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박싱] 이 주의 키워드 : 컵라면
[언박싱] 이 주의 키워드 : 컵라면
  • 박완순 기자
  • 승인 2020.05.03 15:47
  • 수정 2020.05.03 15: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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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트 : #구의역김군 #김용균 #이천물류창고화재참사 #건설노동자 #집배노동자

노동절을 보낸 5월의 초입입니다. 5월의 초입에 열어보는 키워드는 ‘컵라면’입니다. 130주년을 맞은 2020년 노동절의 거리는 꽤나 한산했습니다. 황금연휴로 서울 도심에는 띄엄띄엄 시민들과 차들이 지나갔고, 주춤은 했지만 코로나19로 많은 노동자들이 많은 깃발을 들고 광장에 모이지는 않았습니다. 광장은 크게 시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컵라면’이라는 세 음절이 들렸고, 큰 광장을 시끄럽지 않게 메워버렸습니다. 갑작스레 찾아온 초여름 더위로 갈증이 잦아들지 않았었는데, 목이 더 메었습니다.

구의역 김군의 유품, 가방 속에 '컵라면'과 '작업 장비'가 있었다. ⓒ 페이스북 페이지 '구의역 스크린도어 9-4 승강장' 사진 갈무리
구의역 김군의 유품, 가방 속에 '컵라면'과 '작업 장비'가 있었다. ⓒ 페이스북 페이지 '구의역 스크린도어 9-4 승강장' 사진 갈무리

이 주의 키워드 : 컵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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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황망한 죽음이 그 중 하나입니다. 130주년 노동절을 앞두고 건설노동자 38명이 화마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비정규 하청노동자, 이주노동자입니다.

민주노총은 지난 5월 1일 서울 곳곳에서 기자회견과 공동행동을 열었습니다. 코로나19로 대규모 집회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 곳곳에서 ‘이천 물류창고 화재 참사’ 이야기는 계속 나왔습니다.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서 일해 목숨을 잃었던 이천의 물류창고 건설노동자들을 애도하기 위해서였기도, 그 상황이 남일 같지 않은 비정규 하청노동자 자신들의 슬픔을 나누기 위해서였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컵라면’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참 애달픈 음식이랍니다. 구의역 김군, 태안화력발전소 청년노동자 김용균의 유품에 컵라면이 있었습니다. 끼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정도로 바빠서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먹어야 할 밥과 국과 반찬 대신 먹었던 컵라면입니다. 그마저도 몇 번은 먹지 못해 사물함이나 가방에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천 물류창고 화재참사로 목숨을 잃은 건설노동자의 마지막 점심이기도 했습니다. 컵라면을 먹고 남은 국물에 찬밥을 말아먹었습니다. 점심을 먹은 지 얼마 안 된 오후 1시 반, 화마가 그들을 덮쳤습니다.

그렇게 130주년을 맞은 2020년 노동절에 노동자들은 도심 곳곳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이천 물류창고 화재 참사의 슬픔을 나눴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번 노동절의 주요한 외침과도 맞닿아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발생한 경제위기가 고용위기로 번지고 있는데, 함께 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자는 겁니다.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는 달라야 한다는 겁니다. 경제 위기가 회복될 쯤에는 기업이 살고 노동자는 죽는다는 엄혹한 현실을 반복하지 말자는 겁니다. ‘함께 살자’는 목소리였습니다.

비용 절감으로 만들어진 위험은 ‘컵라면’을 먹는 비정규 하청노동자에게 배달됐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영위기 해법으로 비용 절감을, 비용 절감을 위해 노동자들에게 해고가 배달되고 있습니다.

노동절이 지났고 다음 날 저녁 TV를 켰습니다. K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시사기획 창’이 방영 중이었습니다. 그날 회차의 제목은 ‘살인노동 2부-죽음의 숫자’였습니다. 집배원 과로사 문제를 다뤘습니다. 계속된 문제였고 작년 여름에는 집배노동자들의 압도적 찬성으로 총파업을 진행할 예정이기도 했었습니다. 방송에서 우정사업본부는 노동 환경의 문제라기보다는 개별 노동자의 문제인 것처럼 이야기했습니다.

방송이 말미로 가는 중 노동절에 들었던 ‘컵라면’이 다시 등장했습니다. 땀 흘리면 우편물을 분류하던 집배노동자는 식당에 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컵라면을 먹었습니다. 왜 컵라면을 먹냐고 물었더니 시간이 없어서, 일이 너무 많아 밥 먹을 시간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노동절 도심 곳곳의 집회 중 목격했던 별난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더 함께 살 수 있는 현실은 너무나 먼 미래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날 낮 12시에는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노동자와 학생들이 연대 기자회견를 열었습니다. 코로나19로 취업시장이 얼어붙고 아르바이트 노동시장마저 얼어붙어 청년들도 힘겹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코로나19로 발생한 노동의 문제는 학생이든 노동자든 동일하게 다가갔습니다. 연대 기자회견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기자회견을 취재 중이었는데, 뒤가 시끌시끌했습니다. 유튜버 무리였습니다. 이동식 삼각대에 핸드폰을 거치하고 저마다 이 기자회견을 찍으며 실시간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명의 말이 귀에 들어왔습니다.

“분명히 딱 보기에 노동할 나이가 아닌데, 학교에서 공부할 나이인데 나와서 노동자들과 기자회견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민노총과 연관이...”

노동은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노동자의 이야기여야만 한다는 생각입니다. 노동은 누구나의 이야기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한 유튜버의 별난 생각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상당히 반길 생각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노동이 누구나의 이야기가 아닌 이상 ‘함께 살자’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컵라면’으로 밥 먹을 시간마저 줄이며 노동하는 사람이 있나봅니다.

물론 노동이 누구나의 이야기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의외로 그곳을 지나던 많은 부모들이 어린 자식의 손을 잡고 잠시 멈춰서 기자회견을, 공동행동을 봤습니다. 어려서 어려웠을 내용을 최대한 쉬운 말로 설명하면서 말입니다. ‘컵라면’을 먹어봤던 부모가 ‘컵라면’은 먹고 싶을 때 먹는 음식이라고 알려주는 내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