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삿짐센터에서 만난 사람들
이삿짐센터에서 만난 사람들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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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특수? 이젠 그런 거 바라지도 않아”

“가뜩이나 일이 없는데,
왜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거야!”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연신 담배를 피워대는 이삿짐센터 사람들.
이사 예약이 밀릴 9월 중순 주말,
그러나 오늘은 고작 한 건이 전부다.
이런 사정도 몰라주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야속할 밖에.
H이삿짐센터 소장 신씨는
“오늘도 글렀구나”하며
어깨에 짊어져야 할 이삿짐보다
더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계속되는 경기침체로 주택시장은 꽁꽁 얼어붙었다. 부동산 거래규제와 역전세난으로 주택매매와 전세거래가 급감, 이사수요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서울시 운수물류과에 따르면 2003년 234건이던 화물자동차운송주선사업 신규등록이 2004년 8월 현재 20건으로 줄어들었다.

 

운송주선사업연합회 신규섭 차장은 “작년 9월 40~60건이던 이사예약률이 현재 20건도 채 안되며, 한달에 10건도 안되는 업체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또 “일감이 작년의 1/3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전체 사다리차의 25% 가량이 공터에서 쉬고 있다”고 전했다. 

비 오는 토요일, 재개발 아파트 단지가 늘어선 서울 성북구 하월곡4동의 한 이삿짐센터를 찾았다. 새벽 5시에 출근한 노동자 김씨와 오씨의 얼굴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곳 H이삿짐센터는 김씨와 오씨를 포함해 총 9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동이 트자 하나둘 모여든 이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은 푹 퍼진 라면. 식후 마른 입술에 피어나는 담배연기는 새벽안개와 함께 털썩 주저앉은 의자 위로 아스라이 사라진다. 

 

“요즘?  죽을 맛이지”
H이삿짐센터는 9명의 순번을 정해 일을 한다. 자신의 차번호가 적힌 플라스틱이 제일 앞으로 나와야 당첨. 오늘은 오씨와 이씨 차례다. 서둘러 이사바구니를 챙겨들고 용달차에 올라탔지만 비 때문에 오전 8시에 시작하기로 한 이사는 조금 늦어졌다.

 

일주일에 몇 건이나 이삿짐을 싣냐는 질문에 오씨는 “요즘? 죽을 맛이지. 일이 없어도 너무 없어. 일주일 해봐야 고작 두세 건이야. 다른 곳도 다 비슷하지 뭐”라고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다.
불과 5~6년 전만 해도 경기가 좋아 하루에 세 건은 기본, 어떤 날은 이사예약이 밀려 눈코 뜰새 없이 이삿짐을 날랐다고 한다.

 

당시 월수입은 200~300만원으로 4식구 먹고 살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나 작년부터 월수입은 100만원에도 못 미친다. 이삿짐 나르던 3~4명의 고정직원들은 모두 그만두고 차량운행과 이삿짐 운반은 용달차 지입기사들이 모두 맡고 있다.

용달차 1대 당 벌어들이는 수입 15만원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돈은 약 7~8만원 가량이다. 수입이 워낙 줄어들다보니 주변 업체와 경쟁을 벌이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고 한다. 운반비를 낮춰서 경쟁을 해봐도 얻는 것 보다 잃는 게 많기 때문이다.

“일 없어서 문 닫고 그만 두면 뭘 해! 그만 둬도 할 일이 있나? 그냥저냥 버티는 수밖에…” 문을 곧 닫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지만 이들에게 별다른 방법은 없어 보인다.

 

‘그놈의  돈’이  뭐길래
H이삿짐센터 직원들의 평균연령은 50대 중반이다. 몇 군데 건너 위치한 D익스프레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요새 젊은이들 중에 이런 일 하는 사람 없어요. 돈도 안 되고, 재미도 없는데 당연히 없지.”
15년간 이삿짐 운반을 했다는 이씨는 올해 51세다. 여태껏 어깨가 아파도 건강검진은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다고 한다. 이씨의 최고 소원은 몸이야 어찌됐건 간에 돈만 많이 벌면 좋겠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용달은 외로운 직업이야~ 돈이 없거든~’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생활비, ‘그놈의 돈’이다. 돈이 없어 일 할 기분이 나지 않는다는 푸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봉제공장, 음식점 등으로 일 나가는 부인과는 얼굴 마주칠 시간조차 없는 팍팍한 일상. “돈을 안 벌어다 주니까 할 수 없지”하며 젊은 박씨는 농을 던진다.  “밥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 뭐” 이것이 외로운 남편이 된 이유라면 이유다.

