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모의 노동일기] 신호를 지킬 것인가 어길 것인가
[손광모의 노동일기] 신호를 지킬 것인가 어길 것인가
  • 손광모 기자
  • 승인 2019.0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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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동을 글로 적습니다. 노동이 글이 되는 순간 노동자의 삶은 충만해진다고 믿습니다. 당신의 노동도 글로 담고 싶습니다. 우리 함께, 살고 싶습니다.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여름이 한 풀 꺾였다지만 햇빛은 여전히 거센 날, 6차선 도로는 차들로 빈틈없이 흐르고 있었다. 파란 신호를 기다리길 한참, 마침내 한 발자국을 내딛었지만 가슴이 철렁했다. 질주하는 차들은 길 위의 사람과 신호등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도로 위에는 운전자와 보행자라는 두 유형의 사람이 존재한다. 운전자와 보행자의 구분은 외양상 차 안에 앉아있거나 차 밖에 서있는 차이일 뿐이지만, 행위 규범이 재설정된다는 점에서 좀 더 심오한 면이 있다.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말처럼, ‘사람’보다는 ‘사람의 위치’가 중요해지는 것이다.

종종 보행자에게 길 위의 차들은 위협으로 다가온다.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오는 차에 가슴 철렁할 때가 많다. 그러나 운전대를 잡거나 승객이 됐을 때는 또 다르다. 분초를 다투는 출근시간대에 준법정신이 투철한 버스기사님은 괜스레 야속하다. 그렇다고 운전자와 보행자의 차이를 인간의 ‘이기적인’ 본능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운전자와 보행자의 관계는 대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차를 이길 수 없다. 차와 사람이 맞부딪치면 어김없이 사람의 목숨이 떨어진다. 모든 나라의 도로교통법이 ‘보행자 우선’에 맞춰져 있는 이유다. 하지만 법은 눈앞의 상황을 대처하기는 너무 멀리 있다. 우리는 횡단보도에서 미적거리는 보행자에게 고함치는 운전자는 종종 보지만, 반대로 횡단보도를 침범했다고 운전자를 질책하는 보행자는 드물다. 보행자의 잘못이든 운전자의 잘못이든 교통사고에는 보행자의 목숨이 걸려있지만, 즉각적인 제재의 대상이 되는 건 ‘보행자의 실수’다. 도로 위의 권력이 운전자에게 있다는 증거다.

해외 주요 선진국에서는 교통사고를 줄이기 위해 신호등을 철거하는 추세라고 한다. 보행자가 나타나면 운전자가 본능적으로 서행하는 습관에 착안한 것이다. 우리나라 일부 지자체에서도 이 정책을 도입하려 했지만 시범 시행 결과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보행자들은 더 많이 기다렸고, 운전자들은 더 빨리 달렸기 때문이다. 운전자 우위인 한국 도로의 실상이 그대로 드러난 셈이다.

도로교통시스템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완전하지 않을 뿐이다. 도로교통법은 보행자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각종 규칙을 제정했지만, 현실은 보행자가 운전자의 눈치를 보게 되는 양상이다. 현실을 규율하는 법도 법 바깥의 운전자-보행자라는 권력관계에 굴절됐다. 이는 중이 제 머리를 깎을 수 없는 것처럼 법이 스스로 보완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법조차도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한계다.

후지이 다케시는 이러한 법의 불완전함을 메울 수 있는 건 ‘정치’라고 말한다. “합당하지 않은 사소한 법을 매일 어기도록 하세요”라는 인류학자 윌리엄 스콧의 말을 인용하며, 다케시는 ‘신호등 안 지키기’와 같은 사소한 위법행위가 법의 근본취지를 다시 판단하는 정치적 주체를 만든다고 말했다. 적극적으로 도로교통법의 본래 취지를 말하는 ‘까칠한 보행자’가 늘어난다면 법의 취지를 왜곡하는 권력관계를 뒤집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바이지만, 사소한 위법행위를 당연하게 느끼는, 권력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행자’ 같은 사람에게는 사소해서 매번 지키는 법을 어기라고 요청한다면, 반대로 ‘운전자’ 같은 사람에게는 사소해서 매번 어기는 법을 지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일상의 권력관계는 너무나 애매해서 운전자와 보행자의 관계처럼 확실히 식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삶이라는 도로 위에서 보행자인지 운전자인지 판단하는 게 먼저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