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과 특권의 조끼’를 벗어던져라
‘습관과 특권의 조끼’를 벗어던져라
  • 승인 2004.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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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과 연대의 상징에서 분열·불신의 대상으로

 

노동조합 간부나 대의원의 ‘공식 유니폼’이 되다시피 한 붉은 조끼. 일명 ‘투쟁 조끼’는 이제 집회현장에서 뿐 아니라 작업장에서도 입는 사람, 보는 사람도 모두에게 익숙해진 하나의 노동운동 문화가 됐다.


집회 참석자들에게 조끼를 입는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초·중반이다. 93년 당시 이인제 노동부장관이 해고자들을 복직시키겠다는 발언을 하면서 각 지역의 해고자들은 복직의 기대에 부풀었다. 93년 11월 1일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상임의장 단병호)의 주관으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의 주요 요구안도 ‘해고자 복직’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 집회에서 경주포항지역 해고자복직추진위원회는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는 노란색 글씨가 선명한 검은 조끼를 맞춰 입고 상경했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던 이들의 통일된 복장은 집회 참석자들과 시민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았다.

 

포항지역 해복추에서 일했던 한 관계자는 “복직에 대한 절박한 심정을 알릴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조끼를 맞춰 글씨를 새겨 넣자는 아이디어를 냈다”며 “당시에는 지금처럼 투쟁 조끼를 맞추는 곳이 없어서 시장에서 검은 천을 사서 재봉틀로 박아 조끼 모양을 만들고 유성 페인트로 일일이 구호를 찍었다”고 회상했다.


국민들, 조끼족이 밉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 빨강, 파랑, 혹은 검은색 조끼는 전투적 노조운동의 대표적 상징이 됐다. 그간 노조운동이 겪은 역동적 변화만큼이나 조끼의 상징도 많이 변했다. 사람들은 이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명동성당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조끼에 대한 인상이 최근의 잇따른 파업사태와 맞물려 있었다. 명동성당에서 계약직으로 청소일을 하고 있는 김문수씨(55)는 “빨간 조끼 입고 사람들 몰려오면 일단 ‘아이구 오늘 죽었구나’ 생각이 먼저 든다”면서 “예나 지금이나 진짜 힘없는 사람은 찍소리 못하는 거 아닙니까. 여기 와서 데모하고 어지르고 가는 사람들, 진짜 하루하루 노동일로 먹고사는 우리같은 사람 생각이나 하는지 궁금해요”라고 불만을 드러냈다.


인천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주변에서 15년째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임모씨(52)는 조끼 입은 손님을 대하는 게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때는 조끼 입은 사람들은 모두 못 가진 사람, 약한 사람이었죠. 투쟁 조끼 입고 밥 먹으러 온 사람한테는 아무래도 반찬이라도 하나 더 주게 되고 밥값도 안 받은 적 많아요. 지금요? 지금은 안 그래요. 조끼 입은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더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죠. 요즘엔 그 사람들보다 못한 사람이 태반인데요, 뭐.”


98년도 대규모 구조조정 당시 현대자동차를 나와서 택시 운전을 하고 있다는 김원식씨(48)는 현대차 공장을 지날 때 가끔씩 빨간 조끼 입은 사람을 보면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꾸 서운한 생각이 든다고 했다. “딱 보면 간부나 대의원 아닌교. 이제 다 부질없는 생각이지만서도 내도 쫌만 더 버텼으면 지금처럼은 안됐지 싶은 생각도 들고. 마 괜히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것 같아가 밉기도 하고 그런기라.”

 

정규직 조끼에는 금테 둘렀나?
이들이 문제 삼는 것은 조끼의 색깔이나 조끼 뒤에 적혀 있는 구호가 아니라 조끼로 대표되는 노동운동의 현실이었다.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격차와 조합원-조합간부의 괴리, 노사 간의 불신은 조끼 문화에도 그대로 투영됐다.


