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땅’, 대한민국 ‘초딩’과 대화하다
‘노땅’, 대한민국 ‘초딩’과 대화하다
  • 라인정 기자
  • 승인 2008.09.01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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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먹기 싫어서 대통령 안 할래요”
당돌한 ‘초딩’들은 대화가 ‘고프다’

“평소에 부모님하고 나누는 이야기요? 음, 잘 없는데. 그냥 학원에서 뭐 공부했냐는 거랑, ‘배고프니?’ 하면 ‘네!’ 하는 거?” “공부는 해야죠. 왜냐면 똑똑해야 뭘 할 수 있으니까.”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면 가장 먼저 2층집을 많이 지어서 부모님 2층 집 사드릴 거예요.” “엄마는 매일 일하시느라 바쁘고, 허리가 아프세요. 우리 가족이 모두 건강하면 행복해요.”

ⓒ 이현석 기자 hslee@laborplus.co.kr

 

 “요즘 애들은 버릇없어. 인사도 안 하고.” 고대 수메르 시대 쐐기문자판에 적혀 있다던 말이다. ‘어른’들 눈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아이’들이 마음에 안 드는 존재였다. 오늘을 사는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요즘 초등학교 애들은 우리 때랑 달라”라는 말은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 세상이 변하고 발전했으니 아이들도 과거 ‘우리 때’와는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닐까?

요즘 아이들은 어린이나 초등학교 학생이란 말 대신 인터넷 용어에서 시작된 ‘초딩’이란 은어로 더 많이 불려진다. 그리고 ‘초딩’은 몰지각하고 무례한 언행을 하는 사람이나 막무가내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부정적인 말로 인식되기도 한다. 후자는 다름 아닌 어른들이 규정지어버린 ‘초딩’의 모습이기도 하다.

실제 세상의 ‘초딩’들은 자기들만의 세계에서 어른들을 흉내 내며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기도 한다. 오늘의 ‘어른’들이 과거에 그랬듯이 말이다. 그런데 혹여 어른들은 모든 아이들을 ‘초딩’이란 이름에 가둬두고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그들을 이해하는 데 벽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어른들에게 가르쳐‘지고’, 길러‘지는’ 아이들은 공부에 대해, 가족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맹랑하지만 순수한 아이들이 대통령이 돼 만들고 싶은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 이현석 기자 hslee@laborplus.co.kr

1교시_ 우리도 ‘공부’ 하는 이유 알아요

초딩들은 방학에도 여전히 공부한다. 학원을 가고 도서관을 가고 공부방을 간다. 혼자서 학습지를 풀고, 친구들과 수업 듣고, 과제를 한다. 6학년 진수연 어린이는 방학에도 새벽 6시에 일어나 하루의 대부분을 도서관과 학원에서 보낸다. 수연이는 “엄마와 함께 정한 하루 일과가 만족스럽지만, 가끔은 지겹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엄마에게 혼날 말은 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그래서 그냥 혼자 생각만” 한단다.

이제는 거의 모든 아이들이 ‘초딩’이 되기 전 한글을 떼고, 구구단도 모자라 19단을 암송한다. 원어민을 통해 배운 영어 발음은 다 큰 어른들이 기가 죽을 정도다. 부모는 “자녀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자녀가 알아주길 내심 기대한다.

대부분의 ‘초딩’들이 자신들은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어른이 되기 위한 필요한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똑똑해지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 역시 아이들이 ‘배워서’ 알게 된 답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런 정형화된 ‘정답’ 속에서도 아이들만의 옹골찬 기운이 느껴진다.

송수연 어린이는 “공부를 잘하면 지위가 상승될 것 같다”며 어른들이 움찔할 말을 한다. 1학년 맹성주 어린이는 자신이 공부하는 이유를 아직 “모르겠다”고 한다. 하지만, 공부를 더 잘하는 게 현재의 소원이다. 성주는 “공부 잘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다”고 한다.

ⓒ 이현석 기자 hslee@laborplus.co.kr

벌써부터 공부가 ‘내 일’라고 말하는 어른아이가 있는 반면, 2학년 송다연 어린이는 공부는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하는 것”이라며 천진한 웃음을 보이고, 유신애 어린이는 “세계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고 싶다”며 엄지손가락을 한껏 치켜세웠다.

이제 1학년인 이채림 어린이는 “엄마, 아빠가 똑똑하고 좋은 사람 되라면서 하라고 해서” 공부하고 있다. “그래서 채림이는 공부하는 거 안 좋아?”하고 물으니, “아니요! 저 똑똑하고 좋은 사람 될 건데요?”하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마지못해 ‘공부해주고’ 있는 ‘초딩’도 있다. 2학년 이명희 어린이는 “아빠가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 명희는 대통령 하고 싶어?”하니, “열심히 공부해야지 할 수 있대요”라고 알려준다. 아이가 만들기 전에 먼저 대통령이란 꿈을 제시해주고, 방법까지 알려 준 부모의 진심이 아이에게도 온전히 잘 전달됐을까?

