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 판매 노동자, 산별노조 꾸린다
화장품 판매 노동자, 산별노조 꾸린다
  • 정다솜 기자
  • 승인 2019.11.03 10:53
  • 수정 2019.11.03 12: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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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층 백화점·면세점 노동자 함께하는 것이 목표”
6개 화장품 노조, 3,000명 규모 산별노조로 전환

지난해 10월 1일 월요일, 민주노총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위원장 강규혁, 이하 서비스연맹) 소속 백화점·면세점 판매서비스 노동자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의자앉기 공동행동’에 돌입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 찍히면 어떻게 해? 나만 앉으면 어떻게 해?”
“같이 하는 거야. 다 같이 하는 거야. 걱정하지 마.”

오후 3시, 노동자들은 떨렸지만 용기 냈다. 장식품에 불과했던 의자에 진짜 앉는 순간이었다. 하인주 로레알코리아노조 위원장은 “노조가 결성된 지 16년이 됐지만 공동행동 이전까지는 앉아서 고객을 대기하는 건 상상도 못한 일”이라며 “이전엔 우리가 의자에 앉으면 백화점 관리자가 왜 앉았냐고 물으며 일일이 체크했기 때문”이고 설명했다.

이들의 떨렸던 공동행동 이후 백화점·면세점 화장품 판매 노동자가 의자에 앉아 고객을 기다리는 일은 점차 자연스러운 모습이 됐다. 함께 행동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6개 화장품 노조, 산별노조로 함께 뭉친다

‘의자앉기 공동행동’으로 연대의 힘을 실감한 서비스연맹 6개 화장품 노동조합(△로레알코리아 △부루벨코리아 △한국시세이도 △샤넬 △록시땅코리아 △클라란스코리아)은 10월 말 조직형태변경 투표를 한 뒤 11월 9일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전환을 앞두고 있다. 약 3,000명 규모의 산별노조의 명칭은 ‘백화점·면세점판매서비스노동조합’이다. 명칭대로 백화점과 면세점이라는 ‘공간’에서 판매서비스라는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모일 예정이다.

백화점과 면세점을 상대로 한 산별노조를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화장품 판매 노동자들이 실제로 일하고 관리·감독을 받는 공간은 백화점과 면세점이라는 원청사업장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원청사업장의 입점(협력)업체 소속 노동자다. 회사도 백화점·면세점 앞에서 을인 입장이라 노동자의 요구를 들어주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김성원 부루벨코리아노조 위원장은 “우리가 각자 회사랑 교섭할 수는 있지만, 백화점 협력업체라서 영업시간, 의무휴점 등 여러 노동 조건이 백화점과 더 관련 있다”며 “회사에는 풀 수 없는 문제라면서 외면하고 백화점은 우리랑 얘기하지 않으려 한다”고 기업별 노조로서 겪은 한계를 지적했다. 회사 내부보다 회사 외부에서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은 현실에서 문제 해결의 열쇠는 산별노조에 있다는 데로 화장품 판매 노동자들이 의견을 모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함께 풀어나갈 과제

화장품 판매 노동자들이 백화점·면세점판매서비스노동조합으로 뭉쳐 풀어나갈 과제는 크게 두 가지다. ‘쉴 권리 보장’과 ‘노동환경 개선’이다.

① 쉴 권리 보장

백화점·면세점 판매 노동자들은 휴식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저녁까지 이어지는 장시간 노동과 불규칙한 휴일로 인해 충분히 쉬지 못한다. “노동과 휴식을 한 쌍의 동일한 가치로 볼 줄 알아야 주말근무, 야근, 비정규직노동, 출산휴가, 생리휴가 등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할 수 있고, 인간화된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조효제가 책 「인권을 찾아서」에서 지적한 것처럼 노동할 권리와 휴식할 권리는 함께 고려해야 한다. 세계인권선언에서 제23조 일할 권리 바로 다음으로 쉴 권리가 규정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화장품 판매 노동자들의 장시간 노동은 현재 주52시간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백화점·면세점의 영업시간은 줄지 않아 연장근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맞닿아 있다. 이들은 보통 하루 10~12시간씩 근무한다. 길게 일한 만큼 임금이 오르는 건 아니다. 백화점에는 저녁에 연장근무를 하면 다음 날 그만큼 늦게 출근하도록 하는 ‘시차’라는 관행이 있어서다. 하인주 위원장은 “오버타임을 했으면 그만큼 임금을 줘야 하는데 우리는 ‘시차’라는 문화가 있다”며 “오버타임이 20시간이면 10시간 정도는 백화점에서는 강제로 시차해서 오버타임을 줄이고 있다”고 말했다.