K사의 사내하청 노동조합의 한 간부는 우연히 정규직 노동조합 간부의 조끼를 얻어 입었다가 민망한 일을 당했다. “왜 사내하청 노동자가 우리 노조 조끼를 입었냐”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불평 때문에 조합간부가 가능하면 조끼를 입지 말아 달라고 요청한 것. 그는 똑같은 투쟁 조끼라도 정규직이 입는 조끼와 비정규직이 입는 조끼는 그 의미와 사람들의 시선, 회사의 대우까지 완전히 다르다고 했다. 단결과 연대의 상징이던 붉은 조끼는 그 의미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끼에 담겨 있는 설움은 사실 노동자 모두의 것이었다. 해고자들의 절박한 염원을 담기위해 제작됐던 초기의 투쟁조끼가 급속히 퍼져나간 것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서러움을 함께 풀어내 보고자 했던 노동자들의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95년 롯데호텔 파업에 참가했던 김미현(29·가명)씨는 “모두가 함께 주황색 티셔츠를 입고 '쟁취! 임단투' 라 쓰여진 빨간 띠를 묶으며 처음으로 노동자라는 것을 실감했다”고 한다. 김씨는 “유니폼과 강요된 미소 속에 가려진 설움과 분노가 유니폼을 벗어 던지고 파업티셔츠를 입는 순간 터져나왔다”며 “같은 옷을 입는 것은 같은 아픔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지금은 가끔 질타의 대상의 되곤 하는 투쟁조끼에는 사실 이런 아픔과 간절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조끼만이 누리는 ‘특권’
화학업체인 S사의 임단협이 한창이던 지난 7월 출근시간의 공장 정문. 붉은 조끼를 입고 출근을 하는 한 조합간부에게 정문수위실의 경비가 경례를 붙인다. 이를 지켜보던 현장 노동자 이모씨는 “정문에서 경례를 받는 층이 회사에 둘 있는데, 하나는 그룹 중역이고 하나는 노동조합 간부”라며 “저렇게 되니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 회사에서는 조끼가 외출증을 대신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근무 시간에 공장 밖을 출입하려면 외출증을 끊어야 하지만 빨간 조끼만 입으면 무사통과기 때문에 조합간부의 조끼를 빌려 입기도 한다. 이씨는 “그 정도 특권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며 “현장에서 조끼는 투쟁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특권의 상징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조끼에게 부여된 특권’은 회사의 무원칙한 노무관리에서 비롯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자동차부품업체 K사 노동조합의 정책부장을 하다가 현업에 복귀한 정모씨는 건의사항 때문에 공장장실을 찾았다. 빨간 조끼가 아니라 작업복을 입고 간 공장장실에서 그는 문전박대를 당했다.

▲ 자료사진 / 기사와 무관합니다.

 

공장장은 “000씨, 이렇게 직접 나를 찾아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임원이 뭐, 직원 일일이 상대하는 사람도 아니고…”라면서 얼굴을 붉혔다. 정씨는 “노동조합 간부였을 때는 아무런 절차 없이 제집 드나들 듯 하던 곳인데 조끼를 입고 벗고의 차이가 이렇게 큰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는 조합간부일 때는 습관처럼 입고 다니던 조끼가 현장에서는 이미 어떤 특권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음을 조끼를 벗고서야 알 수 있었다고 했다.


‘빨간 조끼가 떴다’ 하면
기업의 노무담당 직원들에게 조끼는 교섭 전술에 중대한 변화가 있음을 예고하는 신호다. 통신업체인 L사의 노사협력팀 홍모과장은 “작업복 입고 교섭 들어오던 조합간부들이 조끼를 입기 시작하고 현장에서도 조끼 입은 대의원이 눈에 띄기 시작하면 뭔가 한번 해 보자는 뜻”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노무담당자는 “조끼를 입는 순간부터 돌변하는 것은 조합간부들의 태도만이 아니라 소위 윗사람들도 마찬가지”라고 전했다. 그는 “어차피 교섭이란 대화와 타협의 과정인데 조끼를 입는 것은 대화를 안 하겠다는 상징으로 보이는 게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김창남 교수는 “집단으로 착용하는 의상은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데, 운동선수들의 유니폼처럼 자기 편과 남의 편을 가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며 “옷에 대한 반응은 옷을 입은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의 관계 설정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사업장 내의 노사관계가 극한 대립으로 치닫는 노조일수록 조끼의 색상은 더 선명하고 조끼를 입는 빈도가 더 높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조끼가 회사와의 편만 가르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언제부터인가 현장의 조합원들에게도 ‘빨간 조끼’는 대하기 어려운 상대가 됐다. 일부 대기업노조에서 조합간부들은 교섭기간이나 투쟁시기가 아닐 때도 조끼를 입고 다닌다. L사의 조합원 한모씨는 “현장순회를 올 때는 조끼가 아니라 작업복을 입고 오면 훨씬 친근하고 좋을 텐데, 꼭 조끼를 걸치고 내려온다”고 말했다.


