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모의 노동일기]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손광모의 노동일기]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 손광모 기자
  • 승인 2019.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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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동을 글로 적습니다. 노동이 글이 되는 순간 노동자의 삶은 충만해진다고 믿습니다. 당신의 노동도 글로 담고 싶습니다. 우리 함께, 살고 싶습니다.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 나는 너를 보고 있잖아 / 그러나 자꾸 눈물이 나서 널 볼 수가 없어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 우린 아직 이별이 뭔지 몰라

이승철의 첫 번째 앨범에 수록된 타이틀곡, ‘안녕이라고 말하지마’의 노랫말이다. 밴드 부활이 해체되고 난 후 이승철이 홀로서기를 하면서 처음 발표한 곡이다. 이승철 특유의 강렬하지만 부드러운 미성이 잘 녹아 있다. 이 노래의 백미는 가창력도 가창력이거니와 이별 직전의 모습을 절절히 그리는 애절한 가사에 있다.

미처 이별을 준비하지 못한 한 사람에게 ‘안녕’은 크나큰 상처다. 하지만 어쩌랴. 가야 될 사람은 가야하고, 서로서로의 안녕을 빌어줘야 한다. 유투브에서 예기치 못하게 흘러나온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자니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안녕이라고 말하지마.’ 이 노랫말이 모든 의식(ceremony)의 원초적 감정을 나타내는 건 아닐까.

의식이라고 하면 흔히 원시부족 시대의 주술사가 신에게 비는 모습을 생각한다. 하지만 복잡한 의식의 예법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의식이 만들어졌는지, 그 기원에 대해서 생각해봄직하다. 나의 생각으로는 ‘만나서 반가운 안녕’과 ‘헤어져서 아쉬운 안녕’의 결합이 복잡하고도 신비한 의식 예법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생존하기도 어려운 어느 원시시대, 철이와 미애는 반가운 제스쳐를 주고받으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그런 철이는 어느 날 생존의 혹독함에 쓰러져 죽을 위기에 처한다. 미애는 철이를 살리려 지극정성으로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하지만 결국 철이는 미애에게 안녕이라 말하지 못하고 숨이 멎는다. 헌데 태초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낯선 것이었다. 한동안 미애는 이미 죽었지만 아직 죽음을 확인 받지 못한 철이의 몸을 두고 여러가지 민간요법을 시도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미애는 철이가 풍기는 죽음의 향기를 맡고서야 깨닫는다. ‘아, 철이에게 안녕이라고 말하기에는 늦어버렸구나.’

이별을 모르던 태초의 사람들이 안녕의 의미를 깨닫는 몸부림과 같은 과정이 바로 의식의 원형이 아니었을까. 어떤 방식으로든 이별에 대처하는 인간의 감정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현대의 일상생활에도 꽤 많은 부분이 ‘안녕 의식’에 속해있다. 아끼던 펜이 어쩌다 부서져버려 안타까워하는 마음부터 동료의 퇴사를 아쉬워하면서도 앞날을 기원하는 모습이나 둘도 없이 사랑하던 연인이 헤어져 난리블루스를 추는 모습까지, 모두 이별을 맞이하고 적응하는 저마다의 의식일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은 사물이나 사람에 따라 짧게는 몇 초에서 길게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이별한 대상과 함께할 때까지 의식을 계속 수행하는 경우가 있다. 죽을 때까지 이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다. 누군가에게는 손 쉬운 안녕이라는 말이 그들에게는 그토록 힘들다. 이런 상황의 사람들과 마주하면 저절로 그들이 행하는 의식에 참여하게 된다. 그 사람의 심정에 동화돼 그 사람이 잊지 못하는 이를 한번 더 기억하게 된다.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의 비이성적 믿음은 타인들이 죽은 이를 기억하는 순간 모순이 아닌 진실이 된다. 요컨대 추모하는 마음속에서 죽은 이는 되살아난다. 비록 ‘안녕이라고 말하지마’라고 말하는 순간만큼 잠시일 뿐이지만.

어제 고 서지윤 간호사의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서 간호사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평생 반복될 이별 의식이었다. 열띤 발제와 토론이 벌어지는 그곳에서 서지윤 간호사는 되살아났다. 의식이 신비로운 건 이처럼 사실을 뛰어넘는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