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의 전문성’으로 고용승계 제외… “전문기술인은 비정규직만 전전해야 하나”
‘고도의 전문성’으로 고용승계 제외… “전문기술인은 비정규직만 전전해야 하나”
  • 최은혜 기자
  • 승인 2020.12.14 17:16
  • 수정 2020.12.14 1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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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로공사, 2021년 ITS 유지관리 용역 선정에서 ‘고용승계’ 빠져
정부, 민간위탁 가이드라인 사각지대 해소 의지 있나?
한국도로공사 홍보영상 갈무리. ⓒ 한국도로공사
한국도로공사 홍보영상 갈무리. ⓒ 한국도로공사

고속도로의 전자시설물을 유지·관리하는 한국도로공사(사장 김진숙) ITS 유지관리 용역 노동자가 난데없는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2019년 12월, 정부가 발표한 <민간위탁 노동자 근로조건 보호 가이드라인>(이하 민간위탁 가이드라인)은 위·수탁계약에 ‘고용승계’의 내용을 포함하도록 규정했지만, ITS 유지관리 용역 노동자는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노동자로 분류돼 고용승계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한국노총 공공노련 공공산업희망노조 정보통신도로유지관리지부(지부장 정성범)는 “2019년 12월 정부가 민간위탁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지만, 우리 같은 전문기술인은 민간위탁으로 처우가 열악해도 민간위탁 가이드라인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며 “왜 전문기술인은 비정규직만 전전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이러한 호소의 배경에는 한국도로공사의 2021년 ITS 유지관리 용역 선정이 있다.

한국도로공사는 <2021년 ITS 유지관리 용역 사업수행능력평가기준>에 ▲업체 보유기술자 중 50% 이상 참여기술자로 제출 ▲낙찰 시 제출된 참여기술자는 반드시 당해 용역에 참여 ▲착수 후 6개월 이내 참여기술자 교체 불가 등의 항목을 포함했다. 이 항목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한국도로공사의 ITS 유지관리 용역은 지역본부별로 용역 선정 공고를 내고 지역본부별로 용역업체를 선정하기 때문이다.

정성범 공공산업희망노조 정보통신도로유지관리지부 지부장에 따르면, 지금까지 한국도로공사의 ITS 유지관리 용역계약은 사업자가 바뀌면 현장노동자는 바뀐 사업자와 다시 근로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으로 자신이 일하던 지역에서 ITS 유지관리 업무를 이어왔다. 그러나 이번에 한국도로공사가 강화한 <2021년 ITS 유지관리 용역 사업수행능력평가기준>을 적용할 경우 한 지역의 용역업체가 변경되면 기존의 노동자 중 50% 이상은 해당 지역에서 ITS 유지관리 용역 업무를 수행할 수 없다.

공공기관의 특성상 용역계약비가 인상되는 일이 거의 없기에 자신이 속한 용역회사가 다른 지역본부의 ITS 유지관리 용역계약 입찰에 성공한다고 해도 임금인상의 요인이 없어 다른 지역으로 생활터전을 옮기는 일은 큰 부담이라는 것이 정성범 지부장의 설명이다. 발주자인 한국도로공사가 ITS 유지관리 용역노동자에 사택을 제공할 의무가 없고, 용역회사에서 사택을 마련하려면 ITS 유지관리 용역노동자의 임금은 더 깎일 수밖에 없다.

공공산업희망노조와 공공산업희망노조 정보통신도로유지관리지부는 한국도로공사에 “입찰공고문에 기존 노동자의 고용승계를 보장하도록 하는 문구가 추가돼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한국도로공사에서 “ITS 유지관리 용역노동자는 전문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민간위탁 노동자에 해당되지 않기에 민간위탁 가이드라인 적용대상이 아니”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정부가 발표한 민간위탁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위·수탁계약 체결 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고용승계’ 내용을 계약서에 명시해 노동자의 고용불안을 해소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수탁기관의 관리자나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사무 종사자는 고용승계에서 제외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으로 단순노무직 외의 민간위탁 사무에서는 고용승계를 강제하기 어렵다.

한국도로공사는 올해 8월, <2020년 한국도로공사 혁신계획>을 발표했다. 이 혁신계획에는 ‘계약분야의 공정성 강화를 위한 계약조건·기준 개정’의 항목이 포함됐다. 이를 위해 ▲계약상대방 권리 강화 ▲인권보호 서약 제도 등을 도입해, 2021년 용역계약 전체에 적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국도로공사가 공고한 <2021년 ITS 유지관리 용역 사업수행능력평가기준>에서는 계약상대방의 권리 강화나 노동자의 인권보호를 위한 서약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국도로공사는 “2017년 12월 28일, 고용노동부 중앙컨설팅팀에서 ITS 유지관리 용역에 대해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된다며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제외했다”며 “때문에 민간위탁 노동자에 대한 고용승계 논의의 대상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어 “ITS 유지관리 용역은 엔지니어링산업진흥법에 따라 운영하는데, 사업참여기술자 전체를 평가해 평가대상자 전원을 사업에 투입하는 게 원칙”이라면서도 “중소기업의 신규 사업 참여 확대를 위해 평가기준을 완화해 운영 중”이라고 덧붙였다.

민간위탁 가이드라인을 만든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 TF의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장관 이재갑)는 “한국도로공사의 ITS 유지관리 용역은 민간위탁으로 분류되지 않는다”며 “그렇기 때문에 민간위탁 가이드라인을 적용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공공부문 민간위탁 노동자의 처우개선을 위한 정부 차원의 논의기구 설립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민간위탁 가이드라인의 목적이 민간위탁 노동자의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이라며 “민간위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관련 논의는 개별 기관에서 진행하고 있고 민간위탁을 유지하는 경우에는 민간위탁 가이드라인을 통해 민간위탁 노동자의 고용안정과 처우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민간위탁 가이드라인의 사각지대에 놓인 비정규직 전문기술인력은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름하고 있지만, 이들의 고용안정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