섬유업체 H사의 노동조합 간부들은 외부 집회 참석 시를 제외하고는 현장 내에서 조끼를 착용하지 않는다. 이 노조의 김모 위원장은 “조합원 규모가 1천 명 밖에 안 되고 부지런히 현장 순회를 돌면 얼굴을 다 익힐 수 있는 데 굳이 조합원들과 다른 옷을 입어서 스스로 ‘다른 사람’으로 비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문화평론가 김필씨(42)는 사람이 어떤 옷을 입음으로써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의복을 둘러싸고 형성된 하나의 문화관습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예비군복은 이상한 힘이 있어요. 평소에 아무리 신사적인 사람도 예비군복을 입고 나면 갑자기 행동이


백팔십도로 달라지거든요. 짤짤이, 휘파람, 15도쯤 돌려서 쓴 모자, 모두가 다 똑같아 지죠” 그는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음으로써 평소에는 하지 않던 행동을 집단적으로 한다면 사회적으로 형성된 문화와 배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C모직 패션연구소 김정희 선임연구원은 “양복과 넥타이로 대표되는 화이트칼라의 암묵적 상징과 비교해서 조끼는 고용주와 노동자라는 대조-분리의 아이콘이 되었다”면서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조끼가 강한 사회적 상징을 부여받아 이미지가 고착화된 경우”라고 해석했다. 특히 분쟁과 갈등의 반복된 사건을 통해 이 이미지는 더 강하게 고정되었다는 것이다.

 

관성의 굴레를 벗고
노사관계는 커뮤니케이션의 연속이다. 노사간의 교섭과 노동조합의 조직화활동의 중심에는 항상 의사소통이 있다. 대자보, 유인물 등의 선전활동과 조합원 간담회, 노사간 교섭, 집회 모두가 의사를 관철하기 위한 의사소통의 과정이다. 조합간부들의 조끼 또한 무언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통과 공유의 수단이다.
93년, 조끼 등판에 노란 페인트로 새겨졌던 ‘일.터.로.돌.아.가.고.싶.다’ 아홉 글자는 국민들의 마음에 깊이 각인됐고 마음과 마음을 묶는 끈끈한 일체감을 한층 강화했다. 조각 천으로 이은 허술한 조끼가 백마디 말보다 더 큰 외침이 된 것이다.


노사관계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우리 노사는 여전히 커뮤니케이션 불통병을 앓고 있다. 서로간의 불신과 의사소통 두절은 노사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규직-비정규직, 조합원-비조합원, 조합원-조합간부 간의 벽은 ‘노조운동의 위기’를 논하는 조합간부들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회자된 주제다.


거리에서 만난사람들과 현장의 노동자들, 노조간부와 노무담당자들 사이에서 이미 붉은 조끼는 하나의 이미지로 굳어지고 있었다. 투쟁과 연대의 상징이던 조끼가 권위주의와 획일성, 대화 거부와 특권의 상징이 된 것은 비록 일부 대기업 노조의 이야기라도 엄연한 현실이다.


‘익숙한 것’은 ‘편한 것’이기도 하지만 ‘빠져나오기 어려운 것’이기도 하다. 습관의 무서움은 변화를 싫어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최선두에서 진보와 변화를 이끌어왔던 노조운동은 지금 조끼로 대표되는 익숙함에 머물러 있지 않은지 되돌아 볼 때다.         


 

시위에 나타난 의복


☆ 헬멧의 색깔 ㅣ 1968년 일본에서는 반핵운동의 일환으로 미국 원자력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의 사세보항 기항을 반대하기 위한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시위에 나선 학생들의 기본 복장은 헬멧과 마스크였는데 이들은 각 정파마다 헬멧의 색깔을 달리했다. 중핵파는 백색, 사회주의 학생동맹은 적색, 사회주의청년동맹은 청색, 혁명적 마르크스주의파는 핑크색, 민주주의 학생동맹은 녹색, 사회주의 청년동맹에서 갈라진 국제주의파는 흑색 등으로 색깔을 구분했다. 이들의 헬멧 색깔은 소속감을 높이고 시민들의 심리적 지지를 이끌어 내는 역할을 했다.


☆ 히피문화 ㅣ 히피들은 베트남전에 반대하며 군복을 헐렁하고 단정치 못하게 착용하고 시위를 벌였다. 전쟁 대신에 사랑을 하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외치며 진압경찰에 꽃을 꽂아 주기도 했다. 이들은 성조기를 몸에 두르고 시위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애국심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후에 많은 국가에서 국기를 두르고 시위하는 문화로 번지기도 했다.

 

☆ 민권ㆍ여성운동 ㅣ 흑인 민권 운동가들은 백인을 모방하던 미의식에서 벗어나 흑인의 자아를 보여주는 레게 헤어스타일을 하고 아프리카 흑인들의 민속의상 다시키를 착용하였다.
60년대 말에는 여권운동도 절정을 이뤘다. 여성들이 시위 도중 모여서 브래지어를 태우며, 여성의 신체를 억압하는 브래지어의 착용을 거부하는 노브래지어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여성들은 작업복이나 운동복으로나 입었던 바지를 일상적으로 입게 돼 바지의 정장화가 이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