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사라진 ‘플랫폼’
그때는 있었고 지금은 사라진 ‘플랫폼’
  • 백승윤 기자
  • 승인 2021.08.07 00:15
  • 수정 2021.08.08 12: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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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이 결과다” 철도노조의 시도, 크루플랫폼(Krwu-platform)
​​​​​​​노동조합의 미래를 위한 의사결정 참여 경험

전국철도노동조합(위원장 박인호)의 ‘크루플랫폼(Krwu-platform)’은 새로운 의사결정 구조를 이식하는 사업이다. 전국철도노동조합의 영문 약자인 ‘Krwu(Korea Railway Worker’s Union)’와 ‘플랫폼(platform)’을 합성한 크루플랫폼은 철도노조 조합원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영국철도노동조합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착안한 크루플랫폼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반성에서 시작됐다. 지령과 지시로 이뤄지는 의사결정, 설명 없는 동원, 선언적인 연대, 낄 틈 없는 선배 공동체를 경험한 청년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에 거리감을 느낀다. 청년 조합원을 위한 ‘모임의 장’을 마련하려고 분투하는 철도노조 크루플랫폼 준비단을 만나봤다.

ⓒ 참여와혁신 DB
ⓒ 참여와혁신 DB

허리 없는 조직, 철도

철도노조는 ‘허리 없는’ 조직으로 불린다. 2005년 대규모 공채 이후, 한국철도공사에서 10년이 넘도록 원활한 신규채용이 이뤄지지 않은 탓이다. 꽉 막혔던 신규인력은 지난 3년간 대거 몰려왔다. 2009년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한 코레일 정원 5,000명 감축을 문재인 정부에서 원상 복귀시켰기 때문이다. 바로 위아래 기수 간 나이 차이가 15살인 현장도 있다. 선후배라 부르기도 애매한 세대 간극. 문화, 인식, 관점의 차이는 극명했다. 노조 안에서 세대갈등을 호소하는 목소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누구나 조직 내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조직혁신이 필요하다는 공감대 아래, 2020년 ‘철도노조 리뉴얼 프로젝트팀(리뉴얼팀)’이 활동을 시작했다.

뭐가 문제일까. 리뉴얼팀은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전국 10여 개 지부 청년 조합원을 찾아가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10분 이상 불만을 쏟아내는 조합원도 있었다. “혼자서 얘기하다가 자기 팀원들 다 데리고 올 테니까 얘기를 들어달라고 하는 조합원도 있었다”고 당시 인터뷰에 참여한 김선욱 철도노조 정책기획실장은 얘기했다.

“인터뷰를 이어갈수록 가장 큰 문제는 의사결정 구조라고 판단했어요. 현장에서 만난 젊은 세대의 요구와 간부들의 결정 간 괴리가 컸거든요. 모르던 바는 아니었지만, 청년 조합원과의 대화로 다시 확인한 거죠.”

2030에게 주입할 수 없는 중앙집권적 조직문화

한국 민주노조 역사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조직이 철도노조다. ‘어용노조’를 탈피하고자 했던 철도노동자들은 긴 투쟁 끝에 2000년 3월 직선제를 쟁취했다. 이제 50줄을 넘어선 당시 철도노조 민주화의 주역들은 전국 현장에서 지부장과 대의원 등 노동조합 간부를 맡고 있다. 길게는 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간부를 맡고 있는 사람도 있다. 현장에서 지원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는 고충도 있지만, ‘직업이 지부장’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들도 있다.

여느 조직이 그러하듯, 역사가 긴 노동조합은 관성화된 조직문화를 지적받곤 한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지적이 뒤따른다. 철도노조도 마찬가지였다. 리뉴얼팀이 홈페이지에 게시한 글에 담긴 현장의 증언들은 청년 조합원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노동조합이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당위성은 설명을 안 해주고 무조건 ‘너희는 따라와라’ 하는 거 같아요. 강제로 따라오라고 하면 반발심이 생기는데 앞으로 이런 게 쌓이면 젊은 사람들이 남아있지 않을 거 같아요. 왜 우리가 이런 일을 해야 하고 이런 일을 할 때 발생하는 위험이나 얻는 거를 설명해줘야 하는데 (하지 않아요.)”

