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이사제가 잘 굴러가기 위한 조건
노동이사제가 잘 굴러가기 위한 조건
  • 최은혜 기자
  • 승인 2020.04.05 00:00
  • 수정 2020.04.06 1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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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한스뵈클러재단, 우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제도 정비도 필수

커버스토리 ⑤ 노동의 참여, 이렇게 해보자

노동, 참여를 돌아보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의 사회적 위치는 어디쯤일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만 하거나 일터를 벗어나야만 비로소 시민권을 보장받는 존재는 아닐까? 자신이 일하는 현장을 가장 잘 알지만 일터에서 이뤄지는 온갖 의사결정에서는 배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의사결정은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고, 신속한 의사결정, 경영의 효율성 같은 논리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현장의 목소리, 노동이 배제된 의사결정의 결과는 그리 신속하지도 않고 효율성은 더더욱 떨어진다. 다수가 배제된 의사결정은 사회적 갈등을 잉태하고, 기업의 생존을 위해 노동자들을 구조조정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갈등이 폭발해 해결되지 못한 채 막대한 시간과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후적인 대응에만 머물렀던 노동자가 기업의 의사를 결정하고 나아가 일터를 개선하는 데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노동의 참여’의 의미를 짚어본다.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으로 노동이사제가 시작된 때는 2016년 9월, 서울시의회에서 ‘서울특별시 근로자이사제 운영에 관한 조례’가 통과된 이후다. 2017년 1월, 서울연구원에서 국내 1호 노동이사 선출 이후 서울시에서 17개 기관 22명의 노동이사가 3년간 활동했다. 이 중 2017년에 임명된 15명의 노동이사의 임기는 올해 종료된다.

1기 노동이사의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있지만, 노동이사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노동이사제를 둘러싸고 노동이사, 노동계, 전문가는 모두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현장의 필요성을 절감했는지 지난 2월 3일, 서울시는 노동이사제의 진화 및 전파를 위한 ‘노동자이사제 2.0’을 발표하기도 했다. 노동이사제가 순항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노동이사제 처음인데,
교육받을 곳도 마땅하지 않아

박희석 서울교통공사 노동이사는 “노동이사로 선출되고 처음에는 이사회 내용을 못 알아들었다”고 회상했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용어도 모르겠고 그래서 처음에는 이사회에서 그야말로 멍 때렸다”며 “그래서 초반에는 안건을 다 분석하면서 정말 공부 많이 했다”고 밝혔다. 최초로 도입된 제도를 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1기 노동이사의 숙명이었다.

서울농수산식품공사에서 노동이사를 맡고 있는 변춘연 노동이사는 “경영진의 한 사람으로서 노동이사의 경영능력과 노사관계 전문가로서 자질 향상을 위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교육프로그램이 없다”며 “독일은 한스뵈클러재단, 스웨덴은 PTK(스웨덴의 노조협의회. 26개 노조가 가입돼있다)에서 노동이사의 원활한 활동을 위한 직무능력 향상 훈련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박태주 고려대학교 노동문제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노동이사의 교육시스템은 중요한 의제라고 강조한다. 박태주 선임연구위원은 “독일의 한스뵈클러재단은 독일노총의 초대위원장인 한스뵈클러의 이름을 따 만든 독일 노동계의 교육 지원 재단”이라며 “여기에서 기본적으로 노동이사제의 교육, 지원, 연구 사업 등을 진행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아직 우리는 전문적으로 노동이사제에 대한 교육과 지원, 연구 사업 등을 수행할 수 있는 기관이 한정적”이라며 “노동이사의 교육시스템은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중요한 의제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노동이사 역량을 미리 키우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노동조합의 역할을 강조했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노동이사에 선출된 사람이 이전에 민주적인 회의를 진행해보는 경험을 해야 한다”며 “그 역할은 노동조합에서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변춘연 노동이사는 “현재 서울시에서 ‘노동이사아카데미를 추진 중”이라면서 한스뵈클러재단이나 PTK처럼 교육과정을 잘 설계하고 커리큘럼을 내실 있게 편성해 발전시켜야 한다”고 서울시의 역할을 강조했다.

