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정치, ‘종이돌’을 힘껏 던져라
노동정치, ‘종이돌’을 힘껏 던져라
  • 임동우 기자
  • 승인 2020.04.03 15:54
  • 수정 2020.04.03 15: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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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일본으로 돌아본 한국의 노동정치
적극적 참여 통한 정당 내 지분 확대가 필요하다

[리포트] 한국 노동정치의 방향

‘Paper Stones’. 1986년 미국의 저명한 정치학자인 아담 쉐보르스키가 선거에 대해 집필한 정치학 연구서다. 그는 투표용지를 ‘종이돌’로 불렀다. 쉐보르스키의 말마따나 생각해보면,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승패가 갈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개인이 갖는 투표권은 저항과 공격의 의미를 갖는다. 국회의원은 다양한 집단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나선 투사이며, 국회란 투사가 된 국회의원들이 싸우는 콜로세움이고, 그들의 무기는 개개인들이 한데 모아 건넨 종이돌이라는 것.

직업 신뢰도 꼴찌로 ‘국회의원’이 자주 오를 만큼, 한국사회에서의 정치는 아직까지 불신과 혐오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치는 참여를 통해 실질적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동안 한국사회의 노동은 권리를 되찾기 위해 수많은 정치적 연계를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겪었다. 이에 정혜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과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김진엽 정치발전소 사무국장은 유럽형 노동정치를 모범 사례로 들었던 타 연구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했다. 한국과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는 미국·일본의 사례를 통해 리버럴 정당과 노동조합의 결합이 빚어낼 한국형 노동정치의 실효적 방안을 모색했다.

정혜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김진엽 정치발전소 사무국장 (왼쪽부터) ⓒ 참여와혁신 이연우 기자 yulee@laborplus.co.kr
정혜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김진엽 정치발전소 사무국장 (왼쪽부터)
ⓒ 참여와혁신 이연우 기자 yulee@laborplus.co.kr

한국노총의 노동정치 시도

1990년 이후 한국노총의 노동정치는 두 차례 시도됐다. 첫 번째는 1996년 김영삼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이 나온 이후다. 당시 한국노총은 노동법 개정안에 대한 강한 반감을 기반으로 1997년 대선에서 ‘친노동자적 대선후보와의 정책연합’을 추진했다. 당시 정책연합 과정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후보는 김대중 후보였다. 하지만 특정 후보 지지가 조직 분열을 야기한다는 의견 때문에 조직 차원의 후보 지지는 무산됐다.

이후 2002년 한국노총은 노동조합 중심으로 독자적 정당인 ‘민주사회당’을 창당해, 일관된 노동정치를 위한 첫 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민주사회당의 창당은 2002년 대선에서 한국노총 산하 16개 산별연맹이 이회창 후보 지지 선언을 하면서 그 의미가 퇴색했고, 2004년 총선에서 ‘녹색사민당’으로 재창당하여 후보를 출마시켰지만 득표율 0.18%에 그치면서 정당 해산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2007년 대선 때, 두 번째 시도가 있었다. 당시 한국노총은 조합원 ARS 투표를 통해 42%로 최다득표를 했던 이명박 대선후보를 지지 후보로 선택했다. 노총의 지지대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됐으나, 노총의 핵심요구사안이었던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조항 철폐’가 거부되면서 노동정치는 사실상 무산됐다. 이후 민주당이 야권통합정당인 민주통합당 참여를 요청하면서 한국노총은 공동 정당의 주체로 떠오르게 된다. 이를 통해 한국노총은 당 내부 주요 권한을 얻음과 동시에 2012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2명, 지역구 의원 2명을 배출하는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총선 실패로 인한 한국노총 내부 반발로 당시 위원장이 사퇴했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자 했던 한국노총 지도부의 결정으로 민주통합당과 멀어지게 된다.

노동의 정치참여, 일본과 미국은?