“조합비 더 내도 상관없어요. 그 금액을 내고 월급이나 복지가 올라가면 상관없어요. 근데 아무것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으니까. 조합비가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르겠고, 왜 엉뚱한 방향으로 쓰일까 생각하니 아까운 거죠. 금액이 많고 적고 문제는 아니에요. 그건 아마 저뿐 아니라 대부분의 생각일 걸요.”

청년 조합원의 이야기에는 하향식, 단선적 의사결정에 관한 불만이 담겨있다. 급박한 상황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는 중앙집권적 의사결정 구조는 민주노조 건설과 민영화 반대 등 투쟁 시기에 맞는 방식이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노’자도 모르고 입사한 지금의 청년 조합원에게는 ‘까라면 까’라는 문화로 인식되고 있었다.

지령과 지시로 이뤄지는 의사결정, 설명 없는 동원, 선언적인 연대를 경험한 청년 조합원은 노동조합과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6월 철도노조가 조합원 5,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온·오프라인 설문조사에서 입사 5년 미만인 청년 조합원 중 44%는 노조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신뢰한다는 답변은 절반인 22%에 그쳤다. 김선욱 정책실장은 예견된 결과라고 지적한다.

“중앙의 정책실 몇 명이서 1년 사업계획 자료집을 만들고 배포해요. 보통 대의원대회 하루 전에 받아보니 다 볼 시간이 없어요. 애초부터 논의가 잘 이루어질 수 없는 거죠. 중앙에서 결정하면 일부 이견만 확인하고 원안대로 가는 게 지금까지의 의사결정 구조인데, 최근 5년 내 입사한 조합원이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죠.”

철도노조의 시도
“과정이 결과다”

크루플랫폼은 ‘아래로부터 숙의민주주의’를 구현하려는 철도노조의 시도다. 현장에서 직접 정책 안건을 제안하고 토론해서 결정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먼저 전국 152개 지부에서 토론을 통해서 정책 안건을 발의하면, 온라인으로 1차(조합원), 2차(지부장·대의원) 투표를 진행해서 30개의 안건을 확정한다. 확정된 안건은 세 권역에서 2박 3일간 열리는 정책포럼에 상정해 논의한다. 이후 온라인 공론을 통해서 원안을 확정·수정·통합해서 정책 대의원대회에 올린다. 9월께 열릴 정책 대의원대회에서 통과된 안건은 철도노조의 최종 정책안으로 선정된다.

철도공사의 2030세대는 주로 ‘블라인드(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눈다. 고민과 불만을 털어놓지만, 검증되지 않은 정보가 공유되면서 올바른 논의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합리적인 비판보다는 직종별 특성에 대한 몰이해로 갈등의 골만 깊어진다는 게 철도노조 내부의 대체적인 의견이다.

크루플랫폼 준비단에서 포럼 진행을 담당하는 박세증 조합원은 “잠재된 불만을 끄집어낼 자리를 만들면 어쨌든 의견을 나눌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며 논쟁이든 싸움이든 직접 만나서 의견을 나누고 갈등을 조정하는 공론장이 필요했다는 의견을 밝혔다.

ⓒ 전국철도노동조합
7월 5~7일 열린 크루플랫폼 정책 포럼 ⓒ 전국철도노동조합

“크루플랫폼으로 나온 안건들이 다른 때와 비교해서 아주 특별하지는 않아요. 다만, 7월에 열린 정책포럼에서 ‘다른 직종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였다’는 평가가 많았어요. 노동조합은 공통의 요구를 가지고 교섭하거나 싸우는 건데, 그러려면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잖아요. 기발한 정책이란 결론이 아닌, 내부 갈등조정의 과정으로서 유의미했던 거죠.” 김선욱 정책실장의 말이다.

