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의 진화 내 ‘자유’를 앗아가다
디지털의 진화 내 ‘자유’를 앗아가다
  • 성지은 기자
  • 승인 2009.01.0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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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을 그리워하는 디지로그
‘편리함’의 아이러니, ‘바보’가 된 사람들

세상이 참 편리해졌다. 생각이 복잡한 사람 대신 많은 것을 기억해주며, 주머니 속 작은 디지털 기기는 따분한 시간을 얼마든지 혼자, 즐겁게 보낼 수 있게 해줬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진화된 문명’은 조금씩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디지털의 발달은 시간과 기억, 공간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집에서 다른 이의 전화를 기다리지 않는다. 약속한 장소에서 사람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라디오를 듣고, TV를 보기 위해 집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꼭 시간을 내어 극장에 가지 않아도 되고 극장 상영이 끝나도 아쉽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또 다시 ‘디지로그’를 말한다. 디지털 세상의 ‘고독’과 ‘소외’를 말하고 ‘느림의 미학’을 꿈꾼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 잊어버리고 있는 것, 그리고 사라진 것들은 무엇일까.

1. 300미터 앞에서 좌회전입니다

K씨는 면허를 따고 운전을 시작한 지 10년이 됐다.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홀로 자취를 하고 있는 그에게 얼마 전 구입한 ‘네비게이션’은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제 서울 어디든 웬만한 곳은 찾아가기 어렵지 않을 정도로 지리를 익혔지만 집을 나설 때마다 그는 습관처럼 네비게이션을 켠다.

어느 날 여느 때와 같이 네비게이션을 켜고 외근을 나선 K씨. 그런데 오늘따라 네비게이션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는다. 자꾸 엉뚱한 방향을 안내하는 기계를 잠시 끄고 다시 길을 나서려는데 혼란스럽다. 많이 와 봤던 곳인데, K씨는 잠시 길에 멈추어 서서 망설인다. 예전에는 표지판만 보고도 잘 찾았었던 것 같은데, 길 찾기가 낯설다. 천천히 다시 길을 찾아 가면서 그는 그제야 표지판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 가는 길에 낯선 간판이 많이 늘었다는 것을 느꼈다.

최근들어 네비게이션이 눈에 띄게 보편화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2007년까지의 네비게이션 보급률은 전체 차량의 약 20% 정도로 200만~250만대가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네비게이션은 운전자에게 ‘보다 효율적으로’ 길을 안내해 준다. 초행길이라도 단번에 찾아갈 수 있고 위치를 몇 번씩 다시 묻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주변을 살피며 헤매지 않아도 된다.

직장인 이정수(31) 씨는 “항상 차를 탈 때 습관적으로 네비게이션을 켜고 위치 검색을 해서 간다”며 “얼마 전 택시를 탔는데, 나도 운전을 하는 사람인데도 네비게이션이 없는 택시기사가 목적지를 잘 모른다면서 설명해 달라고 하는데 귀찮고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누군가가 길을 물을 때도 역시 설명에 앞서서 ‘왜 네비게이션이 없을까’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택시기사 김승기(56) 씨는 네비게이션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원래 하나 있었는데 고장난 이후로 사지 않는다”며 “뭘 두드리고 하는 게 귀찮기도 하고 손님들이 빨리 가는 것을 원하시는데 빠른 길은 다른 기사나 운전자들에게 물어보는 것이 제일 정확하다”고 말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2. 나의 ‘시간’을 조종하다

L씨는 1년 전 PMP(휴대형 멀티미디어 플레이어)를 구입했다. 한참 붐이 일던 때는 아니지만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려던 그는 출퇴근길이나 잠시 짬이 날 때마다 동영상 강의를 들으면서 공부하기에 좋다는 말을 듣고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요즘은 동영상 강의 말고도 좋아하는 음악, 드라마, 영화 등을 받아 1시간 남짓 가야 하는 출퇴근길에서 쏠쏠한 즐거움을 찾았다.

어느 날 L씨는 여느 때와 같이 자리에 앉아 어제 보던 영화를 보기 위해 PMP를 켰는데, 배터리를 충전시켜오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달리 할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잠시 후 L씨는 멍하니 앞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가 잠이 들었다.

직장인 김장우(32) 씨는 “만날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저녁이라거나, 오지도 않을 전화를 무작정 기다리는 쓸데없는 습관이 생겨버린 어느 날, 휴대폰을 갖고 있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고 말한다.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지만 그것이 어느 순간 ‘진짜’ 외로움을 만날 때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방송작가로 일하고 있는 김지연(26) 씨는 “휴대폰은 오랜만에 얻은 휴식을 방해받게 한다”며 “혼자 무엇을 조용히 생각하고 싶을 때도 있는데 눈치 없이 울리는 벨 소리는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고 토로했다.

휴대폰은 좀 더 빠르게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고 기사 검색, 인터넷 검색 기능까지 추가되면서 직접적으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정보 전달자’로서의 역할도 할 수 있게 됐다. 또한 PMP, ‘닌텐도’는 자투리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놀이 수단으로 더없는 인기를 끌고 있지만 정작 ‘심심함’이 아닌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해결하는 데는 더없이 무력하다.

3.나의 내일을 잃다

H씨는 얼마 전 최신형 휴대폰을 구입했다. 이 휴대폰은 매일 매일 스케줄을 입력하면 알람을 울려준다. 앞으로 예정된 행사와 회의, 참석자까지 모조리 휴대폰에 입력을 해 두면 다이어리나 수첩에 비해 훨씬 꼼꼼하게 일정을 챙길 수 있다. 그리고 휴대폰 안에는 수백 개의 전화번호가 입력 돼 있다. 전화번호뿐 아니라 간단한 인물메모와 생년월일 등의 신상정보가 함께 메모돼 있다. 또한 이번에 휴대폰으로 일정 관리를 하면서 자신만의 검색 방법에 따라 이름도 다르게 저장돼 있어 편리하게 쓸 수 있다.

