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뽀-고령화로 시름하는 주력산업 생산현장
현장르뽀-고령화로 시름하는 주력산업 생산현장
  • 승인 2004.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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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것도 서러운데... 건강, 임금, 세대갈등의 지뢰
“나이 많은 사람들 일 잘 하더라 이래 쓰소”

“생산성, 당장은 문제없다” 노사 한목소리

 

“뭘할라꼬 자꾸 그런 걸 취재하는교? 이제 늙었으니까 그만 나가라 이칼라고 그러는 긴지 와 그라는긴지 몰라도, 우리는 아무 문제없이 잘 하고 있으니까네 고마 쫌 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 일 잘 하더라 이래 쓰소. 안 믿기마 여 한번 쭉 돌아보든지.”


이런, 첫날부터 낭패다. 울산 방어진에 위치한 현대중공업 도장 2부.

 

작업모 사이로 설핏 삐져나온 흰머리를 보고 다가간 한 늙은 노동자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쏘아붙이고는 말을 부쳐볼 틈도 안 주고 겹겹이 쌓인 철판들 사이로 사라졌다.


울산의 대규모 공장들을 둘러보는 동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고령의 노동자들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회사에서 높은 임금을 이유로 자신들을 쫓아내려 한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이들을 괴롭히는 듯 했다.


현대중공업 판넬조립 2부의 김건수씨(56·가명)는 요즘 걱정이 많다. 함께 일하던 동료가 일거리가 적은 한직으로 배치되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


“거 가고 나서 연장도 없고, 특근도 못한다데요. 딱 8시간 정상근무만 하니까 한달에 130만원쯤 받아간다꼬 울상이라예. 내도 아들 놈 하나 군에 가 있고, 기집애 하나가 대학교 3학년이라. 막내 놈도 대학 보내야 하고, 돈 들어 갈 데는 쌨는데 걱정이제.”


태풍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맞았는지 어둡게 내려앉은 하늘만큼이나 김씨의 한숨은 무거웠다.
최근 조선업계가 고령화 대응방안으로 아웃소싱이나 비정규직 채용을 확대하면서 현장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고용불안 심리가 더 확산되고 있다.

 

국내 조선 빅3의 경우 현대중공업은  정규직 1만6천명에 비정규직 1만1천명, 대우조선은 정규직 7천명, 비정규직 7천명, 삼성중공업은 정규직 4500명, 비정규직 7천명 가량이다.

 

“생산성 보다 건강ㆍ인건비가 걱정”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는 산업은 다 모여 있는 울산. ‘수출의 역군’으로, ‘생산의 주역’으로 화려한 전성시대를 구가했던 자동차·조선·화학 업종 등의 노동자들은 청년기를 지나 중년기를 넘어서고 있다. 현대차의 생산직 노동자 평균 연령은 39.5세. 단순 조립라인 노동자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미 고령화에 접어들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현대중공업 생산직 노동자의 평균 연령은 무려 43.6세. SK(주) 울산공장 생산직의 평균 연령도 38.5세에 도달했다.
생산직의 고령화를 두고 생산성 저하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지만 현장 인사담당자들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SK(주)의 인사팀 김경배 부장은 “정유업 같은 장치 산업의 경우 평균근속 10년이 넘어간 사람들은 가장 스킬이 높은 사람들이고 이때가 생산성, 숙련도 등 모두가 최정점이라고 볼 수 있다”며 “생산성 보다는 수직적으로 올라가는 연공급 형태의 임금이 부담”이라고 말했다.


고숙련을 요하는 조선산업도 비슷한 경우다. 현대중공업 노사협력팀의 윤정인 차장은 “조선소에서 ‘기술자’ 소리 들으려면 적어도 4~5년은 걸리고 10년이 넘어야 다른 사람에게 일을 가르칠 수 있다”며 “숙련자들을 적절히 활용하고 신규채용을 꾸준히 해나가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장치산업이나 중공업과는 달리 단순조립직이 대부분인 자동차업종 관계자들은 고령화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느끼고 있다. 현대자동차 인사팀의 김모 차장은 “임금비용보다 근골격계 질환 등의 산재 증가와 질환에 대한 면역이 떨어진다는 점이 더 걱정”이라며 “집중력 감소로 인한 사고 발생률 증대 등 노동력 손실은 생산성으로 직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퇴직 때 이 공장을 ‘걸어 나갈’ 수 있을런지”
실제로 나이가 많은 노동자들일수록 건강에 대한 중압감이 컸다.
울산 고사동에 자리잡은 SK(주) 울산공장. 태풍 ‘메기’ 때문에 공장 곳곳의 설비를 점검하고 구석구석 살펴보는 노동자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서너 명의 노동자가 작업 중간에 짬을 내 담배를 한 대씩 피워 물고 벤치로 향한다.


