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찬값 벌기 위해 나오지 않았습니다
반찬값 벌기 위해 나오지 않았습니다
  • 강은영 기자
  • 승인 2020.03.04 00:00
  • 수정 2020.03.04 19: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0년대, 다수를 이룬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의 가치를 부정당하다

 커버스토리 ④ IMF 이후 여성노동자의 삶

커버스토리 여성노동자, 지금 어디쯤 왔나

대한민국은 300년을 30년으로 압축한 고도성장으로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압축성장의 이면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 가부장적인 사고방식 아래, 여성노동자는 성희롱·임금차별·대량해고의 1순위가 됐다. 차별의 대상이었던 여성노동자들은 누군가의 딸도, 엄마도 아닌 ‘온전한 주체’로 존재하기 위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어왔다. 1960년대 산업화의 시작과 함께, 여성노동자들이 걸어왔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그리고 여성노동자는 현재 어디쯤 와있는지 되물어본다.

ⓒ 참여와혁신DB

1997년 한국을 강타한 IMF 경제위기로 인해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안정적인 일자리에서 원치 않게 쫓겨나야 했다. 가정의 생계를 이어가야 했던 남성들은 간신히 자리를 지키기도 했지만, 여성들은 생계를 책임져야 할 부담이 적다는 이유로 구조조정의 희생자가 됐다. 일자리를 잃은 여성들이 생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다시 노동시장에 진입할 때 그들의 선택지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비정규직’. 2000년대 여성노동자들을 대표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이들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에 묻혀 노동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비정규직’으로 노동시장에 들어서다

한국 경제를 거세게 흔들었던 IMF 경제위기는 남녀 할 것 없이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의 명예롭지 못한 구조조정을 겪었다. 그 피해는 여성들에게 더욱 크게 다가왔다. 통계청 자료를 살펴보면 1996년 66.2%였던 남성노동자 상용직 비율은 2000년 58.9%로 하락했다. 같은 기간 동안 여성노동자 상용직 비율은 1996년 40.7%에서 2000년 29.8%로 크게 떨어졌다. 여성은 가정생계를 책임질 남성을 위해 양보하라는 명분 아닌 명분으로 인해 구조조정 일순위로 내몰려야만 했다.

상용직 비율이 떨어진 만큼 실업률은 큰 폭으로 상승했다. IMF 위기가 나타나기 전 1997년 4월 5.4%였던 여성 실업률은 1998년 5월 1년 만에 11.6%로 두 배 넘게 뛰었다.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진행된 ‘노동시장의 유연화’ 정책으로 인해 비정규직들이 대거 양산되기 시작했다.

확산된 비정규직 일자리 중 대다수는 여성들의 몫이었다. 경제위기가 잠잠해진 뒤 생계유지를 위해 다시 노동시장에 진입을 시도한 여성들은 40대가 넘는 중장년들이었다. IMF를 거치면서 안정된 일자리는 제한적이었고, 저임금-저숙련-저기능을 원하는 기업들이 많아지면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여성은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2002년 여성노동자 4명 중 3명(73.3%)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나타났다.

여성노동자들은 저기능-저숙련-저임금을 필요로 하는 특수고용(개인도급+재택), 간접고용(호출+파견+용역), 시간제(사용파트타임+임시파트타임), 임시직(일반임시직+기간제 임시직) 등의 비정규직이 많았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부당한 처우를 겪었지만 이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은 찾기 어려웠다. 당시 노동조합은 정규직들 중심으로 구성돼 있었기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가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노동계에서는 소외된 여성노동자를 위한 움직임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1999년 8월, 전국 400여 명의 여성노동자들이 모여 비정규직 문제 해결과 영세사업장 여성노동자 권익 향상을 위해 ‘전국여성노동조합’을 설립했다.

2000년대, 여성노동자들의 다양한 투쟁이 존재했다. 그 중 영화 ‘카트’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마트노동자의 삶, 그리고 이제는 ‘노동’으로 인정하고 있는 어둠 속에 숨어 있었던 청소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정규직’ 시켜주겠다

희망고문당한 마트노동자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대형유통마트가 한국에 처음 등장한 건 1993년 이마트다. 그 동안 한국시장에 발을 들였던 많은 외국 기업들이 있었다. 희미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름인 ‘까르푸’는 영화 ‘카트’와 드라마 ‘송곳’의 배경이 됐던 곳이다.