문제는 오늘 아침 H씨가 휴대폰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월요일 아침, 그의 이번 주 일정과 이번 달 일정이 모두 꼬이기 시작했다. 분명히 잊지 않고 모두 메모를 해 두었는데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휴대폰이나 PDA를 일상적으로 쓰는 사람은 이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것에 대해 스스로를 자책할 때가 있다고 전한다.

고등학생인 정주희(17) 양은 “휴대폰을 집에 놓고 오면 하루가 불편하고 짜증스러워진다”며 “반에 휴대폰이 없는 친구가 거의 없고, 또 학원 숙제나 공지사항도 다 문자로 오기 때문에 필요하기도 하다”고 전했다.

대학생 한정호(23) 씨는 “휴대폰을 두고 학교에 갔던 날 친한 친구와 만나기로 해서 통화를 하려는데 전화번호가 생각나지 않아 곤혹스러웠다”며 “매주 몇 통씩 통화할 정도로 익숙한 번호라 당연히 기억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공중전화 수화기를 드니 난감했다”고 고백했다.

디자인을 전공하고 직장을 다니는 이정아(27) 씨는 “일에 꼭 필요한 부분이 있다거나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면 새로 나와도 잘 쓰지 않는다”며 “편리하기 때문에 쓰는 디지털 제품인데 배워야 할 것이 더 많고, 또 기능이 많아질수록 더 어려워진다”고 말했다.

휴대폰이나 디지털카메라, PMP, 노트북을 하나 사려면 나에게 필요한 기능이 있는 제품은 어떤 것인지, 사양, 디자인, 제품 정보와 가격 등을 비교하다 보면 사전 정보 없이 선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정아 씨는 “편리함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디지털의 아이러니”라고 말한다.

4. 디지털, 아날로그를 말하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00생명.”
매년 1월 1일이 되면 문자사서함이 온통 ‘새해 인사’로 가득 찬다. 크리스마스에도, 추석에도, 생일에도. 하지만 그 가운데 ‘마음’이 담긴 문자 메시지는 몇 통이나 될까?

한 장 한 장 앨범에 꽂던 필름 사진, 미리 카드를 보낼 사람들을 정해 숫자를 세어가며 다양하게 사던 크리스마스 카드. 라디오 DJ의 목소리가 들어가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이며 녹음했던 나만의 스페셜 가요 앨범들과 잡음 소리까지 생생했던 LP판들.

미술학원을 운영하는 전경희(29) 씨는 매년 가장 가까운 지인들에게 직접 만든 카드로 새해 인사를 전한다. 전경희 씨는 “처음 시작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스팸 메일처럼 들어오는 문자 메시지가 너무 싫어서였다”고 말했다.

‘디지로그’라는 말이 있다. 차갑고 냉정한 디지털을 선호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감성’적인 아날로그의 따뜻함을 그리워하게 되면서 ‘디지털 제품’의 성향이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추구하게 되면서 생긴 신조어다.
아날로그, 디지털에 이어 탄생한 ‘디지로그’라는 말은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현재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독일의 디자이너 미하엘 쇠네르(Michael Schoner)는 이에 대해 “디지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제 아날로그와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휴대폰이나 PMP의 음악을 함께 들을 수 있는 스피커가 달린 벤치를 디자인하기도 했다.

우리는 그동안 이어폰을 통해 듣는 자신의 ‘디지털’ 세계에서 함께 듣고, 함께 보면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잊고 산 것은 아닌가. 홀로 보고, 홀로 생각하며 이에 대한 감상도, 평가도 나 홀로 가치관 속에서 결론지으면서 말이다.

기다림의 미학, 느림의 미학.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며 이를 꿈꾸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직장인 김장우(32) 씨는 “생각해 보면 나에게 있어 디지털 제품을 주로 쓰는 이유는 주로 내 삶 자체 보다는 일을 좀 더 빨리 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결국 일을 좀 더 많이 하고 빨리 하기 위해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 선호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토로했다.

현대 사회에서 디지털이 더욱 발전할수록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는 더욱 커져간다. 또한 이러한 ‘디지로그’의 탄생이 디지털 사회를 더욱 풍부하게 해 준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첨단 외양에 인간적인 느낌이 담긴 상품에 관심과 수요가 증가한다.

최근 휴대폰 시장에서 ‘터치’ 제품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미국의 ‘애플’사에서는 마치 내가 책장을 넘기는 듯한 고서의 느낌을 주는 E북을 개발해 인기를 끌고 있다. 손으로 만지면 진동하고 변화하는 것, ‘디지털’이 줄 수 없는 ‘실재감’을 담아내려 하는 것이다.

‘디지털’이 이제 ‘문명’을 상징하는 특별한 무엇이 아닌, 생활 속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미 익숙해진 ‘편리함’ 속에서 다시 아날로그를 꿈꾼다는 것, 그것은 낡은 LP판과 필름 카메라가 아니라 끊임없이 경쟁하고 앞으로 내달려야만 하는 각박하고 냉정한 현실 속에서 따뜻한 사람 냄새를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까.

어제의 ‘향수’가 아닌 오늘의 ‘현실’ 속에서 편안함과 따뜻함으로 만드는 아날로그는 ‘제품’이 아닌 나와 내 옆에 있는 당신이 함께 만들어야 하는 ‘마음’, 그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