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모의 노동일기] 서울살이는 힘들어
[손광모의 노동일기] 서울살이는 힘들어
  • 손광모 기자
  • 승인 2020.05.11 14:30
  • 수정 2020.05.11 14: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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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노동을 글로 적습니다. 노동이 글이 되는 순간 노동자의 삶은 충만해진다고 믿습니다. 당신의 노동도 글로 담고 싶습니다. 우리 함께, 살고 싶습니다.

“부자에게 ‘이동’이 빈자에게는 ‘여행’인 경우가 있다.”

몇 해 전 내 휴대폰에 남긴 글귀다. 내 고향 부산은 들쑥날쑥한 ‘고바위’만큼이나 다채로운 얼굴을 가진 도시다. 아름다운 바다와 성대한 영화제, 많은 먹거리는 타지 사람에게 부산을 화려한 도시로 기억하게 한다.

반면, 고개의 한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외부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선’이 보인다. 영화 <기생충>(2019)에서 그 ‘선’은 ‘냄새’로 표현된 적 있다.

외지인과 마찬가지로 모든 부산사람들은 아름다운 바다와 영화제와 맛있는 음식을 즐긴다. 하지만 같은 부산사람이라도 개별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은 분명 차이가 난다. 위의 글귀는 부산에서 ‘가장 높지만 가장 낮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과 부산에서 ‘가장 낮지만 가장 높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하루에 다녀온 감상이었다. 공간의 차이로 ‘빈부격차’를 체감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차이는 단순히 ‘돈의 크기’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미국에서 진행된 한 연구결과를 보면, 슬럼지역에 사는 흑인들은 ‘착즙 오렌지 주스’보다 설탕이 과하게 들어간 ‘오렌지 드링크’를 더 맛있게 느낀다고 한다. 몸에 좋은 건강식을 가난한 사람의 몸은 거부하는 격이다. 또한, 부유한 이들은 88%가 매일 30분 이상씩 책을 읽지만, 가난한 이들은 2%만 그랬다.(《인생을 바꾸는 부자습관》(2017), 토마스 콜리, 봄봄스토리)

빈부격차는 ‘입맛’부터 ‘생활습관’까지 차이를 벌린다. 그 이유는 ‘경험의 질’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행위라도 빈부격차에 따라 느낄 수 있는 가치는 다르다. 가령, 부유한 사람에게 백화점은 다소 비싼 생활용품을 사는 곳인 반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관광지이거나 일터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자의 일상적인 일은 빈자에게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반대로 빈자에게 일상적인 일이 부자에게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지기도 한다.

‘부산 촌놈’이 주민등록상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주민이 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는 연희동 주민으로 치렀다. 이후 몇 해 전 썼던 글귀가 갑자기 기억난 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민등록상 연희동 주민이 되면서 투표라는 행위, 정치적 참여의 깊이가 한 없이 가벼워졌다고 느꼈다. 내가 사는 원룸의 크기보다 3배는 더 큰 ‘차고’를 가진 이들과 나의 한 표가 같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같은 ‘연희동 주민’으로서 전두환의 1표가 나의 1표와 정말 같을까.

우리사회의 가장 낮은 사람들은 ‘거주민’일 수는 있을지언정 ‘시민’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짐멜(Georg Simmel)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늘 와서 내일 묵는 이방인”일 뿐이다. 한국이라는 같은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배제되는 사람이다. 이들은 본인이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을 ‘이용’할 수 없고, ‘여행’하는 자들이다.

한 때, 본인의 이해와 상반되는 투표를 하거나, 아예 관심이 없다는 사람을 답답하게 바라본 적이 있었다. 궂은 일을 하면서도 ‘부자들을 대변하는 당’을 찍는 노년층이나 ‘그놈이 그놈’이라고 처음부터 치부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을 얼마간 이해한다.

참여가 중요하다. 하지만 참여라는 행위의 깊이는 그가 사는 방의 크기에 비례한다. 그가 가진 이권만큼 참여의 가치가 결정된다. 내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참여는 귀찮은 일일 뿐이다. 모두가 ‘민주 세력’의 승리라고 자축하는 이번 선거 결과가 나에게는 유난히도 씁쓸한 뒷맛을 남기게 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