 역할도 하고 있었다. 실제로 서초쉼터의 목표 또한 단순한 쉼터 제공이 아니다. 목표는 단계별로 ‘이동노동자 조직화’ ‘이동노동 제도화’ ‘공공복지 연계 확충’이다. 세 가지 목표를 책상 오른편에 붙여둔 방 사무장은 “대리기사를 위한 공간이 있는 것 자체가 조직화에 도움이 된다”며 “대리기사들이 모임이나 회의를 하면서 단체가 만들어지거나 기존에 있던 단체들이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전국대리탁송기사협동조합은 그렇게 탄생했다.

休 서초이동노동자쉼터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休 서울이동노동자 서초쉼터 휴게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떠들어도 바뀌지 않는 노동현실

대리운전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노동현실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떠들었다. 이들은 노동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 안전망에서 배제된 처지와 대리운전업체의 갑질에 무력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대해 분명히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제도권 밖이야.”

대리기사는 노동자로서 법적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대리운전업체와 근로계약이 아닌 위탁계약을 맺은 개인사업자이기 때문이다. 사장인 이들에게는 단결권, 단체교섭권 등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은 물론 건강보험 등 각종 복지혜택이 적용되지 않는다. 2012년 만들어진 전국단위 대리기사노조는 고용노동부가 설립신고를 받아주지 않아 아직 법외노조다.

머리카락을 모두 젤로 빗어 넘긴 법인 대리기사 김구담(53) 씨는 “대리기사는 길 위에서 자주 뛰고 남들 잘 때 밤낮을 바꿔 일해서 보통 체력으로는 오래 못 한다”며 “제도권 밖에 있는 대리기사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게 되면 주위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 이런 사례가 점점 많아지면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된다”고 걱정했다. 유독 차림이 단정해서 눈에 띄는 법인 대리기사는 특정 회사와 계약을 맺고 임직원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사다.

“대리회사는 우리가 소모품이라고 생각해요.”

대리기사는 대리업체에 종속된 노동자이기도 하다. 개인사업자이지만 사용자의 지휘와 명령을 받는 ‘특수고용형태 노동자’라서다. 대리기사들이 대리업체에 종속되어 일한다는 증거는 여럿이다. 우선 업체를 통하지 않고는 오더를 받을 수 없다. 업체의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업체는 프로그램에 ‘락(lock)’을 걸어 일정 기간 일을 못 하게 한다. 매일 정해진 시간 안에 정해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다음 날 좋은 ‘콜’을 잡지 못하게 하는 제도인 ‘숙제’를 강요하기도 한다.

쉼터에 마련된 PC 화면에 틀어놓은 야구중계에 귀를 열어놓은 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남정수 씨는 “한 번은 15,000원 콜 손님이 영수증을 달라고 해서 기사는 나중에 가상계좌로 받는 시스템이라 영수증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손님은 회사에 20,000원을 낸 거다. 대리회사는 수수료 20% 외에 그런 식으로 돈을 떼 가기도 한다. 우리는 갑한테 일방적으로 당하는 시스템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어차피 대리업체는 기사들을 소모품이라고 생각해요. 왜? 이 기사 말고도 다른 기사는 계속 오니까. 소중히 생각을 안 하는 거죠.” 옆에 앉아 가만히 듣던 최광일 씨가 덧붙였다.

쉼터에 모인 대리기사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도 분명히 인식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노동현실이 나아질 거라고 쉽게 믿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대리회사와 보험사에 비리가 분명히 있다는 거예요. 우리가 뭉쳐서 투쟁을 해야 돼요.” 쉼터에서 재잘대던 모든 소리를 삼킨 김구담 씨의 크고 단호한 목소리에 옆에 앉아 자신의 크로스백 속을 보여주던 최규혁 씨가 맞받아쳤다.

“투쟁? 투쟁해봐~ 백날 얘기해봐야 소용없어. 우리는 방법이 없잖아. 약자다 보니까. 대리회사가 잘못된 거 당연히 알지. 그래도 방법이 없잖아.”

