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잔다르크’를 좋아합니다
저는 ‘잔다르크’를 좋아합니다
  • 임동우 기자
  • 승인 2020.03.04 00:00
  • 수정 2020.03.04 0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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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남성 편 가르기 이전에 ‘인간’으로 바라봐야
오복환 민주노총 금속노조 대한솔루션지회 교선부장

커버스토리 ⑥ 인터뷰_오복환 민주노총 금속노조 대한솔루션지회 교선부장

커버스토리 여성노동자, 지금 어디쯤 왔나

대한민국은 300년을 30년으로 압축한 고도성장으로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압축성장의 이면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 가부장적인 사고방식 아래, 여성노동자는 성희롱·임금차별·대량해고의 1순위가 됐다. 차별의 대상이었던 여성노동자들은 누군가의 딸도, 엄마도 아닌 ‘온전한 주체’로 존재하기 위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어왔다. 1960년대 산업화의 시작과 함께, 여성노동자들이 걸어왔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그리고 여성노동자는 현재 어디쯤 와있는지 되물어본다.

ⓒ 참여와혁신 임동우 기자 dwlim@laborplus.co.kr
ⓒ 참여와혁신 임동우 기자 dwlim@laborplus.co.kr

1999년 12월 4일, 안산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오복환 교선부장은 남편과의 갑작스런 사별 후 형제들이 사는 당진으로 내려왔다. 가장이 돼버린 그, 안산에서 하던 일을 구하려고 하니 나이에서 제약이 있었고, 결국 그가 당진에서 처음 시작했던 곳은 플라스틱 용기를 만드는 제조업 공장이었다. 오복환 교선부장은 주·야간을 가득 채워 일했지만 한 달 70만 원 남짓 받는 게 현실이었다. 그렇게 첫 공장생활을 3년 3개월로 마무리하고 새로 튼 둥지가 ‘대한솔루션’이었다. 2003년 3월 27일, 자동차 부자재 등을 생산하는 이곳에서 새롭게 일을 시작하게 된 그가 노동조합에서 활동하게 된 건 불과 7개월 뒤인 11월 3일이었다. 평소에 직원들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던 총괄반장이 정직당한 게 계기였다.

자동차 부품업체인 대한솔루션에 노동조합이 생긴 건 2003년 11월 3일에 총괄반장이 정직당하면서다. 노조설립 당시 현장 노동자 중 8명을 제외한 99명이 가입했다. 그렇게 결성된 대한솔루션지회는 민주노총 화섬노조 소속으로 출발했다. 이후 계속된 사측의 노동조합 활동 방해는 물론 당시 화섬노조 위원장과 사측의 합의 등으로 조합원 수가 40명으로 줄었다. 당시 지회장은 조합 소속을 금속노조로 옮겼음에도 사측의 회유가 지속되자 조합원 26명과 함께 사무동 앞 천막투쟁에 돌입했고, 그해 11월 인천 본사로 올라가 한 달간의 천막투쟁을 이어가면서 사측과의 합의를 달성하게 된다.

지회장직도 맡았던 걸로 알고 있다.

천막투쟁하고 내려왔는데도 사측이 회유·협박을 했다. 교선부장이랑 여성부장이랑 해서 몇 명이 2달 반 동안 자리를 지키면서, 총 8명의 조합원이 남았다. 당시 지회장이 연락도 잘 안 되는 상황에서 지회장을 맡게 됐다. 타임오프가 있었는데 300시간밖에 안 되는 열악한 상황이었고, 회의시간 등으로 그 시간을 쓰고 나면 부족해서, 집회를 해야 하는 경우는 연차를 쓰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던 와중에 해고까지 당하게 되니까 4개월 동안 해고투쟁에 들어갔다. 본사 앞과 회장 집 앞에서 피케팅 시위를 하고, 법적으로 승소하면서 7월 1일 복직했다. 그게 어떤 마음에서인지는 몰라도 오기는 아니었고, 그냥 그게 옳다고 생각했다.

제조업분야 여성노동자로서 어떤 점에서 차별을 느끼나?

여성노동자들이 손해를 보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남성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힘쓰는 일을 많이 한다. 여성노동자들이 힘쓰는 일을 덜 하는 건 맞다. 그런데 남성노동자가 여성보다 섬세한 걸 할 수 있는지 한 번 생각해봐야 한다. 각자 잘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 여성노동자가 조금 더 섬세한 일을 하는데, ‘섬세수당’을 주느냐? 그건 또 아니다. 여성노동자가 하는 걸 남성노동자보고 하라고 하면 수량이 안 나와서 못한다. 우리가 한 타임에 120개를 포장하면 남성들은 반도 못한다. 서로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인 거다. 임금 같은 경우 경력 5년 된 남성노동자 임금하고, 14년차인 제 임금이 똑같다. 이런 건 부당하다.

여성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여성, 남성 이렇게 편을 가르는 게 아니라, 다 같이 일하면서 먼저 ‘한 사람’, ‘한 인간’으로 봐야 한다. 현장에서도 그렇고, 예를 들어 남성들이 무거운 물건 옮길 때 ‘비켜! 비켜!’ 그러는데, ‘비켜! 비켜!’ 하지 말고 ‘같이’ 해야 한다. 돕는 게 아니라, 같은 동료로서 여성, 남성 할 거 없이 할 수 있는 건 같이 하는 거다. ‘내가 너를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보호하는 것도 아니고, 함께 같이 한다’ 이런 생각이 필요하다. 여성들도 힘이 없어서 못한다는 핑계로 남성들이 해주길 바라고 그런 건 아니라고 본다. 어디 가서는 여자라 보호받고 싶다고 하고, 어디 가서는 여자라서 차별한다고 주장하는 건 어폐가 있다고 생각한다. 각자 인식을 달리 해볼 필요가 있다.

노동조합 활동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인천 본사 올라가서 천막 쳤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공원화장실이 있었는데, 거기서 찬물로 씻었던 기억이 있다. 밥도 지어 먹었다. 김치에 돼지고기 넣고 보글보글 끓여서 같이 먹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는데, 뭐 여하튼 신나게 했던 거 같다. 재밌게 해서 좋았던 순간이다.

후배 여성노동자들에게 한 마디 한다면?

평민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잔다르크는 백년전쟁을 끝내고 샤를 7세를 왕위에 올리면서 프랑스를 구원했다. 19세 꽃다운 나이에 안타깝게 화형을 당한 건 비극적이지만, 그런 잔다르크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 시대에도 여성들이 그렇게 했는데, 지금이라고 못할 게 어디 있나? 여성노동자들이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