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모의 노동일기] 부채의식 세대와 피해의식 세대
[손광모의 노동일기] 부채의식 세대와 피해의식 세대
  • 손광모 기자
  • 승인 2019.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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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동을 글로 적습니다. 노동이 글이 되는 순간 노동자의 삶은 충만해진다고 믿습니다. 당신의 노동도 글로 담고 싶습니다. 우리 함께, 살고 싶습니다.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마르크스는 모순에도 순서가 있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을 가진 부르주아 계급과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갈등이 자본주의 사회를 떠받치면서도 파멸로 몰고 갈 ‘중요모순’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견해에서 최근 조국 법무부 장관이 쏘아올린 ‘세대론’은 부차적인 모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론은 ‘시대정신’을 담고 있기에 중요하다. 시대정신은 알튀세르가 말하는 ‘중층결정’의 산물이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의 가치가 하나의 말로 집결되는 과정에서 현실의 권력이 반영된다. 요컨대 시대정신은 ‘엘리트의 담론’일 가능성이 높다. 시대정신의 주체로 노인이 아닌 청년, 가난한 사람보다는 중산층이 거론되는 점도 시대정신이 ‘강자의 담론’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소위 말하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60년대에 태어난 86세대는 자신들의 청춘을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86세대의 원동력은 ‘부채의식’이다. 86세대가 전태일에 감동하고, 80년 광주에 충격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순전히 ‘운’ 때문에 자신들이 엘리트가 될 수 있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노자는 ‘우리가 개인이 되지 못하는 이유’라는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다.

“43년 전에 진짜 지식인 함석헌이나 안병무에게 전태일의 죽음은 그들의 지적인 인생을 바꿀 만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 누구도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는 병영형 독재국가에서 살아야 했던 인텔리들에게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집안 형편상 죽어도 인텔리가 될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부채의식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86세대가 표방하는 가치는 ‘민주화’라는 글자 그대로 순수하지만은 않다. 강준만이 한국의 80년대를 ‘광주민주화 운동’과 ‘88올림픽’으로 요약한 바와 같이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던 86세대의 이면에는 부동산 투기로 상징되는 ‘돈’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87년의 명동성당은 86세대의 분열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장소다. ‘올림픽 난민’들이 철거를 피해 명동성당으로 갔을 때,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던 학생들과 짧게 마주친 적이 있다. 「상계동 올림픽」의 감독 김동원은 철거민과 학생들 간의 의미 있는 연대는 없었다고 당시를 회자한다. 그 시대의 철거민들은 86세대의 시대정신 속으로 편입되지 못했다.

86세대의 원동력이 부채의식이라면, 조국 사태에 분개하는 지금 세대는 ‘피해의식’으로 서로 뭉친다. 박노자는 같은 칼럼에서 이 세대가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너무 크기 때문에 온전한 개인이 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슬라보예 지젝은 긴박한 생존의 요청 자체가 이 시대에서 주체로 발돋움하기 위한 지배적인 형식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세대는 ‘생존의 긴박함’을 자양분 삼아 ‘개인’이 된다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성적 자유, 1968년 그리고 2018년’이라는 칼럼에서 이렇게 적는다.

“누군가 피해자가 되는 상황으로 누군가의 정치적 요구에 지나치게 권위를 부여한다는 것 또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운명을 스스로 온전히 책임지는 자유로운 주체가 아니라 자기 통제를 벗어난 피해자성의 권위에 의지해야 하는 것이 오늘날 주체성의 기본적 특징일까.”

정치적 냉소주의가 보편적인 지금, 정치적 행위에 나선다는 것은 자체로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오직 ‘피해의식’을 통해 정치적 주체가 된다는 사실은 문제적이다. 누군가에게 피해 받았다는 사실이 자신은 절대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지 않는다. 조국 사퇴를 요청하는 고려대 학생의 집회에 고려대 ‘세종캠퍼스’ 학생의 참여가 문제가 되는 현실은 피해자성으로 주체가 되는 일이 얼마나 피상적인지를 드러낸다. 그렇게 기성세대에 저항했고, 기성세대의 위선을 까발리는 두 세대는 ‘꼰대’와 ‘젊은 꼰대’가 되어 서로 부딪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세대론은 엘리트의 담론이다. 세대갈등이 함의하는 바는 한국사회 엘리트의 담론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86세대에게는 자신들의 고학력이 일종의 특권임을, 이름 없이 사라진 누군가의 희생에 기반하고 있다는 ‘부채의식’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친 요즘 세대는 ‘경쟁의 평등’이 침해당하는 일만은 참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열렬한 수호자가 된 것이다.

조국이 쏘아 올린 세대론은 86세대가 이루어 낸 한국의 자본주의가 앞으로 더욱 ‘불평등’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