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순의 얼글] 참 나약한 시간이 필요하다
[박완순의 얼글] 참 나약한 시간이 필요하다
  • 박완순 기자
  • 승인 202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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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순의 얼글] 얼굴이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사람의 얼굴을 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미국의 색채 연구소 팬톤이 2020년 컬러를 발표했다. ‘클래식 블루’이다. 해가 진 뒤 하늘 어스름을 표현한 색이다. 해가 넘어가고 나면 고요하고 무겁게 나타나는 짙은 파랑이다.

왜 팬톤은 클래식 블루를 올해의 색으로 선정했을까. 팬톤은 올해의 색을 선정하면서 불안한 현대와 그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을 생각했다. “클래식 블루의 안정적인 질감은 보호를 받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팬톤은 공식적으로 이야기했다. 부연 설명도 있는데, 어쨌든 차분함과 안정감을 전달해준다는 내용이었다.

클래식 블루가 그런 느낌인가 생각하다 2019년은 리빙 코랄, 2018년은 울트라 바이올렛, 2017년은 그리너리, 2016년은 로즈쿼츠였다는 게 떠올랐다. 2015년부터 그 이전 색들은 모른다. 왜냐면 내가 팬톤이 선정한 올해의 색을 ‘외운 것’은 2016년 색부터였기 때문이다.

2016년부터 취업 준비를 했다. 취업 필기시험에 시사 상식 문제가 나왔고, 팬톤이 선정한 올해의 색은 단골 예상문제였다. 그래서 ‘외웠다.’ 외우기 바빠서(예상 시사 상식 문제를 머릿속에 꾸역꾸역 넣기 바빠서) 해당 색이 그 해의 색으로 왜 선정됐는지 이유를 찾아보지 않았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다시 2020년 색 클래식 블루를 생각했다. 불안한 현대인이라니 뭐라니 이유를 붙였는데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취업이 안 돼서 팬톤 올해의 색을 외웠던 날들은 불안한 날들이었다. 그런 날들이 해를 넘기며 쌓여가면서 불안은 도태되고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해방감은 전혀 없고 정체감만 명치끝에 쌓였다.

2018년 마지막 3개월은 놀았다. 안정감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스트레스를 잊을 시간이 필요했다. 오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운동을 했다. 씻고 자정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친구와 PC방에 가 게임을 했다. 클래식 블루, 해가 지고 난 뒤 하늘의 어스름과 딱 맞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해가 지고 난 뒤 하늘을 물들이는 클래식 블루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어두움으로 바뀐다. 결국 그 시간뿐이었다. 일종의 도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놀고 밤을 새고 나도 어두웠다. PC방을 나와 맞는 새벽 햇빛은 정말 최악이었다. 빛났지만 가장 어두운 시간이었다.

클래식 블루, 참 나약한 색이다. 영원한 안정과 편안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말이다. 되레 클래식 블루의 시간이 지나면 이 세상에서 나는 더 허약했음을 인지하는 시간으로 들어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체육관(오후 6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운동했던 그 체육관)에 간 어느 날, 운동을 하고 나와 관장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시간을 쏟은 만큼 절친한 관장님이었다. 이것저것 사는 이야기를 하다 그 때 그 3개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일종의 도피였다는 나의 말에 관장님은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며 많은 사람들이 쓸모없는 시간처럼 말하는데 본인은 적어도 유용한 시간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너’에게 필요한 시간이었다는 말을 했다. 오랜만에 체육관에 들렀는데 오랜만에 역시나 마음이 편해졌다.

저녁 어스름 하늘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 잔인한 말처럼 들릴지 몰라도 저녁 어스름 하늘의 몇 시간 안 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우리는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지프스 신화의 시지프스처럼 돌덩이를 밀고 산꼭대기로 올라가 잠시 기뻐할 찰나에 돌덩이는 굴러 떨어지고, 다시 돌덩이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리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2020년 목표와 계획을 어떻게 하다보니 세우지 않았다. 아직 음력으로 1월 1일은 안됐으니 시간은 조금 남았다. 여러 목표와 계획을 세워봐야겠다. 와중에 하나는 생긴 것 같다. 나만의 클래식 블루 시간을 꼭 가지는 것, 꼭 찾을 것. 돌덩이를 계속 산꼭대기로 올려야 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