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타이부대’도 차별이다
‘넥타이부대’도 차별이다
  • 임동우 기자
  • 승인 2020.03.04 00:00
  • 수정 2020.03.17 1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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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이후에도 직장 민주화는 오지 않았다
금융권 여성노동자를 돌아보다

커버스토리 ③ 87년 이후 금융권 여성노동자는

여성노동자, 지금 어디쯤 왔나

대한민국은 300년을 30년으로 압축한 고도성장으로 불과 반세기만에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압축성장의 이면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있었다. 가부장적인 사고방식 아래, 여성노동자는 성희롱·임금차별·대량해고의 1순위가 됐다. 차별의 대상이었던 여성노동자들은 누군가의 딸도, 엄마도 아닌 ‘온전한 주체’로 존재하기 위해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어왔다. 1960년대 산업화의 시작과 함께, 여성노동자들이 걸어왔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그리고 여성노동자는 현재 어디쯤 와있는지 되물어본다.

ⓒ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

1987년 6월, 전두환 군부를 몰아내기 위한 민주항쟁의 물결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노동자와 학생들은 항쟁의 주축이 되었고, 군부 정권을 몰아내고자 하는 목소리가 정점에 다다랐던 시기였다.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을 활용한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 시위대에 합류하여 힘을 보탰다. 당시 이 모습을 본 한 기자는 이들을 ‘넥타이부대’로 지칭했다. 이후 ‘넥타이부대’라는 말은 민주화를 위해 힘쓴 당시 3050 화이트칼라 노동자를 대표하는 말로 쓰이게 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지난 1월 16일 사무금융노조는 ‘넥타이부대’라는 남성형 표현이 여성까지 대표하는 성차별적 관용 표현이라며 이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문제제기했다.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역사의 현장에서 함께한 ‘여성’은 배제돼 있었다.

여성노동자, 직장 민주화를 외치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1970~1980년대에 어려웠던 노동조합 설립이 활성화되면서 조직 확대가 이뤄졌다. 1975년 15.8%였던 여성노동자 조직률은 노동자대투쟁 이후 1989년 18.6%를 기록했다. 당시 여성노동운동의 도드라진 특징은 사무직·판매직·서비스직 여성노동자들이 주력이 되어 참여했다는 점이다.

197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경공업 중심의 산업이 중화학공업 위주로 바뀌는 시기였고, 그 자리를 남성들이 차지하면서 성별 임금 격차는 더욱 고조되었다. 금융권 여성노동자들의 경우 결혼을 하면 퇴직해야 한다는 ‘결혼퇴직각서’를 쓰고 입사해야 했으며, ‘여행원’이라는 직군 분리로 인한 차별 대우가 일상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을 자각하게 된 여성노동자들은 성차별로부터 기인한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책상 닦기 거부, 유니폼 거부운동 등으로 대항했고, 각종 제도개선 투쟁을 이어가야만 했다.

1980년대는 많은 사무직 노동조합의 선거가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뀌는 시기였고, 이로 인해 노동조합이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였다. 그럼에도 당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사용자와 다를 바 없었다”고 회고한다. 노동조합에 기대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 여성노동자들은 고객들 중 법학이나 노동법에 대해 잘 아는 교수 등의 조언을 받아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위한 법적투쟁에 돌입하면서 당시 사무직 여성 임금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고양시킨다. 여성노동자들은 1985년 출산휴직제 도입과 1987년 이후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및 시행으로 자신들의 가뭄 같은 현실에 단비가 내릴 것을 예상했으나, 사용자의 우회적이고 미온적인 차별해소 방침에 다시 좌절해야만 했다.

열악하고 서글픈 현실 속에서도 여성노동자들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시민단체와 연대를 형성하는 등 중심에서 투쟁을 이끌며 조금씩 나아갔다.

‘여행원’이라는 주홍글씨

조흥은행노동조합 최초 상임여성부장으로 활동했던 이한순 씨는 1963년 고등학교 졸업 이후 이화여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67년 졸업 이후 자기 앞가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조흥은행 입행을 결정했다.

“우리 때 이화여대에서 가장 좋은 과가 어딘 줄 알아요? 가정과에요. 졸업하고 시집 잘 갈 수 있으니까. 뭐, 노동의식이 있어서 취업을 하고 그런 게 아니었다니까. 사은회를 하잖아요? 그때 좋은 소식 나누는 시간에 ‘나 약혼해’, ‘나 결혼해’ 이 말이 좋은 소식 나누기에 포함돼 있었어요.”

