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과 몸으로 ‘진짜’ 부딪쳐라!
세상과 몸으로 ‘진짜’ 부딪쳐라!
  • 김종휘 하자센터 기획부장
  • 승인 2008.10.02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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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자발적 성장 키워드 ‘경험’
하자센터 기획부장

지난번 글의 요지는 이랬었지요. 청소년들의 촛불집회는 그들의 자발적 생각과 행동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자발성을 어떻게 계속 발휘할 수 있게 할 것인가 하는 숙제를 어른들이 갖게 되었다고요. 덧붙이면 그 자발성이 청소년들의 자발적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 청소년들은 자신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스스로 책임지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발적 성장이라는 것이 좋은 조건을 다 갖춰주고 좋은 정보와 지식을 듬뿍 안겨주고는 “자, 마음대로 해봐!”라고 해서 발현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지요. 그렇게 하면 도리어 자발성은 기가 죽거나 무기력해질 겁니다.

똑같이 사는 애들에게 뭘 기대하나?

요컨대 청소년의 자발적 성장을 권장하고 촉진하려면 적절한 환경이 주어져야 하는데, 그 환경에는 반드시 어떤 제약과 한계들이 들어가 있어야 해요. 여기서 문제가 또 있습니다. 그 제약과 한계라는 것이 인위적이면 효과가 없다는 점이에요.

예를 들어 부모가 시켜서 청소년이 뭔가를 할 때, 잘 하면 상을 주고 못 하면 벌을 주는 경우가 있지요. 보통 벌이라는 것이 노는 시간을 줄인다거나 용돈을 깎는다든가 합니다. 바로 이런 것들이 인위적인 제약이고 한계지요. 청소년들의 자발성을 바라고 마련한 어떤 환경 안의 필수적인 제약과 한계는 진짜여야 합니다. 여기서 진짜라는 말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진짜 제약과 한계라는 뜻이에요.

결론부터 말하면, 청소년의 자발적 성장은 이 세상의 여러 제약과 한계를 적절하게 경험하는 환경에서 잘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잘 기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어른들의 몫이고 교육의 사명이지요.

이 연재 글에서 거듭 강조했지만, 현재의 청소년들은 그 어느 시대의 청소년들보다 더 치명적인 입시지옥의 우물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더 깊게 대중 매체(우물 안에 있는 TV, 인터넷, 핸드폰 등)의 유혹을 받으며 엄청난 소비를 하는 십대 소비자가 되어 있지요. 그러다보니 정작 이 세상살이의 다양한 경험을 직접 해보는 데에서는 제외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고생해서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시행착오를 겪고, 또 다른 해법을 시도하는 그런 경험이 너무 없어진 겁니다. 2007년 7월2일자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가수 박진영 씨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학교에서 판에 박힌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엔 학원수업과 과외를 받는, 모두가 똑같이 사는 우리 애들에게서 뭘 기대하겠나? 지금 교육은 아이들의 창의력을 말살하고 있다. 나보고 최소한 예술 부문에서 미래를 향해 투자하라고 한다면, 학교가 아니라 소년원을 선택하겠다.”

비단 예술 부문만이 아니지요. 기업들도 창의적 인재가 절실하다는 것을 실감할수록 박진영 씨와 같은 이유로 “똑같이 사는 우리 애들에게 뭘 기대하겠나?”라고 반문할 겁니다.  

낯선 이와의 외지 여행을 경험하라

해외 사례를 보지요. <나는 걷는다>(2003, 효형, 총 3권)라는 책을 낸 프랑스인 베르나르 올리비에 씨가 한 시도입니다. 이 책의 인세는 그가 2000년에 설립한 쇠이유 협회(Seuil, 문턱이라는 뜻의 프랑스어)의 운영비로 쓰인답니다.

이 협회(www.assoseuil.org)는 프랑스 법원과 협력해서 소년원이나 감옥에 간 청소년을 어른 한 명과 2인1조로 짝 지어서 말이 안 통하는 인접 국가를 4개월 동안 도보여행을 하도록 만드는 일을 하죠. 그 과정을 통과하는 청소년들은 석방해 재활 기회를 준다고 하네요.

그가 쇠이유 협회를 설립한 나이가 62세입니다. 청소년 한 명과 짝을 이뤄 도보여행을 하는 어른들 역시 그 안팎의 연령이겠지요. 우리네 현실에선 알지도 못하는 나이든 어른과 4개월을 외국에 나가서 최소 1500km 이상 걸으라고 하면, 그 청소년이 비록 빨리 감옥에서 나가고 싶다는 이유가 강렬하다 해도 속으로는 매우 싫어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걷기 시작한다면, 그 청소년의 인생은 180도 바뀔 테지요. 모르는 어른과 같이 낯선 곳을 걷고 또 걷습니다. 그렇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지납니다. 아마 원수지간이었다 해도 그동안 서로 몸을 부대끼면서 웃고 울었겠지요.

그러면서 아이들은 어느새 세상을 보는 시야와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를 완전히 재구성하게 될 겁니다. 이런 것이 진짜 제약과 한계입니다. 그 안에서 얻는 경험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자발적 학습이나 성장을 시작한다는 거지요.  

우리 사회에서도 비슷한 시도들이 꾸준히 생겨나고 있습니다. 입시 중심의 공교육·사교육 체제에서는 수학여행 가기도 부담스럽기에 주로 대안학교들이 먼저 했지요. 일주일 간 걸어서 지리산을 종주하고, 서울에서 동해 바다까지 걷고, 자전거로 국토횡단을 하는 등등. 해보면 십대들의 몸과 마음이 두드러지게 변합니다. 나와 다른 몸들과 고생하고 부대끼면서 흘린 눈물, 그것은 그 어떤 교육 프로그램도 해주지 못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