임동진 씨도 끄덕였다. “대리운전이 법으로 허가된 업종이 아닌데 투쟁 그거 뭐 누구를 상대로 하겠어? 해 봐야 대리회사 상대로 하는데 대리회사는 갑이니까. 소속된 직원 같으면 그걸 하겠지만 그게 아니잖아. 노동조합도 안 통하지.” 떠들썩했던 공간에는 잠깐 정적이 돌았다. ‘뿌드득 뿌드득’ 안마의자 소리만 커졌다.

한 대리기사의 크로스백 안에는 졸릴 때를 대비한 껌, 스마트폰 충전기, 3단 우산, 움직일 때 나는 ‘달그락’ 소리를 줄이기 위해 휴지로 싼 치약칫솔 세트, 약 비닐에 꽁꽁 싸맨 치간칫솔, 부채, 선글라스 등이 담겨있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한 대리기사의 크로스백 안에는 졸릴 때를 대비한 껌, 스마트폰 충전기, 3단 우산, 움직일 때 나는 ‘달그락’ 소리를 줄이기 위해 휴지로 싼 치약칫솔 세트, 약 비닐에 꽁꽁 싸맨 치간칫솔, 부채, 선글라스 등이 담겨있다. ⓒ 참여와혁신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운을 기다리는 새벽

‘지이잉~ 지이이잉~’ 콜이 오면 스마트폰이 울린다. 화면에는 손님이 주변 몇 미터 근처에 있는지, 목적지는 어디에 있고 예상요금은 얼마인지 표시된다. 요금 1.5은 15,000원을 뜻한다. 이때 빠른 판단은 필수다. 고민하는 사이 콜은 사라진다. 화면에 알람이 떠 있는 시간은 불과 2~3초에 불과하다. 그 사이 목적지를 보고 이 곳이 어디인지, 이 정도 요금이면 적당한지, 근처에 적당한 번화가가 있어서 ‘따당’을 치고 올 확률이 높은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따당’은 주로 외곽 지역에 갔다가 거기서 또 콜을 받고 돌아오는 것이다.

오후 6시부터 쉼터에 들어와 콜을 기다리던 대리기사들은 저녁 8시부터 하나둘 떠난다. 반면 밤 10시가 넘도록 콜을 기다리는 대리기사의 수도 적지 않다. 대리기사들은 콜을 허투루 수락하지 않는다. 하루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최대한 효율을 뽑아내야 한다. 보통 저녁 10시부터 새벽 1시까지가 피크타임이며 그 외 시간에 콜은 줄어든다. 또한 2만 원 콜보다 1만 원 콜이 딱 절반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도 아니다. 신중한 콜 결정이 그날의 수입을 좌우한다.

“2~3시간 피크타임 때 콜이 쏟아지는데 아무리 질 좋은 콜이 나와도 한 가지밖에 선택 못 하잖아요. 그거를 복불복이라고 하는데 잘 선택해야지. 그날의 운에 따라 운장이라고 하죠. 운전대가 동그랗잖아요. 핸들이. 잘 선택해서 잘 초이스 해서 가면 땅!땅!땅!땅! 해가지고 그날 좋은 거고 아니면 한 번 갔다가 서울 못 나와서 망칠 수도 있고 진짜 운이에요.”

“재수 싸움이야. 아무리 콜이 안 들어오는 날도 재수가 좋으면 여러 개 찍고 많이 버는 거지. 그런데 그 재수가 자기 혼자만 들어오나 돌아오면서 들어오지. 확률은 똑같아요.”

마른 얼굴로 맞는 아침

새벽 4시, 도로 위 노동을 수행하고 온 대리기사들은 하나둘 쉼터로 다시 모인다. 고립됐던 시간을 뒤로하고 다시 쉼터에서 말을 한다. 자신의 운을 시험한 기사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놓았다.

