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 탁 / 탁 / 탁’
오전 10시 30분. 흰 지팡이를 쥔 시각장애인 김성곤 씨가 수유동 집을 나선다. 성북구 건강가정·다문화가족지원센터로 출근하는 길이다. 근무 시간은 오후 12시부터 3시까지다. 스마트폰 지도 애플리케이션 기준 30분 내외면 도착할 거리지만, 90분 전 출근길에 올랐다.
“저 버스가 몇 번인가요?”
김성곤 씨가 물었다. 기자와 대화하느라 버스에 집중하지 못한 탓이다. 평소에는 어떻게 버스를 구별 하느냐는 질문에, 버스정류장 음성안내와 함께 조금씩 다른 버스 외형으로 구별한다고 답했다.
“먼저 음성 안내를 들은 다음 크기로 감지한다. 이 도로에서 코너를 돌아 들어오는 버스는 1119번 하고 1218번 두 대밖에 없다. 조금 크다는 느낌이 드는 1218번 버스를 타면 된다.”
김성곤 씨는 후천적 시각장애인이다. 장애인복지법상 중증장애인에 해당한다. 왼쪽은 완전히 실명한 상태고, 오른쪽 눈으로 희미하게 사물의 형태와 색을 구별한다. 20여 년 전 발생한 녹내장으로 시력이 급격히 저하됐다. 시야는 차츰 좁아지다 어느 순간 눈앞이 “까만 밤처럼” 변했다. ‘완전 실명’ 시각장애인이었던 그는, 2019년 받은 오른쪽 눈 수술로 아주 조금씩 빛을 받아들이고 있다.
1218번 버스에서 내린 김성곤 씨는 144번 버스를 기다린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 버스가 정차했다. 그냥 보내려고 했으나, 버스 기사가 기다려준 덕에 승차할 수 있었다. 김성곤 씨는 “평상시라면 타지 않았을 거다. 괜히 달려들다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조금 기다려도 다음 버스를 타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신체적 장애인에게는 지하철이 비교적 편한 대중교통수단으로 알려져 있다. 김성곤 씨에게 버스를 이용하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계단이 너무 많아서 지하철을 싫어한다”고 답했다.
“지하철이 편하다고 해도 사람마다 다르다. 에스컬레이터,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찾아다니는 것도 일이다. 보통 계단을 이용해야 하는데, 내려가는 길은 무섭다. 지팡이로 짚어도 계단 수를 잘못 세는 경우가 있다. 발을 헛디디면 ‘퍽’ 고꾸라진다. 자주 오가는 지하철역도 마찬가지다. 재활훈련 하러 중계역을 자주 갔는데, 계단이 많은 곳이라서 엎어진 적이 많다.”
김성곤 씨에 따르면, 대다수 시각장애인이 지하철 출구를 찾기 위해서 계단 수와 하차 번호판을 외우는 건 물론이고, 보폭도 일정하게 유지해서 거리를 계산한다. 지하철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안내유도기가 설치돼 있지만, 시각장애인들은 고장이거나 불량인 경우가 적지 않다고 호소한다. 국토교통부는 2019년 10월 기준 대중교통에 설치된 시각장애인 유도안내 설비 현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하철보다 무서운 건 갑자기 생겨난 ‘일시적 방해물’이다. 김성곤 씨는 인도 위 방해물로 인한 출퇴근길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특히 인도에 차를 안 세웠으면 한다. 얼마 전에 트렁크를 열어놓은 승합차에 부딪혀서 머리를 다쳤다. 지팡이에 걸리는 물체는 높낮이를 구별할 수 있지만, 자동차는 헷갈릴 때가 많다. 특히 단차가 큰 트럭 같은 경우, 바퀴 윗부분이 떠 있으니까 바닥만 훑는 지팡이로는 감지하기 어렵다.”
김성곤 씨의 출근길은 언제나 비장애인의 그것보다 위험하다. 방해물에 몸을 다치고, 배려 없는 행동에 상처 받기도 한다. 비오는 날이면 혼자 다니기가 버거울 정도다. 그럼에도 평일마다 나서는 출근길을 오래 걷길 바라고 있다.