직접 참여하고 결정하는 의사결정은 노동조합에 관한 이해도와 참여도가 낮은 청년 조합원에게 특히 유의미했다. 정책포럼에 상정된 안건 중에는 철도공사와 자회사 간 동일 복지를 요구하는 안건도 있었다. 이어지는 온라인 투표에서 찬성표는 적었지만, 인원이 비교적 소수인 자회사에서 올린 안건임을 고려해서 ‘슈퍼패스’로 통과시켰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었으나, 포럼에 진행자로 참가한 청년 조합원들은 모회사와 자회사 간 차별을 알게 됐다.

포럼 진행 당시 준비단은 참고자료로 철도공사와 자회사 간 복지와 임금 체계를 비교하는 표를 준비해 테이블마다 나눠줬다. 비교표를 본 청년 진행자들은 차별을 확인하며 자회사 노동자들의 요구를 이해했다.

기본적인 사실관계나 정보에 대해서 바로잡을 기회와 직종 간 서로 이해를 할 자리. 계획단계에서 기대했던 대로, 아직은 진행 중인 크루플랫폼이 보여준 순기능 중 하나다.

“고립·분산·파편화,
다시 모임의 장을 만들 때”

“공동체로서의 자치활동을 많이 경험하지 못한 게 원인 중 하나일 것 같다.” 청년 조합원의 노동조합 활동 참여가 저조한 이유를 묻자 박인호 철도노조 위원장이 답한 말이다. 1999년 철도청에 입사한 박인호 위원장은 철도 민영화 반대 파업에 참여해 3년 6개월 만에 해직됐다. 해직 기간은 고통스러웠지만, 동기, 선후배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철도노조 활동은 그 자체로 ‘모임의 장’이었다는 소회를 밝혔다.

과거 민주노조 건설과 민영화 반대에 앞장섰던 철도노조 조합원들은 상시적인 교류를 이어갔다. 함께 모여서 불합리한 점을 찾고 해결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투쟁 방안을 만들었다.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형성한 활동가들은 직렬과 지역을 넘어서기 위해 신문과 소식지를 발행하며 소통했다.

지금의 청년 조합원들은 하지 못한 경험이다. 결속의 동력이 될 만한 투쟁 사안이 적은 시기에 입사한 만큼, 청년 조합원의 자발적 모임을 이끌어줄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게 김선욱 정책실장의 생각이다.

“철도노조 민주화를 이끌던 선배들은 주축 간부가 되고 나서는 정작 후배들이 모일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지 않았어요. 직렬 간에는 물론이고, 지방과 수도권의 근무 조건도 천차만별인데, 서로를 이해할 계기가 없죠. 직종 내에도, 직종 간에도 못 모이니까 고립, 분산, 파편화된 거예요. 그들에게 기회를 줘야죠. 함께 모여서 우리는 어떻고, 너희는 어떻다고 얘기해서 공통적인 고민을 확인하고 개선책을 논의할 수 있는 시스템을 살려보자는 게 크루플랫폼이에요.”

노동조합의 미래를 위한 경험

이제 7부 능선을 넘어온 크루플랫폼은 품이 많이 드는 사업이다. 전체 진행 기간만 5개월가량 소요된다. 사업을 홍보하고, 투표를 독려하고, 투표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서 문자와 전화를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현장에서 토론 자리를 만들어야 하는 지부 간부도 어려움을 호소했다.

첫 시도인 만큼 아쉬운 점도 있다. 떠밀리다시피 참여한 지부도 있고, 조합원의 참여가 저조하기도 했다. 1차 온라인 투표에 참여한 조합원은 전체의 10% 수준이다. 논의가 깊이 이뤄지지 못한 안건도 있었다. 이제 막 시작한 사업에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조합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욱 정책실장은 노동조합 의사결정 구조 변화를 위해 꼭 경험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현 집행부에서 크루플랫폼을 또 하기에는 사실 무리가 있어요. 다음 집행부가 할지도 알 수 없죠. 다만, 미래를 위한 유효한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예전 같은 방식의 의사결정을 고수하면 ‘왜 조합원 의견을 안 묻느냐’, ‘왜 중앙에서 일방적으로 정하느냐’면서 크루플랫폼을 경험한 젊은 간부들이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요구하겠죠. 이번 경험이 민주주의의 퇴보를 막는 기제가 되지 않을까요. 몇 년 지나 봐야 알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