가깝고도 먼 사이,
노동이사와 노동조합

서울시 산하기관의 노동이사들은 공통적으로 노동이사와 노동조합의 관계 문제가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 문제는 노동이사의 정체성 문제로까지 번진다. 노동이사제를 운영 중인 서울산업진흥원의 김범수 노동조합 위원장은 “노동이사와 함께 간담회를 하는데, 초반에는 조합원들이 노동이사는 노조 편인지 회사 편인지를 많이 물었다”며 “간담회를 진행하면서 노동이사에 대한 인식이 ‘노조 편도 회사 편도 아니지만 노사 화합을 위해 중간에서 가교 역할을 하는 사람’, ‘경영진으로 분류되지만, 노조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사람’ 등으로 변했다”고 설명했다.

현재 노동이사는 경영진에 해당하기 때문에 노동조합원이 될 수 없다. 노동조합원이 노동이사로 선출되면 노동조합을 탈퇴해야 한다. 노동조합이 노조 아님 통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변춘연 노동이사는 “노동이사의 노동조합 탈퇴 의무화는 노동이사의 고립을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박희석 노동이사 역시 “노동이사가 노동조합원 자격을 상실하면서 오는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며 “구체적으로 노동이사가 노동조합으로부터 정책적인 지원을 받아야 하는데 조합원 자격을 상실하면서 노동이사가 고립되기에 한정된 시간으로 전체 노동자의 의견을 수렴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꼬집었다.

노동이사제를 활용하고 있는 독일이나 스웨덴, 프랑스는 노동이사가 노동조합을 탈퇴하지 않는다. 2018년 6월, 서울특별시 노사정서울모델협의회가 작성한 ‘2018년 서울시 투자출연기관 노동이사 유럽 노동이사제 연수 보고서’를 보면, 유럽은 노동이사가 된다고 해서 노동자의 자격을 잃는 것이 아니기에 노동이사의 노동조합원 자격 상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알 수 있다.

변춘연 노동이사는 “최소한 노동자의 이익을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직(노사간부, 노사협의회 근로자대표 등)의 겸직을 금지하되 노동조합원의 신분을 의무적으로 박탈할 필요는 없다”며 “노동이사의 노동조합 탈퇴 여부는 노동이사 개인의 자유의사에 맡길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할 일은 많은데,
권한이 없다

또 다른 문제로 지적되는 것은 노동이사의 권한 문제다. 김범수 위원장은 “최근 서울산업진흥원의 노동이사가 교체됐는데, 그 이유로 노동이사제를 실시해도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김범수 위원장은 “1기 노동이사가 적극적으로 직원 간담회를 하는 등 직원들의 애로사항을 많이 청취했다”면서도 “그런데 정책적으로 미비해 고충을 청취하지만, 제도적으로 해결방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변춘연 노동이사는 “현행 노동이사제가 노동이사를 비상임이사로 규정해 외부인사로 임명된 사외이사와 동일한 발언권과 의결권만 노동이사에게 부여하면서 노동이사는 이사회에서 ‘구색 맞추기’로 전락했다”며 “결국 기관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노동이사 개인의 역량에 의존해야 하는 문제가 반복된다”고 설명했다. 별 다른 권한이 없어 이사회에서 거수기 역할 이상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실질적인 권한이 없기 때문에 ‘노동의 경영참여를 통한 투명한 경영과 견제’라는 노동이사제의 근본적인 도입 목적이 흐려진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실질적인 권한은 ▲안건 부의권 ▲임원추천위원회 위원추천권 ▲감사청구권 등이다.