초딩들이 말하다 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

- 환경. 환경이 나쁘다. 지구가 아프지 않으면 좋겠다. (2학년 윤소은)
- 돈. 내가 현실주의자라서. (6학년 이승경)
- 나. 내가 없으면 안 되니까. (2학년 김찬우)
- 가족. 가족이 없으면 심심할 거고, 직접 밥을 차려 먹어야 한다. (3학년 이채은)
- 닌텐도. 닌텐도를 잃어버리면 아빠한테 혼난다. (2학년 이명희)
- 여러 가지. 나한테 중요한 것은 너무 많아 다 쓰지 못한다. (5학년 정민기)
- 건강. 자신의 건강이 해로우면 나중에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3학년 김설빈)
- 하늘과 땅. 하늘과 땅이 중요하기 때문에. (4학년 김한영)
- 공부. 서울 대학교를 가기 위해서. (1학년 맹수민)
- 취미활동. 자기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니까. (5학년 김예송)
- 생명. 생명이 없으면 세상에 살지 못하니까. (3학년 유태형)
- 돈. 아무거나 살 수 있으니까? (3학년 김찬양)
- 가족. 가족이 없으면 의식주 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 (5학년 이세인)
- 소중한 마음. 마음이 없으면 나쁜 사람이니까. (1학년 정민화)
- 인생이 사는 거죠? 가장 중요한 건 일단 건강. 그 다음에 자기 살아가는 환경에 맞게 잘 생활하는 것. (6학년 진수연)
- 우리나라. 나라가 없으면 살 곳이 없기 때문에. (2학년 좌대현)
- 공부. 좋은 사람이 되니까 좋다. (1학년 이채림)
- 목숨. 목숨을 잃게 되면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6학년 유슬)

 

2교시_ ‘초딩’ 대통령이 하고픈 일은?

어릴 적 누구나 한번쯤 대통령을 꿈꿔보지 않았을까?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직업. 어쩌면 대통령을 무제한의 힘, 동화 속의 도깨비방망이를 쥐는 존재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어릴 적 그렸던 남북통일과 세계평화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대통령의 모습이 지금 아이들 머릿속에선 어떻게 존재할까? ‘수없이 많은 비판’도 ‘비자금’도 모를 것 같은 우리 아이들이 도깨비방망이를 두드려 외치고 싶은 소망은 무엇일까?

우선, 과거와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 대통령은 더 이상 모든 아이들의 머릿속을 한 번쯤은 스치는 매력 있는 직업이 아니었다. 1학년 김유빈 어린이는 단번에 “대통령하기 싫다”고 답한다. 이유는 “사람들한테 욕먹기 싫어서”다.

대찬 포부를 가진 아이들도 있다. 답답한 어른 대통령이 하지 못하고 있는 일들도 이들은 자신 있다. 조용운 어린이는 대통령이 되면 가장 먼저 “시민들이 잘 살게 서민 경제를 살리겠다”고 주장한다. “지금 서민 경제가 어려워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신현준 어린이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과 불법 다운로드를 금지하겠다”고 말한다. “나쁜 것들은 막아야 하는 게 대통령이 할 일”이라고 덧붙인다. 5학년 김예송 어린이는 선진국이 되기 위해 “최첨단 시설 등 주목받을만한 기술을 만들고 싶다”는 구체적인 포부도 밝혔다.

또 많은 아이들이 “환경을 지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대답했다. 그 와중엔 역시나 ‘초딩’만이 할 수 있는 재치 있는 대답도 있다. 김도현 어린이는 대통령이 되면 가장 먼저 “마이크에 대고 말을 해보고 싶다”고 한다. 마이크에 대고 “엄마, 아빠 나 대통령 됐어요!”라고 외치고 싶단다.

2학년 백해리 어린이는 친구들과 놀아야 하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어서도 “공부방에 계속 가고 싶다”고 전한다. 공부방과 학원이 또다른 놀이터가 된 현실이 아이의 말 속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3학년 이병호 어린이는 “사계절을 방학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밝혔다. “그럼 학교 선생님들은 어떡하지?”하고 묻자, 웃으며 금세 돌아오는 한 마디. “우리 선생님들도 다 방학 좋아해요!”

