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인간화, 노동의 참여로부터
노동의 인간화, 노동의 참여로부터
  • 임동우 기자
  • 승인 2020.04.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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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이사제가 참여의 전부는 아냐
노동이 참여할 때 민주주의 성숙한다

커버스토리 ⑥ 노동의 참여가 갖는 의의

노동, 참여를 돌아보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의 사회적 위치는 어디쯤일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만 하거나 일터를 벗어나야만 비로소 시민권을 보장받는 존재는 아닐까? 자신이 일하는 현장을 가장 잘 알지만 일터에서 이뤄지는 온갖 의사결정에서는 배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부분의 기업에서 의사결정은 소수의 수중에 집중되고, 신속한 의사결정, 경영의 효율성 같은 논리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런데 현장의 목소리, 노동이 배제된 의사결정의 결과는 그리 신속하지도 않고 효율성은 더더욱 떨어진다. 다수가 배제된 의사결정은 사회적 갈등을 잉태하고, 기업의 생존을 위해 노동자들을 구조조정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갈등이 폭발해 해결되지 못한 채 막대한 시간과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는 일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후적인 대응에만 머물렀던 노동자가 기업의 의사를 결정하고 나아가 일터를 개선하는 데 주체로서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노동의 참여’의 의미를 짚어본다.

87년 민주화항쟁 이후 한국사회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정치적 변화를 일궈내긴 했으나, 이러한 열망이 경제와 산업 분야까지 닿진 못했다. 서울시 노동이사제의 시행으로 노동의 참여가 확장되긴 했으나, 이를 산업 전반에 정착시키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고 노동이 온전히 참여의 주체가 될 수 있을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왜 노동은 참여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노동의 참여가 주는 의의는 무엇일까?

직장 내 민주화,
현장의 목소리로 시작된다

2020년 2월 초, 코로나19가 발발했을 당시 서울시는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에게 역에서 마스크를 나눠주라는 지침을 전달했고, 직원들은 지침을 이행했다. 얼마 후 서울시는 마스크 공급 대상을 홈리스 피플을 포함한 모든 이들로 확장시키고, 마스크를 받는 이들의 신분을 확인하라는 추가 지침을 전달했다. 이에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은 코로나19 확산 추세에 따라 전염병으로부터의 보호와 서울교통공사에서 감염이 발생했을 경우 지하철 마비로 이어지는 우려 등 이유로 추가적인 지침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구비해뒀던 마스크 물량을 기존대로 나눠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당시 현장 노동자들의 문제제기와 노동자의 건강권 측면을 고려해 경영진과 이야기 나눴던 박희석 서울교통공사 노동이사는 “이러한 문제는 현장에 있는 사람들만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례는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가 현장을 쉽게 간과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앞서 노동이사제를 통해 현재 노동의 의사결정 참여가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봤다. 노동이사제는 현장을 가장 잘 아는 노동이 기업 또는 기관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한 방법으로서 의의를 갖지만, 노동의 참여가 제도적으로 보장된 독일이나 스웨덴에 비한다면 아직 걸음마를 막 뗀 수준이다. 더구나 지자체장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추진하는 서울시의 산하기관들에 이제 막 도입됐을 뿐 다른 지역이나 민간기업으로 확산되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

상황이 이렇다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 서울교통공사의 마스크 배분 사례에서처럼 노동이사제가 도입되어 노동이사가 활동하고 있는 곳에서조차 의사결정에서 현장이 간과되기 일쑤다. 현장이 배제된 의사결정은 겉보기에는 신속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갈등 요소를 내포할 수밖에 없고, 갈등을 해소하는 데에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한다. 노동자들의 창의성이 발휘되는 신명나는 일터를 만드는 것은 더더욱 요원한 일이다.

그렇다고 노동자 개인이 기업의 의사결정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쉽지도 않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을 뿐만 아니라 문제제기를 해도 바뀌는 게 없는 조직문화 속에서 참고 피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조직화된 목소리로서 노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장의 목소리를 조직하고, 조직된 목소리로 현장을 바꿔 나갈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이사제가 제도화돼 있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가능한 영역에서 노동조합의 힘으로 현장을 바꿔나가는 것이 가능하다. 예컨대 법적으로 분기마다 열게 돼 있는 노사협의회를 통한 개선도 가능할 것이고, 노동조합의 힘이 보다 강력하다면 산업안전보건위원회 같은 각종 노사공동위원회를 통한 개선도 가능하다. 노동조합의 이런 활동을 통해 노동이사제 같은 의사결정 참여의 길을 열 수도 있고, 산업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 노동이 참여하는 길을 노동이사제라는 형식에 가두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노동의 인간화’

‘노동의 인간화’라는 말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건 1970년대 북유럽국가들로부터다. 노동자의 동선·작업범위 등을 표준화해 생산량만을 높이고자 했던 테일러주의적 작업환경은 자율적인 노동력을 통제하면서 노동의 질보다는 양을 중시했다. 그 결과로 노동자의 노동력은 상품으로 취급받게 됐으며, 노동이 가진 인간성은 점차 사라지게 됐다. 이후 노동이 가진 인간성을 회복하자는 데서 출발한 대안이 ‘노동의 인간화’였다.

복지국가로 잘 알려진 스웨덴의 경우 사용자에 의해 노동의 인간화 프로젝트가 추진됐다. 이는 결근과 이직, 파업 등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으로부터 시작된 결정이었다. 노사공동의 프로젝트 외에도 노동조합 자체에서 다층적 공동결정을 위한 프로젝트와 연대노동정책 시행을 병행하면서 기존의 문제점을 개선할 수 있었다.

독일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산업별로 강력하게 조직된 노동조합운동을 통해 독일 사회·경제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었고, 노동자 대표가 법으로 규정된 공동결정기관을 통해 기업 내 전반적인 의사결정에 사용자와 동등한 지분을 갖고 참여하는 공동결정제도를 시행하면서 노동의 인간화에 한층 가까이 다가갔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인간화’는 노동이 세계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목표이기도 하다. 대기업에서 드러나는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그동안 노동은 분배를 통한 단기적 이익을 누리는 대가로 노동배제적인 소수지배구조에 대해 일정 부분 침묵하면서 노동이 스스로 참여주체가 될 수 있는 권한을 포기한 측면이 있다. 박준식 한림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연구를 통해 “노동운동의 참여적 지향은 작업현장에서부터 시작하여 노동조합이 기반하고 있는 기업조직, 그리고 더 나아가 지역공동체뿐 아니라 전체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뤄지는 제반의사결정에 대한 적극적 참여로써 노동의 입지를 강화해나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준식 교수의 지적처럼 노동이 기업을 비롯한 사회의 각 영역에서 주체적으로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그에 따른 책임과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때, 노동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은 물론 산업 민주주의 혹은 경제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나아가 사회의 민주주의가 한층 성숙해지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