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침략으로 동아시아가 안정됐다”
“한반도 침략으로 동아시아가 안정됐다”
  • 승인 2005.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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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가 조선 근대화” 주장하고,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은 합리화

 

2005년은 ‘한·일 우정의 해’다.

 

수교 40주년이자, 한류 바람으로 양국 간의 ‘거리’가 상당히 좁혀진 터에 나름대로 시의적절한 기획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2005년 4월, 한일 양국 사이에 ‘우정’이란 단어는 전혀 어울리지 않고 있다.


역사 교과서 왜곡 파문이 서서히 시작될 무렵, 일부 국내 극우 인사들의 ‘식민지배 축복’ 운운 발언에 이어, 일본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조례 제정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그간 한일 관계에 있어 조용한 외교를 천명하던 정부조차도 초강경 대응 움직임을 보였다. 대통령은 외교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나섰고, 국방차관은 독도에 미사일 기지를 세우는 것도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다.


물론 이같은 양국 간의 대결 양상이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일본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이라는 외교적 과제를 안고 있고, 한국으로서도 일본이 자중하는 모습을 보일 경우 실효적 지배 상태인 독도 문제를 국제적 분쟁거리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다.


지금으로서는 독도라는 영토 문제가 전면에 불거져 있지만, 정작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 역사교과서의 왜곡이라는 시각도 있다. 독도 문제에 대해 ‘너희들은 떠들라. 우리는 무시한다’는 식의 무대응으로 일관하든, 혹은 강경한 외교적 대응책을 내놓든 간에 독도가 한국의 지배 하에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왜곡된 역사 교과서는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게 되고, 이는 향후 한일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일본 역사왜곡교과서 제작과 채택 홍보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을 주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들은 현재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자학적’, ‘반일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지난 2000년에 왜곡된 역사교과서를 제작, 검정본을 일본 문부과학성에 제출했다. 이에 대해 한국의 시민·피해자 단체와 국회 및 대통령까지 대대적으로 왜곡부분 시정요구 및 불채택운동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01년 8월 ‘새역모’ 교과서는 0.039%(521권)만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2004년 ‘새역모’측은 왜곡의 정도를 더해 ‘2005년도 교과서 검정본’을 제출했다. ‘새역모’교과서는 4월 초에 있을 일본 문부성 검정을 무난히 통과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는 가운데, ‘새역모’측은 8월 교과서 채택에서 10% 이상 채택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여기에 2004년 11월 창립50주년을 맞은 자민당이 올해 운동방침을 ‘교육국가의 재흥’으로 내세우며 교육기본법개정을 중요한 과제로 내세웠다. 또 일본 문부성 관리가 “교과서 채택 권한이 일선 학교나 교사가 아닌 교육위원회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등 일본사회는 ‘새역모’교과서 채택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이러한 ‘새역모’측의 움직임에 대해 우리의 대응은 다분히 감성적이지 않는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새역모’측의 역사교과서가 어떻게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역사교육에 대한 인식과 태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일본 역사 교과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살펴보자.


1. 임나일본부설
백제를 도와 고구려와 싸우다
고대 조선반도의 나라들과 일본은 중국의 동향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220년에 한나라가 멸망하고부터 약 4백년간 중국에서는 다수의 소국으로 나뉘거나 남북으로 갈려 싸우는 내란의 시대가 계속되어 주변 제국에 미치는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서 조선반도 북부의 고구려가 급속하게 강대해졌다. 고구려는 4세기초에 조선반도 안에 있던 중국 영토인 낙랑군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4세기말에는 반도 남부의 백제까지 공격하려고 했다.

 

백제는 야마토조정에 도움을 요청했다. 일본열도의 사람들은 본래 귀중한 철 자원을 찾아 반도 남부와 깊은 교류를 갖고 있었으므로, 야마토조정은 바다를 건너 조선에 출병했다. 이 때 야마토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가라)라는 지역에 거점을 구축했다고 생각된다.


야마토조정의 군대는 백제를 도와 고구려와 격렬하게 싸웠다. 고구려의 광개토왕(호태왕) 비문에는 그것이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켰지만, 임나를 거점으로 한 야마토조정과 백제 군대의 저항에 봉착하여 반도 남부의 정복은 달성할 수 없었다.