세상과 단절되니, 안 좋은 생각만 가득했다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한 김성곤 씨는 시각장애를 갖기 전 컴퓨터 강사로 일했다. Windows보다 DOS 사용이 더 익숙했던 때다. 컴퓨터 붐이 일기 시작한 90년대 중후반엔 컴퓨터 학습 수요가 많았다.
한창 왕성하게 활동하던 31살. 시력이 급격하게 저하됐다. 갑자기 찾아온 시각장애를 받아들이기가 죽기보다 어려웠다. 시각장애가 왔을 때 “힘드니까 다 포기하게 되고, 갑자기 앞이 잘 안 보이니 막막하고 잘 안 살아”졌다. 처음 시각장애인이 된 1년간 장애를 받아들이지 못한 김성곤 씨는 집에만 머물렀다. 모든 일상이 정지되니 무기력함에 심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하는 것 없이 잠만 자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는 생각”에 며칠간 모아온 수면제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죽지 않고 사흘 만에 병원에서 깨어났다.
‘안 좋은 생각’만 가득했던 김성곤 씨의 삶은 재활교육으로 점차 변했다. 성북구와 노원구 시각장애인복지관을 다니면서 한국사회에 시각장애인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비장애인일 때는 보지 못했던 존재들이다.
“시각장애인복지관을 다니며 알게 됐다. 이 세상에는 시각장애인만의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재활교육을 받고, 다른 장애인도 만나고, 친구도 사귀었다. ‘그 세상’에서 살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지관을 다니며 장애를 받아들인 김성곤 씨는 다시 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다. 채용사이트 ‘워크넷’을 이용해 이력서를 넣었다. “운이 좋았는지” 지원한 이력서가 모두 통과됐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노인복지관을 택했다. 일반적으로 노인반 수업은 학생·청년반보다 수업이 느리게 진행된다. 시력이 나빠도 모니터를 응시하면 화면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컴퓨터 강사로 지낸 지 12년, 악화된 시력에 모니터 화면이 보이지 않자 일터를 떠났다.
우리나라는 2006년 8월 통과된 의료법 82조의 1항에 근거, 안마사 자격요건을 시각장애인으로 한정한다. 이른바 ‘안마업 독점권’을 시각장애인에게 부여해 일자리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시각장애인 일자리 정책은 안마업 이외의 분야에 진출하고자 하는 시각장애인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장애인고용공단의 2019년 보고서는 “시각장애인이 직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대한안마사협회와 안마수련원을 통한 직업 훈련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중략) 그러나 시각장애인들이 안마업 외에 직종에서 취업하기 위해 개인의 선택에 따른 직업훈련을 받을 수 있는 직업개발능력 인프라는 마련돼 있지 않다”고 밝혔다.
김성곤 씨도 “시각장애인이 갈 수 있는 일자리가 너무 제한적이다. 안마업종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여기에 침술가, 역술가, 점자 선생, 점자 번역가, 복지관 컴퓨터 선생 등이 전부인 셈”이라고 호소했다.
노동이 사라지자 김성곤 씨의 사회활동도 멈췄다. 집에 있으면 이따금 ‘안 좋은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취업을 반쯤 포기했을 무렵,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의 직업지원 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갖게 됐다. 복지관에서 자체적으로 직업상담, 취업알선 등 시각장애인의 취업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한 덕분이다.
“가축 취급 하는 건 거부합니다”
김성곤 씨가 취업한 센터에서는 맞벌이 부부 자녀 등, 돌봄이 필요한 가정의 아이를 위한 ‘아이돌봄’ 사업을 한다. 사업문의, 신청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 담당자에게 연결해주는 게 김성곤 씨의 주요업무다.
김성곤 씨는 꾸준하게 일자리를 찾아왔고, 계속 노동자로 남길 원한다. 생활고 때문은 아니다. 검소하게 지내면 무리 없이 살아갈 수 있다. 그럼에도 계속 노동하길 원하는 이유를 이렇게 얘기했다.
“돈이 전부가 아니다. 직장이 있으니 아침에 일어나서 집을 나와야만 한다. 기간제직이라 언제까지 하게 될지 모르지만, 매일 집을 나와 일하러 갈 곳이 있다는 것 자체가 좋다. 집을 나서서 사람들과 관계도 맺고, 전화 통화 하면서 이야기도 나눈다. 비록 하루 3시간 단순 업무일지라도, 일자리를 하나도 구하지 못해 집에만 있던 때보다는 훨씬 행복하다.”