입행 이후 그가 조흥은행노동조합 여성부장을 맡게 된 건 경조사에서 보이는 성차별 때문이었다. 남편이 전사해 원호대상자로 입행한 여행원이 집안의 가장인 입장에서 시아버지 상을 당했는데 기존 상주와 같은 15일 휴가 지침과 달리 일찍 복귀하게 된 것이 계기였다. 그는 “남편이 상을 당했으면, 상주에 버금가게 휴가를 줘야 하지 않겠냐”며 노동조합 여성부장에게 이 사실을 전했고, 이때 눈여겨본 당시 여성부장이 그를 차기 여성부장으로 추천했다.

이한순 씨는 여성부장을 하면서, 임금 및 단체협약 협상 내용에 성별 구분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여행원’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사부터 ‘일반직’과 분리해 임금·인사 등에서 각종 차별 대우를 받았고, 근속년수가 길어질수록 임금격차가 심화됐다. 남성행원 대비 여행원의 임금은 입행 시 84%, 근속 11년에는 63.8%, 근속 21년에 54.5%로 갈수록 격차가 커졌다.

여행원의 승격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한순 씨는 “여행원이 일 잘하면 그 부서에 말뚝 박는 것, 일 못하면 축구공”이었다며, 승격에 제한이 있었음을 회고했다. 당시 입사한 남성행원들은 5급부터 시작했으나, 여성행원들은 5급 말단호봉에 이르면 더 이상 진급이 어려웠다. 이한순 씨는 “7급 견습, 6급 여행원, 5급 일반 행원, 4급이 대리였는데, 어느 순간 여행원들이 5급으로 진급하는 연한이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노동조합에서 예산을 맞출 때도 우선적으로 예산이 줄어드는 것은 여행원에 대한 처우였다”고 밝혔다.

“결혼을 하면 은행에서 축의금을 주는 복지제도가 있었어요. 근데 이게 남자가 결혼하면 5만 원, 자녀가 결혼하면 3만 원, 여행원이 결혼하면 2만 원으로 되어있는 거예요. 이게 결국 직원 복지인데, 자녀 결혼 축의금보다도 여직원 결혼 축의금이 더 적은 걸 물었더니 ‘여직원은 결혼하면 그만 두니까 이미 여자는 직원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하더라고요.”

1976년 10월 노동청이 각 은행에 결혼퇴직각서 제도를 철폐하라고 시달했으나, 여행원들이 결혼 이후 퇴직 절차를 밟는 건 1980년대 중반까지도 당연시 됐다. 은행은 원거리 인사발령을 내는 등의 방법으로 퇴직하지 않는 여행원들을 괴롭혔다. 이한순 씨는 “한 여행원이 정식으로 결혼으로 인한 휴가원을 쓰니, 은행이 발칵 뒤집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87년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의 힘은 세졌지만, 노동조합이 여성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건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들어 ‘여행원제 철폐’를 위한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92년 결국 성과를 일궈냈지만, ‘여행원제 철폐’가 한국 노동시장 성차별의 완전한 해소로 이어지진 못했다. 여행원제 폐지 이후 은행들은 고용과 해고가 쉬운 ‘비정규직’을 늘리면서 또 다른 차별을 낳았다.

‘제2금융권’을 돌아보다

1990년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던 직장은 은행업, 증권업 등의 금융권 직장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추천서를 통해, 학교와 회사가 연계되어 학생을 차출해가는 방식으로 직장을 구했다.

제2금융권에서도 여성 차별은 동일하게 존재했다. 한화손해보험의 경우 대리·과장 등으로 승진이 가능한 ‘일반직’과 ‘지원직’이 분리되어 있었다. ‘일반직’은 남성 대졸 학력자를 우선적으로 채용했고, ‘지원직’의 90% 이상이 여성으로 구성되어 승진에 제한이 있었으며, ‘지원직’에서 ‘일반직’으로의 전환은 불가능했다. 갓 들어온 대졸신입사원의 경우 바로 대리나 과장을 다는 경우가 많은 반면, 여성들은 20년 넘게 일하고도 대리조차 못 달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한화손해보험에 1994년 입사하여 현재까지 일하고 있는 정광원 사무금융노조 여성위원장도 10년째 대리직에 머물고 있다. 그는 과거 여성조합원의 불합리를 노동조합에 건의하면서 간부 제의를 받았다. 손해보험업에 많은 여성들이 종사함에도 불구하고 급여수준 등이 남성 직원에 비해 턱없이 적다 보니, 이러한 여성조합원들의 현실을 지속적으로 대변하고자 했던 것이 그 계기였다. 임금 차별 이외에도 직군 차별이 직장 내 잦은 성희롱을 만들기도 했다.