박희석 노동이사는 “이사회는 회사의 최고의사결정기구”라며 “이사가 이사회에서 안건을 부의하는 것이 바로 실질적인 경영참여”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실무진이 안건을 만들어서 올리면, 심하면 이사회에서 5분도 안 걸려서 ‘의견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며 “그 이후 책임지지 않는 행태를 바로잡기 위해 안건 부의권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안건 부의권을 독단적이고 무책임한 이사회 운영 및 의결을 제어할 안전장치의 일부로 보는 것이다.

또, “사내 감사실의 경우, 인사권자 휘하에 있기에 기관의 부정과 비리, 경영을 견제하기 어렵다”며 “노동이사제의 목적인 투명한 경영을 위해서는 노동이사에게 견제와 감시를 위한 감사청구의 권한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안건 부의나 감사청구의 남발을 우려하는 목소리에 대해서는 “제도적으로 남발을 막을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동자의 직접선거를 통해 노동이사가 선출되는 만큼, 노동의 경영참여의 목적인 노사상생과 새로운 노사관계 문화 조성, 의사결정과정의 투명성 확보에 대해 노동이사에게 거는 기대 역시 남다르다. 이러한 기대와 목적으로 볼 때 노동이사의 역할과 지위, 도입목적에 맞는 권한이 필요하다는 것이 서울시 투자출연기관 노동이사 협의회(서노이협)의 입장이다.

노동자이사제 2.0은
노동이사제를 구원할 수 있을까?

노동이사제 개선 요구에 발맞춰 서울시는 지난 2월 3일, ‘노동자이사제 2.0’을 발표했다. 서울시는 ‘노동자이사제 2.0’을 “노동자의 경영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시작해 안착시켜 온 ‘서울형 노동자이사제’를 한 단계 진화하는 내용”이라며 “‘노동자이사제 2.0’의 핵심은 노동이사의 권한과 책임을 강화하고 제도를 보다 널리 확산하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노동자이사제 2.0’은 ▲노동이사제 발전위원회 구성 및 운영 ▲노동이사의 권한 및 책임 강화 ▲노동이사의 활동 및 역량 강화 ▲서울형 노동이사제의 전국 및 아시아 확산 유도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서울시가 제시한 노동이사제 발전위원회는 국내 노동이사 네트워크의 구심점 역할을 할 예정이다. 노동이사제 발전위원회는 현직 지방공공기관 노동이사 5인과 노·사 대표 2인, 담당 공무원 1인, 외부전문가 4인 등 위원장을 포함해 15인 이내로 구성될 예정이다. 노동이사제 발전위원회에서는 노동이사제의 발전방안을 논의하고 서울형 모델의 전파와 홍보, 타 기관 정책 자문 등의 역할을 할 계획이다. 서울시는 서울시 노사민정협의회 산하 위원회로 노동이사제 발전위원회를 설립할 방침이다.

또 노동이사의 권한을 강화해 노동이사에게 안건 부의권과 정보 열람권을 부여한다. 한편 노동이사의 책임 역시 강화된다. 노동이사의 직권면직 근거를 조례에 명시하고 활동보고서 작성과 보고회 개최 의무 역시 새롭게 부과할 계획이다. 이와 더불어 인권 및 윤리경영, 직장 내 괴롭힘, 성평등처럼 노동이사의 역할과 적합한 직무에 노동이사를 도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예정이다. 동시에 관련 법규, 갈등조정, 이사회 운영기준 등 역할 수행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교육 프로그램 역시 제공한다.

이번 서울시의 ‘노동자이사제 2.0’에서는 그동안 제기됐던 노동이사제의 문제점이 어느 정도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노동이사의 역량 개발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운영과 노동이사의 권한 강화 부분에서 그렇다.

그러나 서울시가 발표한 ‘노동자이사제 2.0’에는 현장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꼽는 노동이사와 노동조합의 관계 문제에 대한 해법이 빠져있다. 노동이사와 노동조합의 관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노동이사의 권한을 강화해도 한쪽 바퀴가 큰 자전거처럼 제대로 굴러갈 수 없다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이다. 서울시가 발표한 ‘노동자이사제 2.0’이 노동이사제의 구원이 될 수 있을지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