ⓒ 이현석 기자 hslee@laborplus.co.kr

3교시_ 내리사랑도 치사랑도 한 마음이더라

맞벌이 가정이 늘면서 부모와 자식 간의 유대도 확연히 줄었다. 매일 각자가 일터와 학원에 얽매여 서로 얼굴을 마주할 시간이 없다. 함께 대화할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다. 서로가 사정을 알고는 있지만, 이해하는 속내와는 달리 실망을 앞서 표현하기도 한다.

취재 동안 만난 많은 아이들이 우리가 집에서 부모님과 하는 대화는 “학원에서 뭘 배웠는지”나 “학교에선 뭘 했는지”에 대한 것 뿐이라고 말했다. 부모 자식 간에 더 단순한 대화만이 존재하는 가정도 있었다.

초딩들이 말하다 ② 『행복이란?』
- 우리의 소원을 이뤄주는 것이다. (3학년 이병호)
- 노는 거다. (1학년 이용환)
- 부모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5학년 정민기)
- 내가 웃을 수 있는 일이다. (6학년 유슬)
- 돈 받고 놀 때다. (3학년 유태형)
-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2학년 송다연)
- 부모의 사랑이다. (2학년 윤소은)
- 우리 가족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은 거다. (1학년 맹수민)
- 바다를 가는 것이다. (3학년 김요담)
-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다. (5학년 김예송)
- 가족과 놀 때다. (3학년 김은숙)
-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다. (5학년 이세인)
- 사랑받는 것이다. (3학년 정승희)
- 친구랑 있을 때다. (3학년 오아인)
- 상쾌하고 즐겁다. (2학년 이명희)
- 지금 있습니다. (1학년 맹성주)
-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다. (3학년 김유림)
- 공부를 안 하는 것이다. (3학년 김찬양)
- 배부른 거. (6학년 이승경)

김유림 어린이는 학원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컴퓨터 해도 돼요?”라고 묻고 방에 들어간 뒤, 끼니 때 엄마가 “배고프냐?”고 묻는 게 하루 대화의 전부라고 한다. “유림이는 엄마랑 무슨 얘기 하고 싶어?”라고 묻자, 돌아오는 한 마디는 “별로 할 얘기가 없어요”다. 무엇이 유림이를 조금씩 머뭇거리게 해 결국 모든 말을 삼키게 만든걸까?

5학년 정민기 어린이는 “부모님과 돈 문제나 사회문제를 주로 얘기한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이란 의문이 들어 물으니, 곧바로 “용돈 쓰는 얘기, 광우병 쇠고기 얘기, 대통령 얘기를 한다”는 거다.

어떤 아이는 “부모님에게 하루에 대한 모든 설명을 하고 있다”며 “엄마가 계속 이것저것 물어 귀찮다”고 하고, 어떤 아이는 “엄마, 아빠가 말을 무섭게 하기 때문에 아예 대화를 피한다”고 했다. 아이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한 대화에 앞서,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보다 먼저 아이들이 하고 싶은 말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건 모든 부모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쉽게 실천하지 못할 뿐이다.

요즘 ‘초딩’들의 가족사랑은 의외일 정도로 대단하다. 가족, 친구, 선생님 중 가까운 순서를 묻자, 거의 모든 아이들이 가족을 1순위로 꼽았다. 주저 없이 지금 바라는 것은 “힘든 부모님이 일주일이라도 쉬었으면 좋겠다”는 거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라 정의 내리는 ‘초딩’도 있었다.

집에선 지지리도 말 안 듣는 말썽꾸러기 같지만, 가족에 대한 속정이 깊었다. 아이들이 꼽는 ‘방학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한 여행이다. 짧은 시간이었음에도 소중한 가족과 함께 했기에 공부로 가득 찼던 나머지 방학 기간도 행복했었단다.

ⓒ 이현석 기자 hslee@laborplus.co.kr

 

인터넷 세대인 요즘 초딩들은 어른들과 팀을 이뤄 온라인 게임을 한다. 사회적 이슈기사 아래선 대등하게 댓글 싸움도 한다. 포털사이트에 궁금증을 올리면 답해주는 존재도 ‘초딩’들이라고 한다. 어른과 함께 하며 말과 행동을 자연스레 모방하기도 한다. 그래도 그들은 아직 “엄마 아빠, 건강하세요!”라고 말하곤 부끄러워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어린이다.

“엄마, 아빠와 함께 놀러가고 싶어요!”하는 모든 아이들에겐, '나도 정말 그러고 싶지만, 이렇게 힘들게 고생하는 것은 다 널 위해서야'라는 말을 속으로 삼킬 수밖에 없는 부모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 어른들은 소소한 일상 속, “엄마, 아빠 사랑해요!”란 아이의 한 마디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 역시 마찬가지다. 부모의 관심 어린 말 한마디, 애정을 가득 담은 손길 한 번으로 아이의 행복지수는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