‘자유민주적인’ ‘진보적인’ 등의 사전적 의미를 담고 있는 리버럴(liberal)은 미국에서 자유주의자와 진보세력을 포괄하며, 미국 민주당의 지지 세력을 뜻하는 말로 활용되고 있다. 미국 노동조합이 리버럴(liberal) 정당과의 결속을 도모한 건 1932년 대공황으로 노동자의 경제적 불만이 표출되면서부터였다. 대공황 당시 AFL(미국노동총연맹) 내 비숙련노동자·이민자·다양한 인종을 포괄한 조합원들에게 CIO(산업별노동조합회의)가 개방되면서 다양한 산업의 임금노동자들이 조직화됐고, 1937년 CIO 조합원 400만 명이 민족적 연대가 강한 AFL에서 분리되면서 정치적 지지를 통한 근본적 변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뉴욕, 펜실베니아, 일리노이 등 주 연맹 단위에 소속된 중공업 종사 노동자들은 표를 집결시켜 민주당을 지지함은 물론이고, 노동조합 차원의 선거자금 지원·일반 유권자 접촉 지원 등으로 지지자 당선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를 통해 CIO는 당시 뉴딜 정책을 이끌었던 루즈벨트 대통령의 4선에 기여했다. 미국 노동조합은 민주당에 적극적으로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하면서 필요로 하는 요구와 정책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일본에서도 있었다. 공공부문 위주로 결집된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가 1975년 공무원노동법 개정을 통해 파업권을 쟁취하고자 한 투쟁에서 패배하면서, 민간 노동조합 중심세력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일본노조총연합회인 ‘렌고(連合)’가 형성됐는데, 1989년 당시 전체 조합원의 70%가 렌고를 상급단체로 두고 있었다. 1999년, 렌고는 경제부터 안보까지 다양한 방향성을 갖춘 일본 민주당 기축의 정치 방침을 선언하고, 정치센터를 설립해 정치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일본 민주당에 고정표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 출신 의원들의 정치후원금을 산별노조가 전적으로 책임지게 하는 등 물적 자원까지 지원했다. 이에 일본 민주당 참의원 비례선거구 8~10석이 렌고 출신 후보들에게 돌아갈 수 있었고, 일본 민주당이 집권당으로 자리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토대는 렌고의 주요 요구를 민주당 정책에 그대로 포함하는 등의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정당 연계를 통한 노동정치, 현 문제점은?

한국에서의 ‘리버럴(liberal)’은 87년 민주항쟁을 이끌었던 노동·학생운동 이후 대안적 운동방안을 고려했던 시민계층을 뜻하며, 흔히 386세대로 통용되기도 한다.

이들이 지지해온 ‘민주당 계열 정당’(리버럴 정당)은 한국노총과의 정책연합을 시도하면서, 노동의 정당 지지와 정당의 노동정책 교환을 지향하는 정당으로 자리 잡았다. 과거에 비해 민주당 내 한국노총 출신 의원은 증가했지만 이들 의원의 의정활동이 노총이라는 조직과 연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이 많았고, 노동이 참여하고 있는 각 위원회에도 정부 주도적 결정으로 인해 노동의 이익을 반영하는 데 한계가 드러났다.

김진엽 정치발전소 사무국장은 이러한 원인이 “한국노총 조직 내 갈등을 기피하기 위한 정치 참여 회피”에 있다고 봤다. 김진엽 사무국장은 “조직 갈등의 회피는 행정부 내 채널에만 집중하도록 만들고, 정당과의 연결고리를 약화시키는 효과를 낳았으며, 이에 정당의 뒷받침 없는 위원회들은 노총 주도적 공간으로 탄생하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제도적 허들도 문제다. 피케팅과 주택 방문 등이 불법인 한국의 선거운동은 보유 조항만 300여 개인 ‘공직선거법’에 의해 규제된다. 서복경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는 현 ‘공직선거법’에 대해 “‘의회정치의 안정’이나 ‘부패정치 근절’을 이유로 기득권정당 카르텔의 공고한 유지 체제를 정당화하고 민주주의에서 노동이 시민권을 가지는 데 큰 제도적 제약으로 작용”한다고 밝힌 바 있다. ‘정치자금법’도 선거운동에 제약을 두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정치자금법 31조는 외국인, 국내·외의 법인 또는 단체의 정치자금, 단체 관련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하고 있다. 정치기부금 모금이 불법이란 이름으로 활로를 차단당하면서 시민 및 단체의 정치활동마저 가로막히고 있다.

