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솜의 다솜] '나는 너다'의 위선
[정다솜의 다솜] '나는 너다'의 위선
  • 정다솜 기자
  • 승인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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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 사랑의 옛말. 자꾸 떠오르고 생각나는 사랑 같은 글을 쓰겠습니다.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정다솜 기자 dsjeong@laborplus.co.kr

위선을 떤 적이 있습니다. 퀴어 퍼레이드에서였습니다. 어느 성 소수자가 퍼레이드 카에 올라 살이 훤히 보이는 T-팬티를 입은 채로 엉덩이를 흔들었습니다. 길 위에서 타인의 엉덩이를 그렇게 가까이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내색하지는 않았죠. 목소리와 몸짓의 크기가 그들이 겪은 억압에 비례한다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냥 어색한 미소로 서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때 동행했던 사람이 나지막이 말했습니다. "XX 불쾌한데" 순간 막을 틈도 없이 속이 뚫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상대의 처지를 상상하고 나의 일처럼 여기려고 노력했지만 그 한마디가 위선을 벗겨낸 것 같았습니다. 며칠 부끄러웠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최근에도 그랬습니다. '나는 너다' 지난해 12월 태안 화력발전소 비정규직 故 김용균 씨 추모제에 등장한 선언입니다. 1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 저는 김용균 씨를 또다른 '나'로 마주하지 못했습니다. 방탄소년단 노래 부르기를 즐기고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치킨이었던 정규직을 꿈꾼 24살 청년 김용균을 일상에서 자꾸 깜빡했습니다. 취향이 비슷했던, 같은 꿈을 꿨던 김용균이 아닌 다른 세계의 '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로 그를 떠올렸습니다.

변명은 있습니다. 매일 타인의 고통은 넘쳐납니다. 김용균 씨가 사망한 이후에도 산업재해로 하루에 두 명꼴로 숨지고 있습니다. 어느 여성노동자들이 경찰의 진압에 저항하기 위해 마지막 수단으로 상의를 벗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수많은 아이들이 집에서 부모로부터 끔찍한 학대를 받고 있고 하루에 80건 이상 성폭력 범죄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고통에 대해 얼마만큼 알아야 할까요? 안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무력은 수시로 밀려오곤 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마다의 고통이 담긴 뉴스에 달린 댓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취재현장에 가보면 노동자들은 가짜보다 더 가짜 같은 현실에 놓인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이들에게 '감성팔이 하지 말라' '떼쓰지 말라' '지겹다'는 폭력적인 댓글은 쉽게 따라붙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터 밖으로 나온 노동자들은 새로운 폭력을 마주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자도 노동자들이 처한 비현실적인 사연을 들을 때마다 머릿속엔 자꾸 폭력적인 댓글들이 떠오릅니다. 노동자들이 그런 댓글을 마주하지 않도록 거짓 같은 현실이 현실'처럼' 보일 수 있게 각색이 필요한 건 아닌지 고민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짜 현실을 택해야겠죠. 그러기 위해선 개인의 고통을 추상이 아닌 구체로 전달하려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인 이야기에는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틈이 더 많다고 여전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 틈에서 '나는 너다'가 우리에게 뿌리내릴 수 있기를 희망해볼 수도 있겠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