 

불황의 그림자
오씨는 금요일 저녁 고3 딸과 싸웠다고 한다. 한창 공부해야 할 나이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딸을 보면 가슴이 아플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아빠의 복잡한 심정을 몰라주는 것이 되레 속상하다며 한숨을 쉰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돈 없어서 공부 못시키겠다고 얘기 할 수도 없고…” 오씨는 말끝을 흐린다. 수입이 없다 보니 자꾸 빚을 지게 되고, 카드 숫자만 늘어나게 된다는 오씨는 그래도 또 대출로 입학금을 마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지난 8월 은행의 가계 대출은 3조413억원으로 지난해 10월(4조2594억원) 이후 10개월 만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또한 내년으로 다가온 주택담보대출 만기에 따른 서민가계의 부채상환 압력은 비단 오씨의 고민만이 아닐 것이다. 

“요즘 같이 경기 어려웠으면 아마 학교 못 보냈을 거야. 잘 나갈 때 학비를 댔으니 망정이지” 오씨 보다는 경제적 부담이 덜 하다는 이씨도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관련 업종도 줄줄이 한숨  
이사수요 감소는 이삿짐센터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재개발 아파트 단지 앞에 자리 잡은 S부동산. 사장은 “솔직히 말해서 지난 4월에 계약 한 건 성사시키고 나서는 여태까지 계약서를 한 번도 쓰지 못했어요”라고 말한다.

20년 만에 올해 같이 경기가 안 좋은 적은 처음이라는 것이다.

그래도 이사철인데 앞으로 나아지지 않겠냐는 말에 “불경기에 누가 이사를 해요” 라며 손사래를 친다.

재개발되었다고 해도 이동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S부동산과 줄지어 들어선 공인중개사 사무소 중에는 오전 10시가 훨씬 지난 시간인데도 셔터가 내려진 곳이 눈에 띈다. 

H이삿짐센터 근방에는 ‘가격파괴’, ‘가장 싼 집’이라는 지물포가 보인다. 장판, 벽지 등 인테리어 용품 등을 파는 이곳 또한 가격파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장사가 안 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길 건너에 위치한 싱크대 집도 매한가지. “일 해도 즐겁지 않죠. 돈이 좀 풀려야 하는데…” 싱크대를 개조하는 일을 하는 직원 김씨는 말끝을 흐리며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인다.

8월 소비자전망조사결과 4개월 연속 소비심리 하락세에 44개월 만의 최저치 기록이라는 통계청의 발표는 불황의 무게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한숨의 골을 더욱 깊게 패이게 만든다.

 

오늘도 기다리는 예약전화
“기자 양반, 뭐 그리 자꾸 물으슈? 힘든 거 뻔히 알면서. 하도 고생스러워서 말조차 꺼내기 싫소” 사무실 한 구석에서 묵묵히 얘기를 듣고 있던 김씨가 한 마디를 던졌다. 순간 조용해진다.

 

일이 없었던 이들은 계속해서 할 일 없이 포커, 고스톱을 쳤고 나머지는 문 밖에 둘러앉아 이삿짐 차량 위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쳐다보며 기름값이 너무 비싸다며 잡담을 나눈다.

 

등유와 경유가 20% 이상 오르고, 석유류 가격이 13.5%나 뛰어 올라 기름값도 못 건진지 오래됐다. 포커를 치다 말고 소장 신씨가 “경기가 언제 풀리죠?”하고 대뜸 묻더니 ‘어서 불황이 걷혀야 할텐데…’라고 혼잣말을 한다.

 

‘이삿짐 운반해 주세요’라는 전화가 올까 하는 미련 때문에 출근한다는 오씨의 얘기. 하루에 한 건이 걸리더라도 나와 있어야 한다고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일이 없어 하루쯤 쉴 법도 하지만 출근을 안 할 수는 없다.

한창 이삿짐 차량으로 북적대야 할 골목길에는 비가 와서 너덜너덜하게 찢겨진 이삿짐센터 전화번호가 붙은 전봇대만 우두커니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