대형유통마트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대부분은 40대를 넘긴 중장년 여성들이었다. 마트에서 일하는 30여 명의 직원들 중 7명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었다.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르는 비정규직들에게도 실낱같은 희망이 존재했다. 1년간 열심히 일 하면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겠다는 채용담당자의 말 한마디였다.

이경옥 전 서비스연맹 사무처장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동료들 중 생계형 가장들이 제법 있었다”며 “승진이나 승급에서 차별 받을까 두려워 사정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마트노동자로 일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임금이었다. 2000년 당시 최저시급 1,600원을 기준으로 50만 원 정도의 기본급을 받아야 했다. 임금테이블도 가장 최하층에 위치해 있었다. 반면, 20대 남성 정규직들은 결혼해 가정을 책임져야 하기에 많이 받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비정규직이었던 이들은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겠다는 희망고문을 더 이상 참기 힘들었다. 시간이 흘러도 임금은 적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트노동자 투쟁 당시 사진. ⓒ 이경옥 전 서비스연맹 사무처장

열심히 일했음에도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시켜주지 않고, 저임금으로 장시간노동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2001년 노동조합을 통해 무언가를 바꿔보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노조가 만들어지고 다음 해인 2002년 회사에 임금과 단체협약을 체결하기 위한 교섭을 요청했지만, 요리조리 피해 다닐 뿐이었다. 이경옥 전 서비스연맹 사무처장은 “노동조합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단체협약을 체결하기 위한 투쟁을 진행했다”며 “4개 지점에서 조끼를 입고 사복투쟁을 했지만, 관리자들의 방해로 장기간 진행하기 어려웠다”고 설명했다.

2002년 겨울, 마트 내부의 투쟁만으로 문제 해결이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노동자들은 외부에 부당함을 알리고 연대투쟁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마트노동자들은 학생들과 연대하고, 전국의 매장을 돌아다니며 처우 개선을 외치는 매장진격투쟁을 진행했다. 이경옥 전 서비스연맹 사무처장은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과 한국인 정서에 맞는 매장 운영, 임금 인상 등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이경옥 전 서비스연맹 사무처장을 비롯한 소수의 마트노동자들은 300일이라는 장기간 파업을 통해 2003년 4월, 마침내 최초의 단체협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대다수 프랑스인으로 구성돼 있던 관리자들이 한국인으로 교체됐고, 식대 지원과 야간 교통비 지원 등의 쾌거를 이룰 수 있었다.

2006년 까르푸 자본이 한국에서 철수하고 이랜드에 인수되면서 ‘홈에버’로 이름을 바꿨다. 하지만, 마트노동자들의 투쟁은 계속됐다. 마트노동자 중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비정규직의 처우 개선을 몇 년간 요구하며 투쟁한 결과 2008년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이라는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마트 여성노동자들의 비정규직 문제는 현재 진행 중이다. 이경옥 전 서비스연맹 사무처장은 “현재는 새로운 직종들이 생겨나면서 오히려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들이 많이 생겼다”며 “2008년 투쟁을 통해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을 이뤄냈지만 지금은 간접고용이 확대돼 다양한 비정규직들이 생겨나 오히려 안타까움을 느낀다”고 답했다.

손주 간식 값 벌러 왔다니요?

2000년대 대표적인 여성노동자 투쟁 중 하나는 ‘청소노동자’다. 청소노동자들의 투쟁과 삶을 다룬 영화 ‘빵과 장미’를 보면 “이 빌딩에서 우리는 투명 인간과 같아”라는 대사만 봐도 청소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에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여성노조가 출범한 후 첫 번째로 한 활동은 ‘비정규직 권리 찾기 운동’이었다. 여성노동자 중 3분의 2가 비정규직이었으나, 이들의 노동환경은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이었다. 여성노조의 문을 처음 두드린 것은 청소노동자였다. 대부분이 50대 후반에서 60대에 이르는 중장년 여성이었다.

해고 문제로 처음 상담을 신청했던 청소노동자의 상황을 들어본 나지현 여성노조 위원장은 “경악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고 표현했다. 고강도의 노동이 어려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봉투나 청소 도구를 반복해서 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밀걸레나 빗자루를 쓰는 등의 반복 동작으로 인해서 손목과 어깨 통증을 안고 살아야 했다.

나지현 위원장은 “청소노동자와 여러 가지 상담을 하면서 이들의 임금이 최저임금으로 정해졌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당시 최저임금이 굉장히 낮았는데 그것만 받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설명했다.

