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동우의 부감쇼트] 글렌 굴드와 퇴고하는 삶
[임동우의 부감쇼트] 글렌 굴드와 퇴고하는 삶
  • 임동우 기자
  • 승인 2020.05.07 17:13
  • 수정 2020.05.07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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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말로 버즈 아이 뷰 쇼트(bird’s eye view shot).
보통에서 벗어난 시각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싶습니다.
임동우 기자
dwlim@laborplus.co.kr

어느 날은 글을 쓰려 앉았다가 머릿속이 백지가 돼 당황스러웠다. 문장을 쓰고 지우길 수십 번 반복하다가 결국 머리를 쥐어뜯었다. 조지 오웰이 글을 쓰는 동기를 ‘자기중심적 욕구, 심미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등 네 가지로 분류했으니, 그 네 가지 중 일말의 선택마저 소각되어버린 탓이라 짐작할 뿐이다.

외출마저 고민하는 요즘, 글쓰기는 여전히 더디다. 긴 연휴, 무료한 마음을 환기하고자 창문을 여니 계절이 바뀌려는지 피부에 닿는 바람이 부드러웠다. 빨래가 다 돌았다고 경쾌한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세탁기에는 하얀 이불이 들어있고, 한파를 막던 외투는 때늦은 동면(冬眠)에 들어갔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을 정리한들 평온은 일시적이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무료한 일상에 한계를 느낄 때, 나는 글렌 굴드를 듣는다. 외부 접촉을 극도로 꺼렸던 천재 피아니스트. 그는 ‘바흐 : 골드베르크 변주곡’으로 유명하다. ‘병원은 병균창고’라며 아파도 외출을 금기시 했던 그가 CBS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녹음을 위해 스튜디오에 등장했을 때의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1955년, 6월의 날씨에도 코트, 머플러, 베레모, 장갑까지 착용하고 물과 알약까지 직접 공수해온 그는 ‘천재는 괴짜’라는 등식을 기꺼이 성립시켰다. 기존 피아노 의자를 거부하고 자신이 준비해온 작은 의자를 고집하며 피아노로 빨려 들어갈 듯 몸을 구부리고 연주에 몰입하던 글렌 굴드. 그는 연주 중 흥얼거리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녹음 기술자들이 그 허밍을 지우려 고생했다는 건 여담이다. 그렇게 탄생한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역사적인 음반 중 하나가 됐다. 글렌 굴드의 음악은 연주자의 음악이라기보다 ‘수행자’의 음악이라고 말할 정도로 섬세하고 편집증적이다.

명성을 얻은 굴렌 굴드가 무대 연주를 거부하고 은둔 생활에 들어간 건 1964년, 그가 32살 되던 해의 일이다. 녹음 활동이 연주자가 최상의 연주를 보여줄 수 있는 활동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선택한 길이었다. “육상 선수의 목표는 0분 0초에 주어진 거리를 달리는 것”이라 말하던 글렌 굴드의 작업 방식은 초고를 끊임없이 퇴고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지난한 하루하루를 삶을 완성시키기 위한 퇴고라 생각하기로 한다. 엘레베이터 버튼 위 덧씌워진 구리 필름과 누구도 잡지 않는 지하철 손잡이, 마스크 쓴 사람들을 보면서 1955년 6월 날 다리 짧은 의자에 앉아 연주하는 괴짜를 떠올리곤, 세상과 단절된 CCTV 철탑 위에서 300일 넘게 고공농성을 벌이는 해고노동자를 겹쳐본다. 그는 어떤 삶을 완성시키기 위해 외로운 퇴고를 반복하고 있을까. 다시 의자에 앉아 한 단어씩 써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