정혜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은 한국형 노동정치를 위해 ▲제도적 장벽 철폐 ▲총연맹 내 권력 지도 연구 ▲시민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당 통합 유산의 적극 활용 등의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노동정치, 제도적·조직적 발걸음 필요해

“노총 팔아서 의원됐죠. 노총 출신이라고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 한국노총 조합원 인터뷰 中

이번 연구에 정혜윤 연구위원과 함께한 김진엽 정치발전소 사무국장은 “당 안에 산재해 있는 한국노총 각 채널들 간 팀플레이가 가능하도록 조율 구조를 만들고, 개인의 진출이 아니라 공식적인 결정과 지원 속에서 ‘한국노총 의원’을 배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한국노총이 적극적 지원을 통해 민주당이 노총에 의존토록 만들기보다 노총이 민주당에 의존하는 결과가 발생한다는 걸 지적했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의 노동이 아직까지 민주적 절차를 위한 참여의 주체로 거듭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원으로 활동 중인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의 기준이 ‘노동의 권리가 얼마나 보장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한다. 노동조합보다 잘 조직된 시민 집단을 찾아보기 힘들며, 노동자 없는 경제민주화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상훈 학교장은 “돈과 표, 조직을 가진 노동조합이 사회·경제·정치적으로 영향력을 가질 때 노동운동은 존중받을 수 있고, 이러한 존중을 기반으로 민주주의도 자본주의 시장경제도 평화롭게 작동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이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영향력을 토대로 정당이 기능할 때 노동의 권리는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옛말처럼, 노동의 적극적 참여만으로 변화를 이끄는 데 한계가 있다. 한국 사회의 약 75%가 ‘노동자’로 불린다.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노동자’라는 이름 안에는 수많은 집단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지금 우리에겐 ‘노동’이라는 추상적인 상징을 대변하는 이들보다, 세분화된 집단의 이익을 구체적으로 대변할 수 있는 ‘투사’가 절실하다.

#에필로그_못 다 나눈 이야기
솔직 담백 TALK? TALK!

정혜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김진엽 정치발전소 사무국장

필히 보고서에 담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으리라. 연구 이후 ‘못 다 나눈 이야기’를 듣고자 국회의원회관 2층 카페로 갔다.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다. 막상 연구를 마무리 짓고 나니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는 정혜윤 연구위원 옆에 김진엽 사무국장이 짐을 풀고 앉았다. “못 다한 이야기요?” 김진엽 사무국장이 먼저 입을 뗐다.

연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김진엽: 작년 1월에 일본의 정당과 노동조합을 주제로 정치기행을 다녀왔어요. 거기서 일본의 노동조합과 일본의 정당, 노동조합 출신의 의원들을 만나면서 그런 일본에서는 어떻게 노동정치를 하는가 들었는데, 개인적으로 흥미로웠어요. 일본을 마냥 보수적인 사회로 인식했는데, 그 속에서 돌아가는 노동정치의 모습이 시사하는 방향이 크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정혜윤: 제가 한국노총에 취직하고부터 대외협력본부의 과제였어요. 그동안 유럽 쪽 사례만 얘기해왔는데, 미국과 일본을 모델로 살펴보면 좋겠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산별노조가 아닌 기업별노조 체계인 점, 유럽과 다르게 사민주의 정당이 없거나 약한 나라라는 점에서 한국과의 공통점을 찾는 게 의의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일본은 제 학위논문이나 제가 기존에 알던 것에서 다르지 않았고요, 미국은 잘 몰랐는데 공부를 했죠. 김진엽 국장님과 결과물을 만들어내서 기쁘네요.

보고서에 담지 못한 이야기, 있나요?(하하)

김진엽: 솔직하게 말하면 되죠? 외부에서 바라본 입장으로 얘기할게요. 저는 이해가 잘 안 갔던 부분이 있었어요. 노동운동가로 노동조합에 있던 분들이 대부분이 노동조합 바깥으로 나와서 힘 빠지고 나서 정당 활동을 하려고 해요. 그렇게 들어가면 정당에 눌리죠. 정당은 단지 그 사람의 이름, 상징만을 가지고 오는 거고요. 만약 노동정치에 대한 방향성이 있었다면, 사실 노동조합에 있을 때 뭔가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정혜윤: 한국노총 위원장과 상임 임원은 임기 중 정당활동을 비롯한 여타 정치활동을 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더라고요. 한국노총 역사 속에서 분열과 갈등의 측면이 있어서 만든 거 같아요. 저는 이런 조치가 한시적인 거라고 생각해요.