김성곤 씨의 일자리는 여성가족부 지원금으로 유지된다. 지원금이 끊기면 일자리도 사라진다. 1년 단위로 재계약을 하니 내년에는 근로계약이 없을 수도 있다. 불안정한 일자리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처음에 힘들었던 전화 응대도 센터의 사업을 이해하고 숙달한 덕에 지금은 익숙하다. 이제 2년 차에 접어든 김성곤 씨는 오래 일하길 원한다. 일자리가 아닌 연금강화가 더 낫지 않은지 물었다. 김성곤 씨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했다.
“지원금만 쥐어주는 것보다 일을 하는 게 좋다. 지원을 받더라도 노동으로 얻었다는 성취감이 있으니까. 지원금만 받고 생활하라는 건, ‘너흰 그냥 집에만 있어’라는 의미로 들린다. 가축 취급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느냐.”
긴 시간 투자해야
더 많은 장애인이 출근길에 오른다
김성곤 씨는 노동을 통해 세상으로 한 발 내디뎠지만, 일자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불확실하다. 대다수 중증장애인 노동자도 김성곤 씨와 다르지 않다. 오히려 불안정한 일자리조차 갖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장애인고용공단의 2019년 장애인경제활동실태조사에 따르면, 중증장애인의 경제활동참가율은 22.6%이며 고용률은 20.9%에 그친다. 그중 비정규직이 71.6%를 차지한다.
정부는 중증장애인을 위한 일자리 정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현실과 맞지 않아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많다.
김성곤 씨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준 홍윤희 성북시각장애인복지관 자립지원과 과장은 “중증장애인의 일자리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개개인의 특성에 맞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애인이 노동시장에 유입되려면, 지금 같은 단기간의 실적 쌓기 정책으로는 불가능하다. 김성곤 씨 같은 후천적 장애인은 먼저 ‘장애수용’*이 필요하다. 그래야 일터에서도 적응을 잘할 수 있다. 단순 취업알선으로 내적인 변화를 끌어내긴 어렵다. 나와 김성곤 씨는 20년 넘게 알고 지냈다. 가족이 함께 여행을 가기도 하며 오랜 시간 서로 신뢰를 쌓으며 김성곤 씨는 변해갔다. 제대로 된 일자리 정책은 긴 시간을 투자해야만 가능하다.”
홍윤희 과장은 특히 “장애인 중 대다수(88.1%, 2017년 보건복지부)가 후천적 원인으로 장애를 가진다”며 장애인이 원래 종사하던 직종으로 돌아갈 수 있는 ‘원(元)직종 복귀’에 힘쓰지 않는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
“활용성이 낮은 각종 자격증 취득보다는 ‘원직종 복귀’가 가능한지 먼저 파악해야 한다. 장애를 갖게 된 순간부터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다. 먼저 병원과 정부 간 정보공유를 해야 한다. 병원이 장애를 판정한 직후 당사자의 정보를 정부기관에 전달하면, 기관은 당사자가 일터로 복귀할 수 있는지 직무분석을 하는 식이다. 병원-정부 간 정보공유 시스템부터 만들어야 한다.
또한, 원직종에 복귀할 수 없다면, 취업 가능한 업무를 파악해서 장애인 개별 특성에 맞는 일자리를 제공해야 한다. 장애인의 업무수행에 필요한 작업보조기기를 도입하는 등 작업장 환경 개선에 정부가 예산을 투입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은 바리스타자격증을 따도 커피숍에서 일하기 어렵다. 커피숍 직원은 주문도 받고 계산도 해야 하는데, 시각장애인을 위한 포스(POS: Point-Of-Sale) 단말기가 없기 때문이다. 민간에 위탁해 시각장애인용 음성안내 작업보조기기를 개발하는 방안을 고려해볼만하다. 장애인의 일자리를 늘리려면 정부의 과감한 투자가 필요하다.”
* 장애수용: 장애로 인해 자신이 가치절하 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의 장애를 단지 불편함이나 제한을 주는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장애수용은 개인의 자립생활에 중요한 요인으로, 장애수용 수준이 높을수록 장애를 부정적인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아 개인을 활성화 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