연세를 여쭤봐도 실례가 안 되겠냐는 질문에 대뜸 “아가씨 몇 살인교? 내 아가씨보다 더 과년한 딸이 있다 아이가”하면서 농인지 진인지 모를 말을 던진다. 작업모를 벗자 그제야 흰머리와 이마의 주름살이 드러난다. 올해 근속 24년차인 동력팀의 권두철(55·가명)씨. 


“이제 내는 5년만 버티마 고마 나가면 되지만 젊은 아들을 이렇게 안 뽑고 이라다가 한 5년 지나면 공장이 노인정 될 판이라.”


묵묵히 담배를 피우던 김동석(51·가명)씨가 말을 받는다. “행님만 무사히 나가면 고만이가? 사람이 새로 안 들어오니까 우리 일이 갈수록 힘들어 진다 아입니까? 내는 정년 때 이 공장을 멀쩡하니 걸어서 나갈 수 있을까 걱정이고마는….”
현재 생산의 ‘허리’역할을 하고 있는 40대들이 향후 20년간은 더 생산을 떠 받쳐야 한다고 볼 때 건강의 손상 문제는 심각할 수밖에 없다. 육체적 노화야 막을 수 없지만 작업환경의 영향까지 있다.


SK 노동조합의 김창근 산안부장은 “벤젠 등의 유기용제에 10년 이상 노출되어 있다보면 틀림없이 몸 한구석이 고장나게 되어 있다”며 “제대로 실태파악을 해보면 백혈병 유해인자를 가진 노동자들이 태반일 것”이라고 했다.

 

지난 2년간 SK(주)에서 백혈병으로 산재인정을 받은 생산직 노동자는 4명이다. 실제로 HOU 생산팀이나 용제 생산팀 등 유해물질에 그대로 노출된 생산라인에 들어가자 1시간이 채 못 되어 눈이 따끔거려왔다. 정유·석유화학 공장에는 대대로 딸부자집이 많다는 속설이 있다. 유해물질에 노출된 노동자들의 아들 생산 능력(?)이 떨어진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다.


석유업체에 유해물질로 인한 질환이 많다면 조립업체에는 단연 근골격계 질환자가 많다. 울산지방노동사무소가 지난 4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울산에서 근골격계 질환 판정을 받은 노동자는 모두 787명으로 2002년의 384명 보다 두 배 늘었다. 사업장별로는 현대자동차에서 440명이 발생해 2002년의 78명에 견줘 6배 가까이 늘었고, 현대중공업에서는  216명이 새로 발생했다. 지난해 이들 두 사업장의 근골격계 질환 노동자 수는 전체의 83%를 차지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씩 반복작업을 계속한 노동자들의 경우 일에 대한 만족감도 점차 떨어지고 있었다. 현대자동차 5공장 의장라인에서 만난 이철형(48·가명)씨는 “이제 눈감고도 일을 할 수 있다”면서도 “갈수록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힘들어 진다”고 털어놨다. 

 

“기름밥 20년, 고참 대접 좀 받아 보자는데…”
신규채용이 없는 상태에서 평균 근속년수가 계속 올라가면서 인사적체에 대한 불만도 쌓이고 있다. 중질유분석팀의 하인석(34·가명)사원은 “다른 회사보면 입사 10년차면 조반장 달 때라 아닙니까. 내는 아직도 말단 사원인기라. 이제는 일도 배울만큼 배았고 공정에 대해서 빠삭하게 아는데 맨날 지시만 받으니까 일하는 기 별로 재미가 없는 기라요” 그는 이미 리더가 될 사람들이 수도 없이 위만 바라보고 있다며 이것이 조직 내 갈등으로 번질 위험이 있다고 걱정했다.


고참사원들의 불만도 만만치 않다. 입사 21년차인 HOU생산팀 김인수(43·가명) 선임대리는 “9년차나 21년차나 똑같이 대리다 보니까 이건 뭐 선배도 없고 후배도 없고 뭘 시키면 눈이나 치뜨고 그러는 기라. 내도 기름밥 20년에 고참 대접 좀 받아보고 싶다는데 뭐 잘못됐는 기요?”

 

승진에 대한 불만은 회사의 인사정책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 회사의 인사팀 관계자는 “어떤 사람은 편한 일만 계속하고 어떤 사람은 힘든 일만 한다는 불만은 조직 내부의 갈등을 넘어서 노사 간의 갈등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올해 상반기를 뜨겁게 달궜던 LG칼텍스 정유의 파업에도 승진 적체에 대한 불만이 일부 작용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SK나 LG정유뿐 아니라 석유화학업체의 사정은 대부분 비슷하다. S-oil 12.5년, LG화학 여수공장 14.4년 등 생산직 근속연수는 이미 10년을 넘어섰지만 최근 들어 신규채용은 거의 없었다.

