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인력시장에서 만난 사람들
새벽 인력시장에서 만난 사람들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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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공친 하루 그래도 ‘희망’을 기다린다


채 가시지 않은 탁한 술 내음을 풍기며
거친 말투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는 사람들.
모두 잠든 이른 새벽,  붉은 가슴까지 드러나는 낡은 작업복을 입고
버스에서 내린 한 인부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대상없는 욕설, ‘아이고 씨발’이다.
하나둘 모인 사람들이 열이 되고 스물이 되고
금세 경기 성남 복정역 근처 한 거리가 북적거리는 사람들의 얼굴로 메워진다.
하지만 오래도록 한산한 도로를 바라보며 묵묵히 ‘오야지’를 기다리는
어둠 깔린 새벽은 쉽사리 밝아오지 않는다.

 

IMF 이후 3년여 동안 모든 물가지수가 하락하는 가운데 유독 건설경기만이 지속적인 오름세를 보이며 경기침체에 따른 고용악화의 완충역할을 담당해 주었다.
그러나 올해 1~4월 중 건설수주액과 건축허가면적액은 각각 14%, 26%가 줄어들면서 성장이 눈에 띄게 둔화되고 있다. 올 하반기 건설업계가 더욱 힘들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정부의 부동산 억제정책과 계속되는 내수 부진으로 서서히 골이 깊어지고 있는 건설경기 침체는 가장 먼저 새벽시장의 일용직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있다.
경기도 성남의 대표적 인력시장인 복정역 주변, 건장한 청년들과 지친 중년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라는 예상은 여지없이 깨졌다. 새벽 네 시부터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은 비닐하우스에 일용직으로 나가는 고령의 할머니들이었다.


할머니들 사이에 섞여 줄담배를 피우고 있던 50대의 한 노동자는 처음부터 눈길조차 건네지 않았다.
“거, 할말 없으니까 저리 가쇼. 방송국이고 어디고간에 한번씩 와서 다 바꿔줄 것처럼 들이 찍어놓고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더구만.”
30년이 넘도록 이 곳에 나와 일을 해 온 미장기술자 김정수(51·가명)씨였다. 김씨는 두 시간 남짓의 긴 기다림 끝에 허름한 봉고차를 타고 사라질 때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돈 대는 사람도 없고, 불안감만
자신을 ‘오야지’라고 소개한 소형 아파트 인테리어 업체 사장 김씨(46)는 건설인력들이 줄어들고, 인부들의 임금이 낮아지는 이유에 대해 부동산 억제정책과 내수 부진 등에 따른 불안감의 표출이라고 해석했다.


“요새 민간업자들이 아주 힘들어졌어. 용적률 낮아졌지, 또 이중과세다 실거래가다 해서 빼먹을 수 있는 돈이 줄어드니까 돈 대는 사람도 없고 사장들도 돈줄이 마르는 거야. 인력시장 자체가 이렇게 많이 위축될 수밖에 없어.”


실제로 최근 발표된 주택시장 안정 종합대책 이후 주택거래 신고제 도입과 투기과열지구 지정 확대, 분양권 전매 금지 등의 정책이 잇따라 발표되면서 민간업체가 주도해 오던 주택건설 경기가 위축되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건설경기 사이클에 따른 위축보다 더 큰 문제는 용역업체가 인부들의 인건비 상승을 인위적으로 제한함으로써 전문인력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3D 기피라는 말은 몽땅 거짓말
“여기만 해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놈은 미장쪽으로만 16년 짬밥이고, 저놈은 30년, 저 놈은 인테리어야. 기능공들은 다 적어도 10년 이상씩 해 오던 베테랑들인데 이제 여기에 나오는 사람이 없지. 용역으로 간 사람도 있지만, 버스 운전하러 간 놈, 청소하러 간 놈도 있고 몇 만원 더 받는다고 다 빠져 나가서 공사 기간도 늘고 하는 건데 사람들이 그걸 몰라.”


건설경기가 호황일 때 심심찮게 나오던 대학생 아르바이트들도 요새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예전에 600~700명씩 모이던 사람들이 절반의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미장일만 16년째 하고 있다는 한 인부는 “3D 업종이다, 뭐다 해서 일을 안 하려고 한다는 것은 몽땅 거짓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여기 사람들은 내 몸이 아무리 힘들고 고되도 단돈 얼마라도 돈이 더 되는 곳으로 갈라고 기를 쓰제, 일을 안 할라고는 안 혀. 나만 보고 있는 얼굴이 몇 갠디, 그걸 보면서 일 못하는 게 힘들지 몸이 힘든 게 대수여”라며 바닥으로 눈을 떨군다.


서울 영등포시장 부근에 있는 한 인력소개소의 새벽은 부스스한 머리와 충혈된 눈, 굽은 어깨를 하고 모여드는 사람들로 시작된다. 3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서너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 ‘선택’을 기다린다. 하지만 작은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올 때까지 가방을 챙겨 일자리로 향한 사람은 1/3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뿐이다.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하고 모여 앉은 10여 명의 사람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이자 종이컵을 구겨 쥐고 다시 하루를 때우러 나섰다.

 

차마 자리를 뜨지 못하는 사람들
이 소개소의 엄찬섭 사장은 “1년 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어요. 열심히 하는 사람은 돈 이백쯤은 쥘 수 있었어요. 최근에는 일거리가 하도 없고 서로 다 힘드니까 교대로 해 가며 그래도 연명은 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제 그것도 어렵지”라고 말했다.
어렵사리 일자리를 구해 가방을 둘러메고 나가던 한 40대 노동자는 “예전 같았으면 한몫 잡고 있을 기술자도 막노동판에 묵묵히 나가 일할 수밖에 없지.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힘들다고 하면 당장 나가라고 하니까”라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붐비기 시작하는 아침, 구멍가게에서 나오던 한 인부는 “부동산 거품을 뺀다 어쩐다 하면서 IMF 이전보다 더 경기가 어려워져갖고 다들 20년 이상씩 여기 나오던 사람들도 한 달에 5~6일 밖에 일을 못해. 공치는 날은 집에서 소주하고 과자 한 봉지로 하루를 때우는데, 이게 사람 망가뜨리는 것이제”라고 말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정비닐에도 소주병이 들어 있었다. 


나비효과가 태평양 바다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심하게 출렁이는 새벽시장 인력들의 어려운 생계는 노동자들의 얼굴에 하나씩 깊은 주름을 만들어 가고 있다.
인력시장이 마감되고 나서도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여전히 앉아있는 노동자들의 얼굴에는 오늘 또 하나의 주름이 깊게 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