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란영의 콕콕] 내가 없는 미래에
[김란영의 콕콕] 내가 없는 미래에
  • 김란영 기자
  • 승인 2019.09.06 09:28
  • 수정 2019.09.06 0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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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콕콕’은 야무지게 자꾸 찌르는 모양을 뜻하는 의태어입니다.
상식과 관행들에 물음표를 던져 콕콕 찔러보려 합니다.
김란영 기자 rykim@laborplus.co.kr
김란영 기자 rykim@laborplus.co.kr

그래도 세상엔 몇 가지 공평한 게 있다. 그 중 하나는 ‘죽음’이다. 우리는 죽는다. 서울경찰청 권오영 검시조사관과 함께한 하루는 기자에게 죽음의 의미를 곱씹어 보게 했다.

죽음을 마주해본 것은 단 한 번뿐이었다. 4년 전 할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을 때다. 할아버지는 그날도 쉽지 않게 하루를 견뎌내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병상에 반듯하게 누워계셨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으면 맥박의 수치가 조금씩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지곤 했다.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한 마디가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삐이-’ 드라마에서나 듣던 소리가 났을 때 기자는 온 몸으로 부재에 저항했었다.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신발을 신겼다. 그 날 그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러다 다른 이의 ‘그 날’을 보게 됐다. 취재가 아니었다면, 좀처럼 경험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B씨의 자녀들이 자꾸 생각났다. 남매는 아주 조금씩 뒷걸음질 치면서 아버지한테서 멀어져갔다. 대문에서 저만치 떨어진 채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면 누가 볼까, 서둘러 닦아내기를 반복했다. 슬퍼도 되는데, 너무 많이 슬퍼하는 것은 어색한 일인 것처럼. 그 날의 풍경은 그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을 것이다.

권오영 검시조사관은 현장에서의 ‘슬픔’이 죽은이의 유족과 지인 간의 관계를 드러내준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죽음의 풍경은 죽은이의 생의 일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야 만다. 고인의 '몸' 말고도 삶의 일부까지 들여다봐야 하니 검시조사관의 하루는 때때로 참 버겁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오영 검시조사관은 죽음을 마주할 때 자신의 미래를 그려본다고 했다.

이제는 기자도 나의 죽음을 그려볼 수 있게 됐다. 삶의 화두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넘어 ‘어떻게 죽을 것인가’로 확장하게 된 셈이다. 나의 지인들은 나의 부재를 기다렸을까, 슬퍼할까? 기자는 죽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기자가 없는 미래에 기자의 눈동자를 들여다 볼 한 공무원 노동자의 얼굴을 상상해보기도 했다. 그의 하루가 누군가의 죽음으로 크게 힘들지는 않았으면. 기자의 '내일'을 억울함 없이 들여다봐 줄 미래의 검시조사관에게 미리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