 

“우리가 와 행님들 짐을 나눠져야 하는교”
작업장 내에서의 세대간의 갈등도 위험 요소. 현대중공업의 판넬조립 2부는 자체적으로 로테이션 (부서 내의 직무순환)을 실시하고 있다. 한 쪽 근육만을 써 작업하는 데서 오는 신체적 무리를 줄이기 위한 자구책의 일환이다. 95년 이래로 꾸준히 신규채용을 했기 때문에 30대부터 50대 후반까지 연령대가 다양한 노동자들이 함께 일을 하고 있다.


철판의 녹을 벗기느라 땀을 빼고 있던 선행도장부의 장용수씨(35·가명)는 젊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술을 마실 때는 ‘행님’들 때문에 자신들이 더 일을 많이 해야 한다는 불만이 심심치 않다고 전한다. ‘행님’들도 불만이 없는 건 아니다. 예전처럼 선배들을 대접해 주고 힘든 일을 알아서 나누던 문화가 점점 사라진다는 것.

판넬조립 2부의 구필환(58·가명)씨는 나이 상관없이 모두 똑같이 순환하는 반이 늘어나고 있다고 전한다. “나이 마이 묵어가 젊은 아들한테 피해준다카는 소리 듣기도 싫고, 자존심도 상해서 웬만해선 힘든 티 안낸다 아이가”라면서도 “지들도 나이 묵는 날이 오면 알끼고…”라고 말끝을 흐린다.


현장 내에 잠재한 세대 간의 갈등은 노노 간의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마저 있어 보였다. 노조의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젊은층들 사이에서는 ‘싸움은 우리가 하고, 성과는 늙은이들이 챙긴다’는 불만이 공공연하게 제기되고 있었다. 현대자동차의 한 현장활동가는 “고용과 노후에 대한 불안에 커진 고령조합원들이 대부분 친회사적인 성향을 갖는 반면, 고용보장 문제에 관해서는 노조에 대한 의존심도 커지는 이중성이 강해진다”고 말했다. 이 활동가는 “수년 안에 조합원간의 세대 갈등이 폭발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행님은 최고 기술자, 그리고…내 삶의 조언자”
생산 현장에서 장기근속자들은 ‘없어질 수 없는’ 존재일뿐더러 ‘없어져서는 안 될’ 존재이기도 하다. 장치산업이나 조선산업처럼 노동집약적 산업의 경우 10여 년간 현장에서 축적한 노하우나 기술이 경쟁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철강산업 역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노동자들의 평균연령이 높다는 사실 자체가 그대로 문제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회사 관계자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한국철강협회의 한 임원은 “나이 많은 숙련공과 근력이 강한 젊은층 노동자들이 조화를 이루어야 생산 노하우가 전수되면서 최대의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다”며 “숙련공들의 노동력과 기술을 보호할 수 있다면 생산성이 급격히 하락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숙련된 기술뿐만 아니라 연륜에서 나오는 리더십도 고령 노동자들의 강점이다. 현대중공업은 이 장점을 살려 신입사원에게 장기근속자들을 ‘삶의 조언자’로 삼도록 하는 ‘멘토링’제도를 도입했다. 이 프로그램에 멘티(조언을 받는 사람)로 참여하고 있는 선체조립팀의 김지운(31·가명)씨는 오랜 경험에 우러나오는 기술도 배울 수 있지만, 가정사나 인생사에 이르기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한다. “이제 가정도 꾸리고, 다 큰 사나가 어데가서 찔찔 짜겠는교. 행님하고 쐬주 한잔 하면서 다 털어 놓고 나마 속도 시원하고 행님이 등 한번 툭툭 뚜드려 주마 꼭 아버지 같다 아입니까”


현대중공업 인사팀의 관계자는 “장기근속자들의 강점인 리더십을 발휘해주면 생산현장의 세대 갈등이 줄어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노동력의 고령화가 대세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들의 숙련된 기술적·사회적 노하우를 기업 경쟁력으로 삼는다면 오히려 시너지 효과가 발휘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날. 태풍이 물러갔다는 데도 하늘에는 군데군데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먹구름 뒤에는 언제나 태양이 빛나고 있다’는 서양 속담처럼 고령화라는 ‘먹구름’ 은 새로운 기회도 머금고 있었다. 이 구름이 엄청난 비를 뿌리는 재앙이 될 것인지 빛나는 태양의 전조가 될 것인지는 아직은 모른다. 지금 우리의 산업현장은 바로 이 기로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