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공주] 아날로그 시대의 아이콘 ‘자전거 탄 집배원’
[인어공주] 아날로그 시대의 아이콘 ‘자전거 탄 집배원’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09.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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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순
한국고용정보원 선임연구원
 

누구에게나 지난 시절이 있습니다. 생각만 해도 괜히 웃음이 나오는 가슴 따뜻한 기억이 있을 수도 있고 그다지 되씹고 싶지 않은 순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하루 팍팍하게 살아가다보면 지난 시절은 그냥 옛 기억일 뿐 삶의 청량제가 되거나 걸림돌이 되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영화 <인어공주>는 지난 시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도 어머니, 아버지의 지난시절 속 젊음과 순수,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변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 어느 말이 맞는지 헷갈리기도 하지만 변하되 원래의 모습은 여전히 간직하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변하지 않되 세상살이가 가만히 두지 않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스무살 엄마를 만나다
우체국 여직원으로 일하는 나영은 목욕탕 때밀이(요즘은 목욕관리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인 엄마 연순의 억척스럽고 거친 모습 때문에 가끔 그런 엄마가 창피하고 싫어지는 딸입니다.

나영의 아버지는 엄마에 비해 너무 착하고 물러 답답하기까지 한, 이제는 가장으로서의 권위나 힘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이런 가족이 나영에게는 부담이고 불만이며 벗어나고픈 현실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갑작스레 집을 나가 버리고 나영은 계획 중이던 뉴질랜드 여행을 뒤로 한 채 부모님의 고향인 섬마을로 아버지를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뜻밖에도 스무 살 적 엄마 연순을 만납니다. 스무 살의 연순은 해녀로 물질을 하면서 동생을 뒷바라지하는 너무나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목욕탕에서 손님과 머리채를 쥐어 잡고 싸우는 엄마와 동일인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모습입니다. 
연순은 가슴 따뜻한 동네 집배원 진국을 짝사랑하게 되고 이 집배원은 훗날 연순의 남편, 즉 나영의 아버지가 됩니다.

 

빨간 우체통의 추억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집배원이라고 부르기보다 ‘집배원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이 입에 익숙할 것입니다.

집배원 아저씨는 아날로그 시대를 대표하는 직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밤새 몇 번이고 고쳐 쓴 연애편지를 배달해주는 것도 그이고, 큼지막한 글씨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위문편지도 일단 그의 손에 넘겨집니다. 축전을 보내주는 것도 부고를 전해주는 것도 자전거와 함께 등장하는 집배원이었습니다.

그러나 각 가정마다 컴퓨터가 대접을 받고 인터넷 전용선이 깔리고 이메일을 날리면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집배원 아저씨를 서서히 잊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 수 있고 그냥 편지만 보내기가 섭섭하다면 예쁜 바탕그림에 음악까지 얹어서 보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까요. 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문자메시지라는 짧은 안부를 물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동마다 설치되어 있는 우편함에 쓰윽 편지를 넣고 가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고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감어린 편지들이 줄어든 대신 집배원 아저씨의 가방에는 각종 카드명세서, 광고전단지, 독촉장들이 쌓여가고 있고 자전거 대신 오토바이와 소형트럭, 개인휴대용단말기(PDA)가 손에 쥐어졌습니다.

 

손수 쓴 편지 한장
영화 <인어공주>는 우정사업본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따뜻하고 정감어린 집배원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위해 70년대의 우체국과 집배원 복장을 재현하는데도 아낌없는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군요.

영화에서 청년 진국은 글을 모르는 연순에게 짬짬이 글을 가르쳐주면서 그녀의 순수하고 착한 마음에 매료되고 연순은 진국의 자전거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러나 세월의 풍파 속에 그들은 억척스러운 아줌마의 모습으로, 기죽은 가장의 모습으로 녹록치 않은 현실을 살아갑니다. 이제는 축 처진 어깨로 우체국을 지키는 진국, 아니 나영 아버지의 뒷모습에서는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던 청년 집배원의 모습을 더 이상 찾을 수 없습니다.

동네 가게 앞에 예쁘게 서있던 빨간 우체통을 찾기가 쉽지 않은 요즘, 그래도 이메일 대신 손수 편지를 한 장 써서 우체국으로 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가장 쉬운 방법으로 오랫동안 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르니까요.

 

 최영순_중앙고용정보원 선임연구원 withys@work.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