“대부분의 업무를 여성들이 했어요. 설계사도 여성들이었는데, 관리자는 남성인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회식하면 관리자 옆에 어린 여성 위주로 자리배치를 한다거나, 술잔을 따르라고 한다거나, 러브샷을 해준다거나, 같이 노래방 가서 블루스를 춰준다거나 하는 등 일이 많았죠. 그때는 대기업에 입사했음에도, 여성이 보험회사 다닌다고 하면 저속하게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있었어요.”

금융권의 경우 다수의 여성 직원들이 창구에 배치됐다. 민원인 중에는 욕설을 하거나 서류를 얼굴에 집어던지는 이들도 있었으며,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 CCTV를 설치하거나 창구에 신입 남성 직원을 배치하는 방법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당시 정광원 여성위원장은 관리부서의 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 오라고 해’라고 말하는 민원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출산을 앞둔 여성노동자들의 상황은 더욱 서글펐다. 정광원 여성위원장은 스트레스와 건강악화로 조산기가 있는 상황에서도, 금요일까지 일하고 토요일 아침에 출산한 경험이 있다. 그가 출산 당시에도 가장 고민했던 건 경력단절이었고, 이러한 연유로 출산 이후 90일만 쉬고 곧바로 회사에 복귀했다. 그는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주니까 그나마 다행이었지,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는 여성조합원들을 보면 안쓰럽다”고 말했다.

“87년 민주항쟁 때도 항상 여성노동자들이 함께 했어요. 근데 역사는 남성노동자 위주로 말합니다. 이를테면 ‘넥타이부대’라는 말도 그래요. 여성들이 함께 투쟁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해낸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87년 이후 많은 사람들이 직장 내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말하지만, 민주화가 직장 내 여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던 거 같아요.”

[미니 인터뷰] 네 편 내 편 가르지 말고 인간의 존엄성 먼저 봐야

이한순 조흥은행노동조합 최초 상임여성부장

87년 이후 직장 내 어떤 변화가 있었어요?

은행은 아니었어요. 저는 엘리트들의 운동에 한계가 있었다고 봐요. 한 명만 잘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여행원제 폐지 이후 비정규직에 대해 노동조합은 크게 관심 있지 않았어요.

퇴직 이후 어떻게 지내고 있으세요?

처음에는 서부여성발전센터라고 거기 소장도 했었고, 2006년도에 양천구에서 시의원으로 한 번 나간 적도 있어요. 원칙대로 도전한다고, 무소속으로 한 번 나갔다가 안 됐어요. 그걸 끝으로 사회활동을 마무리 지었죠. 주위에서는 이해 못하기도 했는데, 제 스스로 마무리를 지은 거예요. 요즘에는 독서모임 찾아서 하고 있고, 국립박물관에서 하는 역사나 미술 공부도 이어서 하고 있어요.

노동조합이란 어떤 의미로 남아있어요?

제 인생을 바꿔놨죠. 제가 사실 굉장히 수동적인 사람이었어요. 은행에서는 시키는 일만 잘하는 거였지. 그런데 노동조합 여성부장 하면서 ‘누가 내 문제에 대해 대신해주지 않는다. 내 일을 내가 찾아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노동조합에서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지만, 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그러다보니 제 인생에 대해 생각이 이어지죠. 스스로 주체적으로 바뀐 계기가 됐어요.

여성노동자들이 어떤 식으로 변화해야 할까요?

가족단위에서 조직적으로 어떻게 가야 할지 고민해봐야 해요. 임금, 복지도 남녀 나누지 말고 여성이 출산휴직하게 되면, 남성도 같이 하고. ‘다 같이 잘 살자’로 가야죠. 남녀가 적이 아니잖아요. 내 남편이고, 내 아들인 거잖아요. 서로 역할 분담이 돼야 해요.

리더들도 그 역할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어요. 엘리트들이 ‘나만 잘 살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네 편 내 편을 떠나서 인권, 인간의 존엄성을 먼저 보는 거, 그게 제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