김진엽: 노동조합이 정치를 하면 안 된다는 게 내부적 규율로 있는 건 문제가 있다고 봐요. 오히려 내부 규율을 특정 정당과 상관없이 ‘한국노총이 어떤 방식으로 정치 안에 자신의 이익을 투입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만들어 가는 게 중요해요. 지금과 같은 방식은 계속 회피하는 것일 뿐이죠.

정혜윤: 한 친구가 청년 인턴으로 온 적 있어요. 어느 날은 얘기하다가 노총이 ‘탈권력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권력 지향이나 정치 참여를 안 할 수 없는데도, 이걸 끄집어내길 부끄러워한다는 거죠. 민주주의 질서 속에서 권력이 있는 곳으로 가서 노동조합의 이익을 투입하고 조합원의 이익을 실현하는 건 당연한데, 노골적으로 그리 하는 건 부끄럽다는 풍조가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요.

김진엽: ‘왜 정치를 하냐’는 비판보다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하냐’는 논리로 흐르면 좋겠는데. 사실상 정치적 지향성 다르다는 걸로 인해 ‘정치’ 그 자체를 못 하게 만드는 구조인 거 같아서요.

정혜윤: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중앙에서 결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겠죠. 꼭 더불어민주당으로 선택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봐요. 미래통합당을 지지하는 노동조합이 꼭 노동정치 못하리란 법 없어요. 통합당이야말로 한국노총이랑 오랫동안 연계가 있었잖아요. 지금 노총에 대한 미래통합당의 태도가 포션이 하나도 없다는 반증이라고도 봐요. 그래서 보수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안에서 열심히 포션을 만들어야 하죠. 그렇게 하면 보수정당도 노동조합을 무시하고 배제하진 않을 거거든요. 그런 역할을 한국노총 조직이 할 수 있다면 그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정책협약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정혜윤: 일본의 노동조합 렌고랑 일본 민주당 정책협약이 있는데 한 페이지예요. 그리고 내용도 추상적이에요. 노동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식이에요. 한국노총은 180페이지 가량 되거든요. 근데 그게 실현되는 건 아니라는 거죠. 저희가 이번에 이 과제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협약으로 힘이 주어지는 게 아니다’라는 거죠. 정당과 렌고가 한 페이지짜리 정책협약을 맺었어도 힘이 있을 수 있는 건, 노동조합에서 당에 정확하게 주는 포션이 있고, 당도 그래서 노동조합에 기여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저희가 집중했던 게, 선거에 대한 조직적 지원과 선거자금이 필요하다고 했던 거죠. 정책 추진을 위해 협약서를 잘 만드는 게 문제의 중심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김진엽: 진보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하는 것과 이뤄나가는 건 다른 거라고 봐요. ‘너희 왜 이거 안 해’라고 다그치면 될까? 한번 생각해볼 수 있겠죠. 과정 속에 장애물이 있을 텐데, 그 길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목표만 설정해놓고 고려하지 않으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죠. 다양한 목표 속에서 노조가 원하는 방향을 이뤄나가기 위해서라도 과정을 잘 살펴봐야죠. 협약만 하고 ‘왜 안 하냐’고 다그치는 건 누군가한테 의존한다는 반증인데, 의존해서 이뤄질 수 있는 게 얼마나 있을까요?

정혜윤: 한국의 진보진영에 퍼져있는 운동의 논리가 너무 강하다고도 생각해요. 노동조합이 화를 내고 다그쳐서 견인을 해야겠다고 하면서 견인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얘기 안 해요. 이건 운동의 논리지, 정치의 논리나 민주주의의 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아직까지 운동의 논리가 정말 노동운동과 진보 쪽에 광범위하게 퍼져있고, 힘이 세요. 각 입장 별로 이해관계 조절해야 한다는 건 다 알아요, 밀어붙여서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어요. 한국노총이 합의나 제도화 된 점에 대해 부끄러워하는 게 있는 거 같아요.

그리고 노동조합은 정책에 대해서 관련 전문가가 밑그림만 그리면 그대로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누군가의 이야기에 경도된 느낌이에요. 세상에 완벽한 게 없고, 누구도 만족시킬 수 있는 답안은 없고, 답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거고, 그 과정에 노동조합의 정치가 있을 거고, 지도부의 정치적 행위가 있을 거고, 정당의 정치인들이 있을 거고, 그걸 존중해서 나가면 된다고 생각해요. 한 번에 이룰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노동조합이 인지해야겠죠.

