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노조 파업하니 집배원에게 업무전가?
택배노조 파업하니 집배원에게 업무전가?
  • 강한님 기자
  • 승인 2021.06.10 15:07
  • 수정 2021.06.10 15: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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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사업본부, 택배노조 파업선언 당일 집배원에게 택배 배송 지원 지침
민주우체국본부 “택배노조 배송거부 무력화·집배원 책임전가 말라”
오현암 공공운수노조 민주우체국본부 경인지역본부장(가운데)이 10일 오전 10시 광화문우체국 앞에서 진행된 ‘택배노조 배송거부 무력화하기 위한 집배원 1만 6천명 배송투입 규탄 긴급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이 사진의 주인공은 어제의 접니다. 택배가 오토바이에 다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우리 집배원들은 과거에 우체국 아저씨라고 불렸습니다. 전국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며 주민과 삶을 나누고,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파악할 수 있는 동네 소식통이었습니다. 코로나19로 마스크가 부족했을 때도 일선에서 공적마스크를 판매했습니다. 하지만 저희에게 돌아오는 것은 항상 과로였습니다. 택배가 파업하니 집배원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우정사업본부는 우리를 기계로만 보고 있습니다.”

오현암 공공운수노조 민주우체국본부 경인지역본부장이 자신의 사진을 기자회견에 들고 나왔다. 집배원들이 이륜차에 택배 박스를 산처럼 쌓은 채 돌아다니는 상황을 알리고 싶었던 그는 기자회견 후 “배달하러 가야 한다”며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택배노동자들이 배송을 멈춘 가운데, 우정사업본부가 우체국 집배원을 희생양으로 활용해 파업을 무력화시킨다는 비판이 나왔다. 집배원이 택배 업무에 투입되면 노동강도가 높아질 뿐 아니라 과적문제도 발생한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민주우체국본부(공동위원장 박정석·이중원·최승묵, 이하 민주우체국본부)는 10일 오전 10시 광화문우체국 앞에서 ‘택배노조 배송거부 무력화하기 위한 집배원 1만 6천명 배송투입 규탄 긴급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택배물량을 우체국 집배원에게 전가하는 우정사업본부를 규탄했다.

앞서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택배산업노동조합(위원장 진경호, 이하 택배노조)은 택배노동자의 과로사를 막기 위한 2차 사회적 합의기구 논의가 결렬되자 8일부터 무기한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사회적 합의기구에서는 분류작업 인력 투입 시기를 놓고 의견이 엇갈렸다. 택배노조는 이미 지난 1월 1차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지 반 년이 넘었고, 분류작업 인력 투입을 미룰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택배사는 분류인력 투입을 1년 유예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민주우체국본부(공동위원장 박정석·이중원·최승묵)는 10일 오전 10시 광화문우체국 앞에서 ‘택배노조 배송거부 무력화하기 위한 집배원 1만 6천명 배송투입 규탄 긴급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 참여와혁신 강한님 기자 hnkang@laborplus.co.kr

택배노조가 무기한 전면 파업을 선언하자, 우정사업본부는 같은 날 보도자료를 내고 “일반우편물과 등기·소포를 배달하는 1만 6,000여 명의 집배원들도 택배 배송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집배원 전체를 택배 업무에 동원해 ‘택배 대란’을 막겠다는 것이다.

택배노조는 이미 1차 사회적 합의에서 이뤄진 분류작업 인력(CJ대한통운 4,000명, 롯데택배 1,000명, 한진택배 1,000명)에 대한 합의도 이행되지 않는다고 지적해온 바 있다. 민주우체국본부는 “현재 우체국 현장은 아수라장이다. 우정사업본부의 교섭무능으로 사회적 합의기구의 약속이 미이행 되는 동안 그 피해는 고스란히 집배원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집배원이 이륜차에 싣지 못하는 물량도 많다. 우체국은 발 디딜 틈이 없으며 집배원들은 저녁 9시까지 중노동에 놓여 있다”고 비판했다.

최승묵 민주우체국본부 공동위원장은 “집배노동자에게는 고유의 업무가 있다. 우편물을 매일같이 배송하는 집배원들에게 대형택배를 이륜차로 배송하라는 게 말이나 되냐. 택배노동자가 온전한 노동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또 다른 노동자에게 그 노동을 대신하라고 하는 것이 근본적인 대책인지 묻고 싶다”며 “집배노동자가 이제 죽게 생겼다. 택배노동자와 집배노동자의 생존권과 안전권을 확보하는 그날까지 우리가 함께 투쟁하겠다”고 발언했다.

이중원 민주우체국본부 공동위원장도 “분류노동에 대한 해결 없이 문제가 생겼을 때 현장 노동자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는 안일한 인식이 문제다. 분류노동의 책임은 현장 노동자가 지는 게 아니고 우본과 택배사가 부담해야 하는 것인데 깡그리 무시되고 있다”며 “우리 노동권이 한 번 무너지면 두 번 무너지고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절대 좌시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민주우체국본부는 조합원 행동지침을 내리고 집배원에 대한 초과근무·주말근무 명령을 거부하겠다는 계획이다. 집배원이 택배 업무에 투여되면 택배노조의 파업이 힘을 잃고, 집배원의 노동도 열악해지기 때문이다. 행동지침에는 ▲최대 오전 9시까지만 분류작업 뒤 배달 시작 ▲점심시간(휴게시간) 준수 및 평소 우체국 귀국시간에 맞춰 귀국 ▲지부별 긴급노사협의회 안건으로 택배물량 전가 거부 요구 ▲부당한 초과근무 및 주말(토요) 근무 명령 거부 내용증명 및 공문 발송 등이 포함됐다.

한편, 민주우체국본부의 비판에 대해 우정사업본부 관계자는 “택배노조가 단체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에게 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는 집배원들이 물량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기존에 배달한 것보다 조금 더 배달하게 된 상황”이라며 “당일 배달이 가능한 물량에 한해서만 배달하고 어려우면 다음날 배달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 지원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집배원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고 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