 

2. 조선반도와 일본
2-1. 일본의 독립과 조선반도
동아시아의 지도를 보자. 일본은 유라시아대륙에서 조금 떨어져 바다에 떠있는 섬나라다. 이 일본을 향해서 대륙에서부터 하나의 팔과 같이 조선반도가 돌출해 있다. 양국의 이와 같은 지리적 관계는 오랜 역사 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져 왔다.


고래로, 조선반도는 중국의 선진 문명을 일본에 전하는 통로였다. 그러나 조선반도 전체가 일본에 적대적인 대국의 지배 하에 들어가면 일본의 독립은 위태롭게 된다. 일본은 중국과 조선반도의 동향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본이 고대 율령국가를 형성한 것도 동아시아 속에서 자립하는 것을 지향했던 것이다.


2-2. 조선의 근대화를 도운 일본
러시아는 1891년에 시베리아철도의 건설에 착수하여, 그 위협은 바짝 다가왔다. 조선반도가 동방으로 영토를 계속 확대하고 있는 러시아의 지배 하에 들어가면 일본을 공격하는 아주 절호의 기지가 되어, 섬나라 일본은 자국의 방위가 곤란하게 된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의 개국 후, 조선의 근대화를 원조했다. 조선에서도 시찰단이 와서 메이지유신의 성과를 배우려고 했다. 조선이 타국에 침범을 당하지 않는 국가가 되는 것은 일본의 안전보장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했다.

 

3. 러일전쟁
세계를 바꾼 일본의 승리
일본해해전에 승리했을 때, 이미 일본은 외국으로부터 빌린 빚과 국채로 꾸려나가던, 국가 예산의 8년분에 해당하는 군사비를 모두 사용해 버렸다. 장기전이 되면 러시아와의 국력의 차가 나타나서 형세가 역전될 것임은 명백했다.

 

미국 대통령 테오도르 루즈벨트는 일본에 가장 유리한 시기를 골라서 일러 간의 강화를 중개했다.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의 결과, 1905(明治 38)년 9월 포츠머스조약이 맺어졌다.


일러전쟁은 일본의 사활을 건 전쟁이었다. 일본은 이것에 승리하여 자국의 안전보장을 확립했다. 근대국가로서 탄생한 지 얼마 안 되는 유색인종의 나라 일본이 당시 세계 최대의 육군 대국이었던 백인제국 러시아에 승리한 것은 식민지가 되어 있던 민족에게 독립에의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황색인종이 장래에 백색인종을 위협하는 것을 경계하는 黃禍論이 구미에 퍼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4. 한국합병
한국병합
한국병합 후에 설치된 조선총독부는 철도·관개 시설을 정비하는 등의 개발을 하고 토지조사를 개시하여 근대화에 노력했다. 그러나 이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그때까지의 경작지에서 쫓겨난 농민도 적지 않고, 또 일본어교육 등 동화정책이 추진되었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5. 국민동원
국민의 동원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의 전국이 악화하자 국내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노동력의 부족을 메우기 위한 징용이 행해지고, 또한 중학 3학년 이상의 생도·학생은 근로동원, 미혼여성은 여자정신대로서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또 대학생은 징병유예가 취소되어 출정(出征)해 나갔다(學徒出陣).


조선반도에서는 일중전쟁 개시후 일본식 성명(姓名)을 칭하는 것을 인정하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이 행해져 조선인을 일본인화(日本人化)하는 정책이 추진되고 있었다. 전쟁 말기에는 징병과 징용이 조선과 대만에도 적용되어 다수의 조선인이 일본의 광산 등에서 혹독한 조건 하에서 일하게 되었다.


물적으로도 모든 것이 부족하여 사원의 종(鐘) 등 금속이란 금속은 모두 전쟁을 위해 공출되고 생활물자는 극도로 궁핍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곤란 속에서 많은 국민은 잘 일하고 잘 싸웠다. 그것은 전쟁의 승리를 바라고 한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