김진엽: ‘꾸짖는다’는 걸 생각하면, 군주정 같은 생각도 들어요. 마치 왕과 선의의 분리된 집단이 있고, 꾸짖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 누군가에 의존한다는 의미에서 군주정 같다고도 느껴지네요.

앞으로 노총에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김진엽: 제가 나이나 위치로 보면 민주화 이후 세대이다 보니까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집단과 사람을 인정하고 가야 하는 게 아닌가, 누군가를 적으로 설정하고 목표에 다가가는 건 다원적이지 못하다는 거부감이 있어요. 적을 설정하면 열정을 불러일으키기 가장 쉬워요. 이를 줄여나가면서 열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이 있을지 고민해봐야 해요.

정혜윤: 양대 노총이 노동자대회를 다른 날 여는데, 레토릭이나 몸짓패까지 똑같아서 깜짝 놀랐어요. 노동조합의 언어가 빈곤한 거 같아요.

앞으로는 어떤 걸 연구해보고 싶나요?

정혜윤: 지역에서 행정채널에서 결합하고 있는 건 많아요. 노사민정협의회 등등 지역단체들이 많더라고요. 당이 일정하게 지역에서 결합된 부분도 있어요. 노총에서 파악된 건 지방의원이 몇 명 있다는 자료뿐이에요. 이들이 노동정치를 위해 무엇을 하는지는 파악된 게 없어요. 노총의 노동정치에 있어서 비례의석도 의미가 있지만, 영속성을 위해 지역구의석이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지역결합, 이런 연구도 중요할 것 같네요.

김진엽: 리더십 구조, 지역에서의 정당과 노동조합의 관계? 이번 연구를 하면서 정당, 노동조합 조직 안에 좋은 정치학자가 자리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조직 내부나 조직과 조직의 관계를 보면서 조직의 생리를 이해하는 조직 내 이론가, 연구자가 필요해요. 외부의 자문도 필요하겠지만, 안에서 조직을 이해하면서 볼 수 있는 연구자로서 정치학자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국회미래연구원에서 초빙연구원으로 활동 중인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이 일정 이후 대화에 합류했다. 기자는 2019년 12월 16일 패스트트랙 안건 상정을 놓고 태극기를 든 시민들이 국회를 둘러싼 상황을 회상했다. 그날은 더불어민주당 전국노동위원회와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이 주관한 ‘노동이 묻고 정당이 답하다’ 토론회가 개최되는 날이기도 했다. 한국의 정당은 노동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한국 사회에서 노동을 위한 정당만의 역할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우선 거대 양당 간의 합의 도출이 필요할 텐데 쉽지 않아 보입니다. 이념적 거리가 넓기 때문일까요?

박상훈: 정당의 이념적 거리가 넓다는 건 정당이 스스로 가진 정치적 자산·지지 기반과 안정적으로 결합돼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오히려 우리나라는 정당 간 이념적 거리가 좁아서 더 싸우는 경우예요. 정당이 늘 마지나(marginal: 근소한 득표 차로 얻은 의석)를 두고 경쟁하고, 지지층이 서로 겹치면 상대편 정당이 통제하는 영역에 가까이 다가가야 해요. 미국하고 한국에서는 정당이 심각하게 싸워요. 극단적으로 양극화 돼 있어요. 두 나라 모두 좌파정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를 말하는 정당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어떤 원인이 있는 걸까요?

박상훈: (정치적으로) 좌우를 나누는 건 계층이나 계급의 생활조건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인 정책이 가장 큰 요인이에요. 예를 들어 200만~400만 원 사이 소득자에게 몇 퍼센트 소득세를 매길 것인가, 지원 장려나 보조금 장려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놓고 다툰다면, 그건 조정이 가능해요. 근데 한국 사회에서의 정당은 싸우는 이유가 모호해요. 상징적인 걸로 싸우잖아요. 쟤네는 ‘적폐다, 좌익이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건 이념이 아니에요. 반이념이에요. 이념을 동원해서 상대를 못살게 구는 거죠. 이념은 어떤 세상에 살 것인가에 대한 사람들의 신념의 체계를 가리키는데, 우리나라의 정당은 그런 걸로 싸움하지 않잖아요?

