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사이, 치열하게 고민하는 이성훈 위원장
이상과 현실 사이, 치열하게 고민하는 이성훈 위원장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0.04.03 17:27
  • 수정 2020.04.03 1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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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교체’ 이뤄낸 SK이노베이션노동조합

[인터뷰] 이성훈 SK이노베이션노동조합 위원장

아름다운 불빛에는 노동자의 땀방울이 서려있다. 울산시민들에게 울산 남구의 석유화학산업단지는 야경 명소로 꼽힌다. 노동자들의 노고로 24시간 돌아가는 석유화학공장은 한밤중에도 환한 불빛을 낸다. 노동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이다.

울산 남구의 ‘터줏대감’격인 SK이노베이션에 지난해 11월 제24대 노동조합 집행부가 새로 들어섰다. 이번 선거는 SK이노베이션노동조합에 ‘세대교체’의 의미를 가진다. 1997년 ‘유노바세’(유공노동조합바로세우기모임) 운동을 주도했던 세대들이 물러나고, 그 밑에서 현장을 뛰어다니던 세대로 집행부가 교체됐다.

SK이노베이션노동조합의 ‘민주화’를 주창했던 시절과 현재는 사뭇 다르다. 밝기만 했던 석유화학산업의 전망은 불확실해졌고, 고용불안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러나 ‘고임금 사업장’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여전히 따갑다. 향후 3년, SK이노베이션노동조합을 책임질 이성훈 위원장을 만났다.

*인터뷰는 3월 4일 한국노총 울산지역본부에서 진행했다.

이성훈 한국노총 화학노련 SK이노베이션노동조합 위원장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이성훈 한국노총 화학노련 SK이노베이션노동조합 위원장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사람이 좋아서’ 시작한 노동조합

이성훈 위원장은 1995년 7월 SK이노베이션에 입사했다. 노동조합 활동은 1998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성훈 위원장은 ‘사람이 좋아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처음엔 사람이 좋아서 했어요. 18대 집행부 선거에서 제가 좋아하는 분들이 선거에 나섰는데 도와주러 갔다가 시작했죠. 당시 선거에서는 떨어졌어요. 그래도 선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조합 활동이니 노동운동이니 대화를 나누면서 교육이 된 것 같아요.”

이성훈 위원장은 현장 대의원 활동 당시 ‘입바른 소리’를 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20대 집행부에 활동을 하면서 ‘현실’의 벽을 많이 느꼈다고 이야기했다.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입바른 주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결과’는 이성훈 집행부의 활동 방향을 드러내는 키워드다.

“현장 활동가로 활동할 때는 내 주장을 하면 되고, 관철 여부에 따라 화를 내거나 수용하면 됐는데, 노동조합 집행부는 전체를 책임지기 때문에 현실 가능성에 대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현장 활동가는 노동조합의 이상을 펼치면 되는데 노동조합 집행부는 현실과 부닥치는 문제들이 있었죠.”

정유업계의 불확실성,
노동조합의 역할은?

지난해 정유업계에는 악재가 연이어 덮쳤다. 정유업계는 원유가격과 그에 따른 경기 순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미국의 셰일오일 공급 증가로 원유가는 낮아졌지만,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한 소비 감소를 만회할 만큼은 아니었다. 국내 대부분 정유회사는 지난해 ‘반토막’ 실적을 기록했다.

더불어 근본적인 탈석유에너지 흐름도 보이고 있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환경규제가 강화되고, 화석기반에너지에서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이 가속되면서 정유업계의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이성훈 위원장은 회사의 위기에 따라 노동조합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단, 조합원의 생존권을 지킨다는 조건이 전제되는 경우에 한해서다.

“기본은 많이 벌면 많이, 적게 벌면 적게 받아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회사가 위기면 위기에 걸맞은 노동조합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봐요. 지난 위기를 거치면서 어떤 때는 투쟁을 했고, 어떤 때는 회사와 손을 잡고 헤쳐 나갔어요. 제가 봤을 때는 최소한 회사가 어려워지면 노동조합은 고통분담 등 어떤 형태로든지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봐요. 단, 직장을 나가게 해서는 안 돼요. 마지막 마지노선으로도 고용을 건드려서는 안 돼요. 넘지 말아야 할 선이에요.”

이성훈 위원장은 고용을 조합원의 ‘생존권’이라고 표현했다. 1997년 대한민국 사회를 할퀴었던 국가부도사태의 상처였다. 이성훈 위원장은 IMF를 겪으면서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노사관계의 파국 불러온다’는 경험칙을 깨달았다.

“IMF 때에는 정부차원에서 구조조정을 요청했잖아요? 회사는 싫어도 해야 할 입장이었죠. 그 당시 친하게 지내던 팀장들도, 동료들끼리도, 보내는 사람, 나간 사람, 남은 사람 모두가 다 눈물을 글썽거렸어요. 저도 어린 나이에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컸어요. 그런 과정들이 힘들었던 기억이었던 것 같아요.”

이성훈 한국노총 화학노련 SK이노베이션노동조합 위원장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이성훈 한국노총 화학노련 SK이노베이션노동조합 위원장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고임금이라서 ‘노동권 제한’?
사유가 될 수 없다

구조조정은 모든 노동자에게 공포로 다가온다. 노동조합을 통해 이에 대비하려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사회의 반응은 냉랭할 때가 많다. 특히 SK이노베이션과 같은 고임금 사업장의 노동조합은 ‘귀족노조’라는 주홍글씨를 달고 산다. “연봉이 1억인데 무엇을 더 바라냐”는 식이다.