여성노조는 상담을 받은 뒤 여성 청소노동자를 대상으로 임금실태조사를 진행했다. 2002년 최저시급은 2,100원이었다. 여성노조가 진행한 당시 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청소노동자들의 임금은 월 평균 49만 6,234원이었고, 60만 원 미만을 받는 경우가 87.8%에 달했다.

낮은 임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용역회사를 찾아갔을 때 여성노조에게 돌아온 답변은 “손주들 간식 값 벌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한테 이 정도면 됐지”였다. 나지현 위원장은 “청소 일을 하는 분들 중에 경제활동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는 분들도 있었다”며 “당시 받은 돈으로 가계부를 공개하기도 했는데 돈이 없어 빚을 내기도 어려울 정도로 참담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청소노동자들의 투쟁하는 모습. ⓒ 여성노조

청소노동자들의 열악한 임금 실태를 알리기 위한 특별한 활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일명 ‘영희 씨의 점심식사’, 최저임금을 받으며 생활하는 영희 씨의 점심식사를 직접 체험해보는 것이다. 그가 받는 월급 60만 6,000원에서 하루에 먹을 수 있는 그의 점식식사 비용은 944.4원뿐이다. 콩나물이 거의 보이지도 않는 국과 콩나물무침 조금, 김치 5~6조각, 김구이 6조각 등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실상이 드러난 것이다.

청소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다. 나지현 위원장은 “이들은 살아가면서 노동조합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다”며 “그동안 많은 학생회들이 청소노동자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변하지 않은 상황을 목격해왔다. 변하지 않을 거란 패배의식이 있어 설득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노동조합의 문을 두드린 건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절박한 상황 때문이었다.

청결을 관리하기 위해 일하고 있는 노동자임에도 이들의 임금은 인건비에 포함되지 않았다. 사업비 속 ‘파견·용역비’에 청소 노동자의 임금이 포함돼 있어 제대로 된 노동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여성노조를 비롯한 여성단체들은 청소노동자들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기 위해 최저임금위원회 앞에서 시위하고, 항의하면서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또한, 청소노동자들의 임금이 더 이상 ‘파견·용역비’ 속에 책정되지 않도록 요구했다.

나지현 위원장은 “최저임금 인상 운동을 하면서 5년 동안 두 배 가까이 임금을 올렸다”면서도 “당시에도 임금이 너무 낮았기 때문에 여건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청소노동자들의 임금이 조금은 올랐다고 하지만, 2020년인 지금도 최소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저임금 상승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미니 인터뷰] 함께 할 때, 더 강해진다

이경옥 전 전국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 사무처장

ⓒ 이경옥 서비스연맹 전 사무처장

마트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남편과 사별 후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노동시장에 나온 나이가 40대 초반이었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이제는 내 나이에 취업하기도 힘들다는 생각에 좌절감에 빠져 있었다. 그러던 중 마트 채용 공고를 발견하고 음식점 경력과 조리 자격증 등을 넣은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렇게 ‘까르푸’에서 일하게 됐다.

당시에는 대형마트가 활성화되지 않았는데, 사회적인 분위기가 어떠했나?

고객들도 재래시장이 익숙했기 때문에 박리다매로 상품을 판매하는 대형마트를 낯설어 했다. 노동자들은 후방에서 물건을 진열하고 음식을 준비하다 보니, 고객들은 매장에서 직원들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고객 중에는 서비스를 요구하기 위해 “직원 나와라!”고 소리를 치거나 말도 안 되는 컴플레인을 거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함께 일했던 분들은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파업을 할 때 노동조합을 믿어달라며 설득하기도 했지만, 동료들이 “일이 너무 힘들어서 오래 안 다닐 거야”라는 말로 함께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 중 대부분이 무사히 정년을 맞았다. 40~50대 중장년 여성들이 일할 수 있는 곳도 없고, 단체협약을 체결하면서 장기근속자들에게 포상도 나오니 오랫동안 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최근까지도 서비스연맹 사무처장으로 활동했는데, 현재 여성노동자의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기본적으로 저임금 문제가 심각하다. 입사할 때부터 문제가 시작되는데, 남성은 나중에 가장이 될 거라는 이유로 호봉이 빨리 올라간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엔 호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쉽지도 않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남성의 임금은 높고, 여성의 임금은 낮은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여성노동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이 모여서 계속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9년에 민주노총 여성 활동가 대회를 진행했는데, 정말 재밌었다. 각 산별 여성 활동가가 모여 토론하고 이야기를 나누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여성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