만약 이런 얘기가 잘 된다면 유권자 집단의 특성마다 호명이 돼요. 그렇지 않으니까 나오는 말이 ‘청년’인 거죠. ‘청년’이라는 단위는 폭이 넓어요. 그 안에 소득차이도 있을 수 있고, 학력 차이, 직업적 차이, 직업 안정성 차이 등등 이러한 요인이 구체적으로 호명이 돼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통칭명사만 불러일으키는 거죠.

노동정치를 위해 정당이 해야 할 일은 뭘까요?

박상훈: 노동정치는 세 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어요. 첫 번째로는 자율적 결사체로서 여러 사회적 이익을 다투는 사회집단이 자신의 요구를 위해 조직화하고 표출하면서 노사관계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봐야 하고요, 두 번째로는 정당들이 사회의 직업 집단이나 소득 집단의 이익을 어떻게 대표하는지, 그리고 세 번째는 양측의 교차를 봐야죠.

비정규직·청년 등과 같이 노동시장의 신규 진입자에 대한 정책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건 별로 없죠. 온정주의적으로 ‘노동존중사회를 만들겠다’, ‘청년들 눈물을 닦아야 해’ 같은 말만 있죠. 세 차원을 모두 봤을 때 노동정치는 ‘우울한 상황’입니다.

정당이 노동자의 특별한 이익, 권익과 세계관을 위해 행동하는 게 아니고, 표 때문에 정책협약 맺기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형태가 일관되고 있어요. ‘노동자에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정도 보여주는 거죠. 정당이 진보적인 역할을 한다면 사람들의 소득과 재분배 방침을 과제로 넣고, 그들의 직업 집단의 열망의 권익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노동에 적절한 자원을 제공해야죠.

사람들이 정치에 거는 기대나 혜택이 지금처럼 적은 때가 있었을까요? 말로만 지나치게 격렬해요. 이러한 현상이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급여생활자가 약 75%인데 선거가 가까워졌어도 노동조합이 덜 주목받는 건 노동이 우리 사회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못 잡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해요.

정혜윤: 저는 새로 들어온 집행부가 노총에서 통합리더십을 발휘하는 걸 계기로 긍정적인 효과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정치에 대해 어떻게 이끌어갈지 고민하고 힘 있는 결정을 한다면 한국노총이 전진하는 계기가 될 거라고 봐요.

박상훈: 지도부 친화적인데요?(하하) 한국노총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예상해요. 첫 번째는 새 지도부가 지난 2년 반 동안 민주당·정부와 사회적 대화를 적극적으로 진행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기 때문에 ‘조합원의 불만에 기초해서 노동정치로부터 후퇴’하겠다거나 ‘현장의 노동운동을 강화하겠다’, ‘전임지도부의 선택은 조합원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방향이고요. 두 번째는 그동안 민주당과 한국노총의 결합이 보수적 성향의 연맹에 소외감을 주긴 했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라면 거리에서의 운동·현장에서의 투쟁도 중요하지만 결국 입법과 정책을 통한 변화가 필요하다, 입법과 정책 범위도 민주당으로만 한정하지 않고 노총 단위에서 노동정책 범위를 넓혀서 민주당과의 노동정치를 추진하는 연맹에는 자율권과 적극성을 주고, 그렇지 않은 연맹에도 다양한 형태의 노동정책을 펼치도록 하는 방향이에요.

첫 번째 선택은 한국노총 분열을 심화시킬 수 있어요. 전자는 더욱 깊은 간극으로, 패자가 된 연맹 쪽에서 3년 후에 반드시 탈환하겠다는 적대적 경쟁만을 키우는 형국이 되겠지만, 후자는 역설적이게도 노동정치의 통합 범위를 넓히고 다질 수 있겠죠. 이전에는 민주당과의 궁합만으로 소외감을 느꼈던 이들이 이를 부정하진 않으면서 다른 형태의 노동정치 방안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하면, 신임지도부가 보수 세력까지 결합돼 있다고 평을 받고 있지만 오히려 한국노총의 노동정치를 깊이 뿌리 내리게 하는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바라건대 후자의 선택을 하길 권하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