하지만 임금이 높다는 게 ‘노동권’ 실현을 제한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원칙상으로는 노동조합은 조합원을 위해 존재한다. 임금투쟁이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더욱이 SK이노베이션은 필수공익사업장에 해당해 노동3권 중 단체행동권을 발휘하기 어렵다. 다만, 이성훈 위원장은 ‘사회적 동의’를 받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SK가 투쟁한다고 하면 사람들의 시선이 별로 안 좋아요. 그런데 저희는 필수공익사업장으로 지정돼 있어서 파업권이 없다고 보면 되거든요. 노동3권에 위배된다며 문제를 제기해도 동의받기는 어려워요. ‘돈도 많이 받는 SK가 무슨’ 이런 반응이죠. 그러나 현장에서 괴리감은 분명히 있어요. 그래서 우선적으로 사회적 동의를 받아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봐요. 사회에서 동의를 받아내야 나중에 노동조합이 투쟁을 할 때도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임금 많이 받는다고
‘자긍심’ 올라가진 않는다

노동조합 활동에 사회적 동의를 받기 위해서 노동조합 내부적으로 ‘임금’보다는 조합원의 ‘자긍심’을 높일 수 있는 방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성훈 위원장이 말하는 자긍심은 일하는 사람의 삶의 질, 워라밸(Work&Life Balance) 등을 높이는 것이다.

그 일환으로 이성훈 위원장은 교대제 근무형태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현행 4조3교대에서 4조2교대로 변경하는 것이다. 4조3교대에서는 하루 8시간을 근무하지만 4조2교대에서는 12시간 근무한다. 4조2교대 근무 시 1일 근무시간은 늘어나지만, 일주일당 근무일 수는 줄어든다. ‘주말 있는 삶’이 가능하다.

“4조2교대 도입은 생활방식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요. 과거에는 4조3교대가 꿈의 직장이었어요. 그런데 교대 근무가 사실은 해보지 않으면 몰라요. 생활 리듬이 깨지고, 피곤도도 많이 올라가고, 가족들과 생활은 적어지고요. 4조2교대는 야간에 집중해서 일하고, 쉬는 시간을 늘려 삶에 대한 여유를 가지게 하자는 거예요. 선배님들 입장에서는 ‘피곤도’가 높지 않겠냐는 불안감이 있긴 해요. 회사에서도 관리문제, 안전문제를 우려하지만, 그래도 한 번 시행은 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에요.”

더불어 이성훈 위원장은 노사 합작 사업인 ‘2080행복프로젝트’를 이번 선거공약으로 제시했다. 노동조합 투쟁기금 65억 원 중 20억 원을 고정성 비용으로 출자하고, 회사에서는 80억 원을 운영비용으로 출자해 약 100억 원의 노사공동기금을 조성한다. 조성된 기금은 조합원의 복리후생과 퇴직자 지원으로 사용된다.

이성훈 위원장은 “SK가 말로는 좋은 회사라고 하지만, 정말 현장에서도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다. 큰 틀에서 복지나 임금에서는 만족하겠지만 ‘자긍심’이라고 하는 것은 다르다”면서, “밖에서는 정말 멋진 아빠고 신랑인데 회사에 들어오면 묵묵히 일만 할 뿐이다. 노동조합과 회사가 일하는 이의 자긍심을 높여줄 수 있는 방안으로 2080행복 프로젝트를 고민했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퇴직자 일자리 제공 ▲현행 근무자 봉사활동 전면 폐지 후 SK글로벌 봉사단체 운영 ▲SK형 문화생활 프로그램 지원 등이다. 퇴직자 일자리 창출 방식은 현행 촉탁직 근무를 변형해 안전관리-기술노하우 지원 업무에서 퇴직자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이성훈 한국노총 화학노련 SK이노베이션노동조합 위원장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이성훈 한국노총 화학노련 SK이노베이션노동조합 위원장 ⓒ 참여와혁신 손광모 기자 gmson@laborplus.co.kr

노동조합의 사회적 역할

이성훈 위원장은 2080행복프로젝트를 장기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SK이노베이션이라는 단일 사업장의 틀을 넘어서 지역사회 공헌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SK는 사회적 기업으로 역할을 잘 하고 있다고 평가 받아요. ‘1% 상생기금’도 노사공동으로 운영하고 있고요. 그런데 보통 돈을 지급하는 형태로 이뤄져요. 제 개인적인 욕심은 시니어타운같이 큰 복리후생 시설을 만들고, 거기에서 많은 일을 하도록 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해요. ‘SK가 얼마 냈다’고 말하는 건 모양은 좋아요. 그런데 경기에 따라서 소모성이 될 수 있잖아요?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주는 게 앞으로 저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해요. SK가 울산에 대공원을 지은 적이 있어요. 삭막한 공업도시에 대공원을 만든 건 울산시민에게도 큰 의미로 남아있을 거예요. 그런 걸 하나 지었으면 하는 바람이죠.”

울산에서 나고 자란 이성훈 위원장은 삭막한 회색 도시 울산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지역을 감싸는 악취와 고릿한 석유냄새,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사고는 울산을 위험한 도시로 세상에 각인시켰다. 그 당시 울산의 노동자를 위로해준 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이었다. 그런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삶의 만족’이라는 개념은 낯설었다. 이성훈 위원장은 ‘단순히 돈을 벌어 소비하는 문화’에서 울산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한다.

“위험한 노동조건에서 일을 하더라도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상심리에 의한 소비문화가 만연했었죠. 단순히 돈을 벌어서 내 가족을 먹여 살리는 시대는 지났다고 봐요. 이제는 자긍심을 높여서 노동자 스스로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겠냐는 거죠. 돈도 중요하고 가족도 중요하지만 ‘내 삶’에 대한 행복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 문화가 성숙돼야 하지 않나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