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모의 노동일기] 노동자의 자부심
[손광모의 노동일기] 노동자의 자부심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0.0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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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동을 글로 적습니다. 노동이 글이 되는 순간 노동자의 삶은 충만해진다고 믿습니다. 당신의 노동도 글로 담고 싶습니다. 우리 함께, 살고 싶습니다.

장래희망을 직업으로 말하는 게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생활기록부 장래희망란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가 아니라 ‘얼마를 벌고 싶은지’ 적어야 한다는 걸 느낄 무렵이었다. 얼마나 많은 월급을 받는지에 따라 일과 사람의 가치가 매겨졌다.

요즘 학생들의 장래희망 1순위는 ‘건물주’라고 한다. 건물주는 직업인이 아니다. ‘불로소득자’인 건물주를 장래희망으로 적는 마음에는 ‘일-노동’에 대한 세상의 인식이 함축돼있다. 이제 일을 통해 장래희망을 성취하기는커녕 ‘돈벌이 수단’으로조차 여기지 않게 된 것이다. 

전 미국 대통령 오바마 부부가 후원한 다큐멘터리 <미국 공장 America Factory>은 미국 노동자의 자부심이 상실되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준다. 다큐멘터리의 배경은 오하이오주 데이턴 시다. 데이턴 시는 1960년대 잘 나갔던 아이언 벨트(Iron Belt)의 한 지역이었지만, 녹슨 벨트(Rust Belt)가 되면서 쇠락을 맞이한다. 결정타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였다. 제너럴모터스(GM)가 공장 철수를 결정함에 따라 수많은 데이턴 시의 노동자는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다.

다큐멘터리는 데이턴 시에 중국의 자동차 유리 제조업체 푸야오(Fuyao) 그룹이 투자를 결정하면서 시작한다. 공장이 유치되면서 데이컨 시에 2,000여 개의 일자리가 생겼다.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자는 차오 더왕 푸야오 그룹 회장의 말에 데이턴 시의 노동자들은 설렘과 기대를 감추지 못한다. 다시 한 번 노동자들에게 희망이 찾아 온 듯 했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는 쉽지 않았다. GM공장에서 일할 때는 시급 28달러를 받았지만, 이제는 12달러에 만족해야 했다. 15년 간 GM공장에서 일했어도 다친 적 한 번 없던 노동자는 푸야오 공장에서 일한 지 1년이 지나지 않아 사고를 당한다. 일은 힘들어지고 위험해졌다. 임금은 줄었다.

미국 노동자들은 푸야오가 미국의 법을 준수하며 양질의 일자리를 만들기 원했다. 푸야오의 경영진은 미국인 노동자들이 중국인만큼 근면성실하지 못하다고 불평했다. 노동자들은 노조 설립을 통해 노동조건을 개선하려고 했다. 푸야오는 노무관리 컨설팅을 통해 노조 설립을 저지했다.

푸야오는 노조설립을 주도한 노동자를 해고하고, 몇몇 설비를 자동화했다. 기계가 들어서는 만큼 일자리는 사라졌다. 푸야오 미국 공장은 2년 만에 흑자 전환에 성공한다. 중국인 경영진이 바라는 생산성 향상은 이뤄냈다. 노동자들의 시급은 14달러로 2달러 인상에 그쳤다. 미국인 노동자에게 일은 점점 하기 싫은 것으로 인식됐다.

데이턴 시의 노동자들은 GM에서 근무할 때처럼 넓은 집에서 지내며 아이들이 원하는 운동화를 마음껏 사다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작은 아파트를 구해 거리를 전전하지 않아도 됐다. 허리띠를 졸라메야 하지만 아이들에게도 가끔 선물을 사다 줄 수 있다. 다만, 노동자들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을 잃었다.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려보자면, *“노동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은 노동하는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든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보전받았지만 자부심을 잃었다. 

노동이 한없이 수치스러운 일이 된 시대, ‘건물주’는 세간 사람들의 장래희망이 됐다. 노동자가 사회 발전을 이끌었던 시대는 과거의 기록 속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일까. 수치스럽지 않은 노동은 어떻게 가능할까.

* 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 새물결. 중 ‘카이저 파노라마관’ 장을 참조했다. 

"가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지당한 말씀이다. 그러나 세상은 가난한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든다. 일하는 자를 먹여 살리는 노동이 존재했을 때는 그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은 가난도 있었다. 흉작 등의 불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경우가 그러했다. 하지만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태어나면서부터 굶주리게 만들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점점 더 가난 속으로 옭아매고 있는 현재의 빈곤화는 사람들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