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모의 노동일기] 간판에 속지 말자
[손광모의 노동일기] 간판에 속지 말자
  • 손광모 기자
  • 승인 2019.09.03 09:52
  • 수정 2019.09.03 09:5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노동을 글로 적습니다. 노동이 글이 되는 순간 노동자의 삶은 충만해진다고 믿습니다. 당신의 노동도 글로 담고 싶습니다. 우리 함께, 살고 싶습니다.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간판이 번지르르 하다고 맛집은 아니다. 겉보기에 좋은 간판이 음식의 맛을 결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힙한 인테리어나 인스타용 차림새를 강조하는 가게는 정작 맛에서 맥이 풀릴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누추하고 허름한 간판이 맛집의 바로미터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고수의 손맛을 기대한 곳에서 실망하는 경우도 꽤 많다. 그럴 때면 허름한 가게 상태에서 느껴지던 달인의 아우라가 어느덧 식품위생법 위반의 소지로 보인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간판에 자주 속는다. 외관만 보고 사물의 본질(Essential)까지 간파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아무리 냄새가 좋고, 먹음직스러워보여도 입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방심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는 말에는 이러한 의미도 담겨 있다. 화려한 외관, 외모 등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보다 쉽게 드러나지 않는 ‘본질’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간판 뒤에 본질이 숨겨져 있더라도 간판 그 자체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맛집인지 판단하기 위해서 번지르르하든 허름하든 ‘간판’만 뚫어져라 봤던 것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도달하기 위해 보이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화려한 간판에 사람들이 쉽게 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질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체험할 수 있을 뿐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간판뿐이다.

간판이 모든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하자 간판이 사람을 압도하는 일도 생겨났다. 학벌, 직업, 직함 등 사람 앞에 붙는 간판은 그 사람 자체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본디 어떤 사람의 자존감은 간판과는 무관하지만, 서로의 간판을 비교하게 되면서 간판의 크기는 자존감의 크기와 비례하게 됐다. 기자도 가끔 간판에 밀려 자존감이 떨어지는 경험을 한다. “참여와혁신의 손광모 기자입니다.” “참여와 뭐요?” “참여와혁신입니다.” “참여연대요?” “….”

하지만 모든 사람이 소위 ‘알아주는’ 간판을 달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군가가 ‘판검사’, ‘국회의원’, ‘사업가’, ‘연구원’ 등 간판을 내건다면, 다른 누군가는 ‘청소부’, ‘경비원’, ‘조리원’, ‘생산직 노동자’ 등 간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회는 특별한 직업만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작은 간판’의 노동도 필요로 한다. ‘모든 노동은 가치 있다’는 상투적인 말에는 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 모든 구성원은 일정부분 타인의 노동에 빚져있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최근 국립대병원들은 병원 유지에 필요한 청소, 시설, 주차, 경비, 보안, 콜센터, 환자 이송 등 업무를 ‘환자를 직접 대면하는 업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회사를 통해 운영하겠다는 의견을 밝혔다. 세차장, 주차장 등 자회사를 통한 수익사업을 할 수 있다는 점도 덧붙였다. 썩 합리적인 설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기준이라면 병원장을 비롯한 병원경영업무를 먼저 ‘아웃소싱’하는 건 어떨지. 그게 아니라면 혹시 의사와 청소부라는 ‘간판’을 ‘노동자’라는 동일선상에 두는 게 못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국립대병원은 모든 국민의 건강권을 위한 공공기관이다. 하지만 ‘국립대병원’이라는 간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허름한 간판에 속아 맛없는 저녁을 먹은 소감이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