시차 관행은 인력부족으로 이어진다. 김연우 시세이도코리아노조 위원장은 “노동자에게 백화점이 근무를 덜 시키면 매장에 빈 공간이 발생하지만 대체인력이 없다”며 “그러다 보니 노동강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화장품 판매 노동자에게 주52시간제는 일과 삶의 균형을 보장해주기는커녕 오히려 노동의 질을 헤치는 제도가 된 것이다.

휴일도 문제다. IMF 이전에 백화점은 정기휴점이 월 4회 있었지만 IMF 이후 계속 줄어들면서 지금은 월 1회 휴점하고 있다. 이마저도 불규칙적이고 백화점마다 다르다. 특히 면세점은 365일 연중무휴다. 물론 화장품 판매 노동자들은 주5일제 근무를 해 각자 휴일은 보장되지만 남들이 쉴 때, 가족과 같이 쉬기를 희망한다. 이는 국제노동기구(ILO)가 권고하는 같은 사업장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가 같은 날짜에 쉴 수 있는 ‘공동휴식권’ 개념과도 연결된다. 모두 백화점과 면세점이 영업시간과 정기휴점제도 등을 바꿔야 가능한 일이다.

② 노동환경 개선

화장품 판매 노동자들은 존중받지 못하는 일터도 함께 개선해나갈 예정이다. 이들은 백화점과 면세점이 오직 고객만을 위한 공간이라고 입을 모은다. 대표적 예가 냉난방이다. 백화점은 노동자가 있더라도 고객이 없으면 냉난방 시설을 가동하지 않는다. 김연우 위원장은 “오전 10시 30분에 오픈하면 그때야 매장에서 에어컨이 나온다”며 “한 시간 전부터 출근해 지하와 외부 창고를 왔다 갔다 하며 제품을 준비하면 땀에 흠뻑 젖는다. 한여름에는 유니폼이 젖을까 봐 작업복을 입은 채로 일하는데 속옷까지 갈아입어야 할 정도로 땀을 흘려도 백화점은 고객이 오기 전까지 에어컨을 안 틀어준다”고 비판했다. 반면 겨울엔 몸이 언 채로 고객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백화점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고객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셈이다.

매장 이외의 공간에서도 화장품 판매 노동자들은 투명인간이길 강요받는다. 이들은 유니폼을 입고 직원명찰을 단 채로는 고객이 다니는 길, ‘고객용 동선’으로 다닐 수 없다. 게다가 직원 전용 화장실, 직원 식당, 개인 사물함 등은 모두 고객이 움직이는 길과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면세점에서 일하는 김성원 위원장은 “매장 내에서 조금이라도 공간이 남으면 매대를 만들려고 하다 보니 사물함, 직원식당 등이 이제 자꾸 다른 건물로 넘어가고 있다”며 “건물 밖에 있는 개인 사물함까지 걸어서 15분이 걸린다. 직원식당도 그 근처다. 한겨울에는 얇은 유니폼만 입고 가기 너무 추우니까 몇몇 회사에서는 코트를 지급하는데 코트도 매장 근처 다른 곳에 보관했다가 입고 사물함에 다녀온 뒤 다시 벗어두는 식으로 직원끼리 돌아가면서 입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런 노동환경에서 구두를 신은 채 장시간 서 있어야 하는 화장품 판매 노동자들에게 휴게공간도 마땅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 또한 원청인 백화점과 면세점이 바뀌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부분이기에 화장품 판매 노동자들은 고객뿐 아니라 노동자도 존중받는 일터를 함께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모든 층 백화점·면세점 노동자 함께하는 것이 목표

백화점·면세점판매서비스노동조합은 현재 화장품 판매 노동자들이 주축이지만 백화점과 면세점에서 일하는 모든 판매 서비스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목표다. 하인주 위원장은 “우리는 지금 소수인데도 의자앉기, 고객용 화장실 이용하기 등 공동행동을 하며 조금씩 노동환경을 바꿔왔다.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는 소수이기에 힘이 빠지면 금방 무너질 수도 있을 거라고 본다”며 “1층뿐 아니라 모든 층 노동자들도 힘을 모아야 우리의 노동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더 많은 노동자들이 함께 행동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유종철 서비스연맹 조직국장도 “산별노조는 백화점·면세점에서 판매하는 서비스노동자들을 모두 조직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며 “의류판매, 가전판매 등 백화점 면세점에서 다양한 고용형태로 일하는 노동자들과 앞으로 함께 행동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1월 9일 오후 12시,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화장품 판매 노동자들의 첫 일정은 같은 날 오후 3시에 열리는 민주노총 ‘2019 전국노동자대회’가 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