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어떻게 살아왔나
그들은 어떻게 살아왔나
  • 강은영 기자
  • 승인 2020.03.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대별로 살펴보는 여성노동자의 삶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커버스토리 ➀ 여성노동자 삶, 돌아보기

여성노동자, 지금 어디쯤 왔나

대한민국은 300년을 30년으로 압축한 고도성장으로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압축성장의 이면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 가부장적인 사고방식 아래, 여성노동자는 성희롱·임금차별·대량해고의 1순위가 됐다. 차별의 대상이었던 여성노동자들은 누군가의 딸도, 엄마도 아닌 ‘온전한 주체’로 존재하기 위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어왔다. 1960년대 산업화의 시작과 함께, 여성노동자들이 걸어왔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그리고 여성노동자는 현재 어디쯤 와있는지 되물어본다.

세상에는 수많은 차별이 존재한다. 인종, 지역, 나이, 성별, 장애의 유무, 빈부, 직업 등. 살아가다보면 한 번쯤 차별로 인해 피해를 받아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다양한 차별 중 성별에 따른 차별은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해왔다. 인구의 절반이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해왔다.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시장 내 존재하는 차별에 맞서 싸워왔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삶은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봤다.

그 때는 그랬지

#1970년대

■ 1975년 4월 16일 수 맑음

나는 이 회사에 근무할 자격이 없는 무능력자일까. 왜 이리도 일을 못하는지 정말 내 자신이 미워 죽겠다. 조장 언니에게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발바닥은 아프고 하는 일은 잘 안되고 미칠 것 같다. 여덟 시간 동안을 그 시끄러운 공장 안을 헤맬 때 내 머리 속엔 온갖 생각이 다 든다. 빨리 돈을 벌어 시집을 가야겠다는 생각이며 이렇게 애써서 번 돈을 한 푼이라도 헛되이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 나의 머리는 너무도 너무도 많은 생각들로 복잡해진다.

■ 1975년 8월 13일 수 맑음

차에서 내리자 옛날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산과 들이 하얀 원피스의 나를 반기는 듯싶다. 우선 홍자네 집에 들렸다가 우리 집으로 갔다. 미현이가 먼저 뛰어가 「할머니」하고 부르자 정순 언니가 맨발로 뛰어나왔다. 엄마는 샘에서 빨래를 하고 계시다가 달려 나오시고 아버지께서는 웃으시며 우셨다. 아버지께서는 술에 취해서 이말 저말 하셨다. ‘제 버릇 개주랴’는 속담같이 옛날 그대로였다. 어쨌든 모두 반가왔다.

저녁에 엄마와 언니와 함께 고추밭에서 풀을 뽑았다.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오빠가 올 가을에 대수술을 해야 된다고 한다. 모든 게 무너지는 듯한 소식이다. 정숙이 학교 갈 생각은 아예 집어치우고 우리는 열심히 돈 벌어서 집에나 보내야 된다고 한다. 정말 야속히도 운이 없는 우리들이구나.

원풍모방 여성노동자, 석정남, 《대화》지에 연재 일기 <불타는 눈물>을 실음. 그 중 일부

#1980년대

■ 1975년 4월 16일 수 맑음

노동조합은 존재했으나 여성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노동조합은 말이 노동조합이지 여자들의 문제에 있어서는 사용자하고 똑같았다. 오히려 노동조합 간부들조차 “사회적 신분이 청소원으로 들어갔으면 청소원이고, 서무원으로 들어갔으면 서무원인 것처럼 ‘여행원’으로 들어갔으면 마땅히 여행원으로 있는 것이지 그걸 알고 들어왔으면서 시정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고 하면서 오히려 적반하장이었다.

유연숙, <여행원제 폐지를 위한 노동운동의 전개와 그 귀결> 중

결혼 후 은행 근무도 어려움이 많았다. 구로동분회의 김경순 조합원은 은행장에게 다음과 같은 고충을 털어놓기도 했다.

“기혼 여직원들의 발령지 인사 이동관계로 말이 많습니다. 은행이라는 곳이 여자들을 특수하게 보는 곳이기도 하지만 특히 결혼한 여직원에 대해서 암암리에 압력이 가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맞벌이시대이고 결혼하고도 직장을 가지고 있기를 원하는 여직원들이 많은데 행장님께서는 기혼 여직원들의 은행원이라는 직업에 대해 앞으로의 전망이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이에 대해 은행장은 “기혼여직원에 대해 조그만 편견도 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주지점이나 인천지점에서 모범적인 기혼여직원을 본 적이 있어요. 기혼여직원은 하나의 가정을 가지고 남성을 보필하고 남성을 알기 때문에 직장에서도 어떤 면에서는 미혼 여성보다 원숙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700명이나 되는 기혼여성 가운데 왕왕 한두 사람 때문에 기혼여직원 전부 다 그렇다는 식으로 지목을 받는데 그렇기 때문에 기혼여직원은 선배적인 입장에서 결혼했기 때문에 안 한 여직원보다 더 모범적으로 해주어야 된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조흥노보> 中 조흥은행 여행원, 은행장과의 대화

#2000년대

■ 2002년 12월 2일

교섭의 진척을 위해 본사 앞 집회를 하였다. 8월의 첫 집회 이후 두 번째의 대규모 집회였다. 100여 명 정도가 모여 추운 겨울 길바닥에서 차가운 도시락을 먹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을 하고 있는데 큰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대학입학 원서를 접수해야 하는데 어느 대학에 넣어야 하지?” 전화로 물어왔다. 나는 집회와 행진을 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알아서 해” 하고 끊었다.

■ 2004년 9월 8일 임금협상 조인식 후

노사 간의 사무적인 일을 마치고 회사의 제안으로 추석연휴를 보낸 후 현장에 복귀하였다. 유통업체에서 추석은 1년 중 최대 매출을 올리는 대목이다. 중계 직원들은 나에게 독이 올라 있었다. “뻔히 바쁜 것을 알면서 일부러 들어오지 않았다”고 난리들이었다. 직원들은 모두 짜고 나를 왕따로 만들었다. 모두들 비조합원으로 조합원 한 명 때문에 자기들이 명절에 장사하느라고 힘들었다는 것만 강조하고 있었다. 파업 기간에 들어온 ‘비정규직 알바’들은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나에게 “미안하다”고만 하였다. 나는 직원들에게 “작업장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이경옥, 윤옥주, 이매순, 김소연, 석명옥, <나, 여성노동자 2>, ‘착한 딸’ ‘현모양처’, 현장에서 일어서다 中 일부

짧게는 20년, 길게는 50년 전의 여성노동자의 삶은 크게 바뀐 듯하면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한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성노동자들은 여전히 차별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이제는 ‘차별’을 해소하자는 선언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차별이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살펴보고, 근본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