한철호(61) 씨는 은행원이었다. IMF 때 명예퇴직하면 퇴직금을 많이 준다고 해서 나왔다. 집에도 돈이 필요했다. 당시 퇴직금 1억 원은 꽤 큰돈이었다. 목돈으로 이것저것 다른 일을 했다. 잘 풀리지는 않았다. 12년 전 대리운전 기사를 시작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컴퓨터 모니터 화면만 바라보던 한 씨는 “남자가 실직을 하면 바로 할 수 있는 일이 막노동 외에는 특별히 없다”며 “내가 일을 해야 되는데 힘도 없고 할 수 있는 게 운전밖에 없었다”고 대리운전 업계에 발담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강남역 근처 고시원에서 혼자 산다. 땀 냄새가 난다며 내리라고 한다든지 대뜸 싸우자고 달려드는 비상식적인 손님을 태웠을 때는 “스톱한다. 그만하라는 징조인가 보다”하며 고시원 방에 들어가 속상한 마음을 내려놓는다. 그에게 언제까지 대리기사를 할 거냐고 물으니 3년만 더 할 거라고 답했다. “나중에 저기 어디 산골짜기 가서 염소나 키울 거예요. 나는 동물들을 좋아하니까. 고향은 좀 그렇고 그냥 강원도 쪽이나 시골로 잡아서 갈 거예요.”

직접 가명을 지은 김구담씨는 17년 동안 미용사로 일했다. “원래 돌아다닐 팔자”였는데 같은 자리에서만 일하다 보니 나가고 싶어 자동차학원 강사 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대리기사 일을 처음 접했다. “거기서 망쳤어요. 처음엔 괜찮았어요. 콜을 몇 개 안 했는데 하루에 10만 원 넘게 찍히는 거야. 어? 내 월급보다 낫네? 혹했죠. 그런데 실제로 그만두고 해보니까 그게 아닌 거야. 속은 거지 스스로에게 속은 거예요. 돈 욕심 때문에.”

그래도 지금은 후회 안 한다던 김 씨는 말을 이었다 “일단 콜 나가면 돈이 생기니까 안주하게 돼요. 도전의식이 사라져. 몇 년 안에 끝내겠다는 각오로 해야 하는데 주변에 세월만 보내는 사람이 많이 보여요. 그게 안타깝다는 거죠. 재능이 있는데도.” 스스로에게 하는 말 같다고 물으니 김 씨는 “나에게 하는 말이 맞다”며 큰 눈을 허공에 뒀다.

대각선 앞에 앉아 스마트폰 두 개로 콜을 고르며 자정까지 쉼터를 떠나지 않던 황재복 씨는 고개를 들어 노트북을 두드리는 기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글이 쓰고 싶다고 했다. “작가를 꿈꿨어요. 글짓기를 하면 3등 안에는 꼭 들었죠. 대리 일을 하면서도 7~8년간 매일 노동을 기록한 일기장을 가지고 있어요. 그걸로 책을 내고 싶어서 초안을 잡은 적도 있어요.”

왜 글을 쓰지 않는지 물으니 금세 대답했다. “에이 못해. 지금은 움츠러들어요. 의기소침해지더라고.” 딸도 글을 잘 써서 작가를 꿈꿨다며 딸 자랑을 하던 그에게 집에 돌아가면 몇 시냐고 물었다. “아침 7시쯤 돼요. 집에 식구들은 다 출근하고 난 시간이지. 아내가 아침에 내려놓은 커피 냄새가 참 좋아요. 아무도 없는데 그 냄새가 나를 반겨주니까.”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새벽 5시, 하루 일을 마치고 잠깐 쉬러 들어온 기사들은 문을 열자마자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 커피를 탄다. 차림은 어딘지 후줄근해졌다. 얼굴은 축축하고 몸도 처졌다. 땀 냄새와 새벽바람 비린내가 풍겨왔다. 기사들은 곧장 종이컵을 집어 들었다. 믹스 커피 봉지를 뜯어 넣고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살짝 받는다. 살살 흔들며 커피를 녹인 뒤 찬물을 더한다.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세 개 넣는다. 물이 모자라면 찬물을 추가한다. 냉커피를 마셔도 잠은 쏟아진다. 그제야 센터에 흘렀던 배경음악이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대리기사들은 잠깐 눈을 붙인다. 쉼터가 문을 닫는 시간, 새벽 6시는 금방이었다. 운영지원실에서 나온 상근 간사가 잠든 대리기사들의 왼쪽 허벅지 아래를 톡톡 두드리며 깨운다 “갑시다~ 가자고요 가자우~”

마른 얼굴을 비비며 눈 뜬 기사들은 어김없이 커피를 탄다. 같은 방법이다. 새벽 6시 2분. 12시간 대리기사들의 쏟아지는 말들과 고된 몸들을 담아낸 쉼터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기사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은 모두 가명으로 처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