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순의 얼글] 올여름 덥다는 말은 삼키겠다
[박완순의 얼글] 올여름 덥다는 말은 삼키겠다
  • 박완순 기자
  • 승인 2020.05.15 00:00
  • 수정 2020.07.07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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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순의 얼글] 얼굴이 있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사람의 얼굴을 한 글을 쓰고 싶습니다.

대학시절 한때 8월 1일부터 15일까지 콜라를 마시지 않았다. 815통일대회를 맞아 미제국주의가 만든 물품을 소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65%는 진심이었고, 나머지 35%는 함께 815통일주간을 준비했던 동기들, 선후배들과 어떤 추억을 즐겁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물론 통일주간이 끝나고 콜라를 벌컥벌컥 마셨다. 뜨거운 여름 아주 차갑고 목을 톡 쏘는 검은 단물의 환희는 엄청나니까.(생각해보면 나이키 운동화도 잘 신고 다녔다, 통일주간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자면 나름대로 기억하기 위한 의식, 세레모니였다. 나의 행동을 제한하면서 몸에 각인시키는 것은 상당히 효과적인 기억 방법이기 때문이다.(그래서 대학시절 그때가 아주 잘 기억나고, 그 때의 의미도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다.) 뭔가 인간적이지 않고 동물적 본능에 기대는 것 같지 않은지 살짝 고민도 되지만, 내가 대학시절 했던 그 행동이 방법적으로 좀 과도해서 그렇지 인간은 무엇인가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 몸을 쓴다. 백문불여일견이라는 선조들의 말씀도 있고, 실제로 인지과학적으로도 단순히 외우는 것보다 몸의 느낌과 연관해 머리에 저장하는 것이 구체적이고 오랜 기억으로 남는다고도 한다. 그래서 정말 잊고 싶지 않으면 이런 식의 몸으로 각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익스프레스 화재참사 블랙박스 영상이 공개됐다. 한익스프레스 냉동물류창고 건축 현장 앞에 세워졌던 차량 블랙박스에 녹화된 영상이다. 한 노동자가 네모난 검은 입구에서 뛰쳐나오며 119를 부르라하고 소화기를 가져오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보인다.(실제로는 기록이 그렇게 됐을 것인데, 차마 소리를 들으며 영상까지 보기에는 심적으로 힘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화염이 네모난 검은 입구 밖으로 혀를 날름거리며 건물 안에서 밖으로 화마를 옮겼다. 사람은 나오지 못했다. 38명이 죽었다. 10명이 부상당했다. 얼마나 뜨겁고 답답했을까.

지난 12일 한익스프레스 화재참사를 비롯한 반복된 산재사망 사고의 원인을 진단하는 긴급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서 많이 나온 말은 “벌써 잊히고 있다”였다. 잊힘은 곧, 참사의 반복으로 이어진다. 토론회 참가자들은 “이전의 많은 참사들도 죽음에 애통해 했고, 카메라 플래쉬 세례를 받고, 사고 원인과 대책이 발표되면 그럴수록 여론의 관심은 희미해졌다”며 “그래서 대책이 현장에서 작동되는지, 책임자는 마땅한 벌을 받았는지 확인되지 않고 그 확인의 목소리는 소수의 목소리가 되고 재발방지의 밑거름이 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은 게, 무슨 참사만 나면 ‘반복된, 예견된’이라는 수식어를 반복해서 예견할 수 있는 정도다.

몸으로 기억한 건 쉽게 잊히지 않는다는데, 뭐라도 해야겠다. 개인적 세레모니를 하나 하려고 한다. 그 블랙박스 영상을 봤을 때, ‘얼마나 뜨겁고 답답했을지’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이번 여름은 그 영상을 떠올리며 덥다는 말을 삼켜보려 한다. 정말 잊고 싶지 않으면 이런 식의 몸으로 각인하는 것도 감히 남에게 추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