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혜의 온기] 아직 아빠는 젊은데...
[최은혜의 온기] 아직 아빠는 젊은데...
  • 최은혜 기자
  • 승인 2020.02.10 11:02
  • 수정 2020.02.10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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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記 따뜻한 글. 언제나 따뜻한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 참여와혁신 최은혜 기자 ehchoi@laborplus.co.kr
ⓒ 참여와혁신 최은혜 기자 ehchoi@laborplus.co.kr

이번 명절에 아빠가 버스터미널로 데리러 왔다. 버스터미널에서 집에 가는 버스가 많지 않기에(두 시간에 한 대, 하루 일곱 대 있는 버스를 타야 집에 갈 수 있다) 고향에 갈 때면 아빠는 항상 나를 데리러 버스터미널로 나온다.

명절을 앞두고 몸이 좋지 않았던 나는 어김없이 아빠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아빠는 최근 지인이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전하며 “일이 먼저냐? 건강이 먼저지. 건강해야 일도 할 수 있는 거야”라는 걱정을 늘어놨다. 아빠의 잔소리 폭격에 지친 나는 아빠의 나이로 주제를 돌렸다. 아빠는 이제 정년이 2년 정도 남았다고 했다. 나는 “아빠는 언제 그렇게 나이를 먹었어?”라고 대꾸했다. 아빠는 “너 나이 먹는 건 생각 안 하냐?”고 반문했다. 갑자기 아빠가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짠해졌다.

‘정년을 앞둔 노동자’라는 말을 들으면 늙고 지친 모습이 떠오른다. 60세는 많은 나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어릴 때부터 ‘정년퇴직’이라는 단어에서 항상 연로한 모습을 연상해왔다. 그래서 머리는 하얗게 셌지만, 건강하고 괄괄한 아빠의 모습을 ‘정년을 앞둔 노동자’의 이미지와 매치하는 것은 어쩐지 이질적이다.

지난해 2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육체노동 가동연한을 60세에서 65세로 상향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냈다. “우리나라의 사회적, 경제적 구조와 생활여건이 급속하게 향상·발전하고 법제도가 정비·개선됨에 따라 기존 가동연한을 정한 판결 당시 경험칙의 기초가 됐던 제반 사정들이 현저히 변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 판결로 정년 연장 논의는 불이 붙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국정감사에서 “민간에서 60세 이상 정년연장을 논의했으면 좋겠지만, 시기상조라고 해서 계속고용에 대해 재정 인센티브를 주는 방안을 내년 예산안에 반영했다”며 “정년 연장은 단시간에 되는 것은 아니지만, 고령화 진행속도가 빨라서 사회적 논의에 착수할 필요는 있지 않나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언젠가 tvN의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봤다. 어느 회사의 고문으로 있다는 ‘자기님(해당 프로그램에서는 만나는 시민을 ‘자기님’이라고 부른다)’은 정년퇴직을 한지 2년 정도 지났다고 했다. 그는 정년을 맞았지만 그냥 쉬기에 아쉬웠다고 했다. 몇몇 회사의 경우, 정년을 맞은 노동자에게 1년의 촉탁직을 맡을 수 있도록 해 정년을 연장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사회에서 정년 연장은 늘 청년 실업과 맞물려 있어 논의하기 어려운 주제다. 취업준비생이던 지난해 2월, 논작스터디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육체노동 가동연한 상향 판결을 주제로 작문을 한 적이 있다. 당시의 나는 ‘육체노동 가동연한이 올랐으니 정년 연장을 논의할 시점이다’는 내용으로 글을 작성했다. 다른 스터디원은 ‘정년 연장이 청년 일자리 창출을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고 했다. 5명의 스터디원이 3:2로 갈려 정년 연장과 청년 일자리 창출 사이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던 기억이 난다.

명절 연휴,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는 아빠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정년을 하고 집에서 쉬기에 아빠는 너무 젊어보였다. 이제 아빠는 제2의 인생을 설계해야 할 시기다. 정년 이후의 삶을 어느 정도 준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딸의 입장에서, 아빠가 조금 더 일터에 머물러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