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으로의 초대, ‘참견’하지 말고 ‘참여’하라
울음으로의 초대, ‘참견’하지 말고 ‘참여’하라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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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영등포에 있는 하자작업장학교에서 일하는 교사랍니다. 요즘에는 안식년처럼 쉬면서 일주일에 두어 번 나가곤 하지요. 아마 작년 여름이었을 겁니다.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었지요. 한 여자 아이가 투벅투벅 걸어오더니 옆자리에 앉더군요. “안녕!” 하고 웃음을 건네도 아이는 시무룩했습니다.


그것도 잠시 아이는 욹그락붉그락 얼굴이 변하더니 울기 시작했습니다. 안으로 애써 삼키려던 울음은 엉엉 소리로 바뀌어 펑펑 쏟아져 나왔지요. 한 오 분 쯤 그랬을까요. 저는 아이가 왜 우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너무 서럽게 울어서 이유가 무척 궁금했지요. 하지만 참았습니다. 그 시간은 아이가 울음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시간이었으니까요. 제가 그것을 섣부르게 방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니가 다 울때까지 기다렸어
아이가 우는 내내 제가 건넨 말이라곤 “너 우는구나?”가 다였답니다. 아이는 우는 도중에도 저의 질문인지 감탄인지 모를 외마디 말에 한두 번 고개를 끄덕여주었습니다. 아이가 우는 동안에 우리의 대화는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아이의 울음은 차차 잦아들었습니다. 손등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고 비비더니 아이는 약간 충혈된 눈을 들어 저를 멀뚱멀뚱 쳐다보면서 말했습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저도 아이를 멀뚱멀뚱 마주보면서 말했습니다. “니가 다 울 때까지 기다렸지.” 아이는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곧 편안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내가 물어볼 것도 없이 아이는 자기 이야기를 꺼냈고 저는 “응, 그랬구나” 한마디씩 맞장구를 쳐주거나 또는 “정말이니?” 하고 되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요. 아이와 저의 그 날 대화는 아주 좋았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어렸을 때 울기라도 하면 어머니는 “왜 우니?” 하고 반드시 이유를 물어보곤 하셨더군요. 저는 한편으로는 엉엉 울면서 또 한편으로는 왜 울고 있는지 말해야 했습니다. 울면서 말하고 말하다가 울고 하면 어머니는 저의 울음에 수긍을 하든 타박을 주든 곧장 당신의 평가를 내리셨지요. 덕분에 제 울음은 스스로 그쳐본 적이 없고 그렇게 어머니의 참여와 개입으로 중단되곤 했답니다.


제가 교사가 된 뒤에도 간혹 그렇게 우는 아이를 보게 되면 저도 모르게 어머니와 똑같이 “왜 우니?”라고 질문부터 하게 되더군요. 대답이 없으면 거듭 물어서 이유를 들어야 직성이 풀렸고, 그 다음에는 기다리지 않고 곧장 제 생각을 말해주었습니다. 그럼 아이는 제 이야기를 듣고 울음을 그치게 되거나 더욱 서럽게 눈물을 쏟거나 하더군요. 저는 우는 아이와 대화하는 법을 알고 있지 못했던 겁니다.

나중에야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깨닫게 되었지요. 아이의 울음은 이미 그 자체로 충분한 의사 표현이자 대화의 시작이라는 것을요. 작년 여름 운동장 벤치에 앉아있던 저에게 다가온 그 아이처럼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우는 것은 더욱 그렇겠지요. 그 아이는 제 앞에 와서야 울음을 터드렸습니다. 울음으로 저에게 말을 건넨 것이지요. 예전 같으면 그 의미를 몰라 이유부터 물었겠지만 그때 저는 가만히 울음을 들어주었습니다.

 

아이가 울 때 “너 우는구나?”라고 꺼냈던 저의 한 마디는 ‘내가 지금 너의 울음을 듣고 있단다’ 하는 간단한 표현이었습니다. 다 울고 나서 “왜 아무 말도 안 해요?”라고 아이가 물은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의 저처럼 어른이고 교사라면 이유도 묻고 뭔가 평가를 내릴 텐데 당신은 왜 그러지 않느냐고 확인하는 것이었겠지요. “니가 다 울 때까지 기다렸지.” 저의 이 대답으로 아이가 울었던 오 분이라는 시간 동안 우리가 이미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아이도 어렴풋이 느꼈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울음이 많이 나와요?
세상의 어느 아이도 “나 지금부터 이런 이유 때문에 울기 시작한다”라고 예고하고 울지 않습니다. 아이 내면에서 감정의 복잡한 소용돌이가 일어나서야 불현듯 울음이 터져 나오지요. 이때 혼자 울지 않고 그 아이처럼 누군가를 찾아가 그 사람 앞에서 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혼자 우는 아이를 발견했다면 가만히 그 곁에 있어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때 아이가 우는 이유가 무척 궁금하겠지만 꾹 참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아이 스스로 이야기를 시작하니까요.

 

아이의 울음이 이미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고 다 울고 나면 아이가 알아서 울음의 속내를 꺼내놓습니다. 아이의 울음, 특히 누군가를 앞에 두고 터뜨리는 아이의 울음이 갖는 의미는 이렇듯 그 울음을 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 믿을만한 한 사람을 초대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당신이 초대받은 사람이라면 그저 열심히 울음에 동참해주고 가만히 기다리다가 나오는 이야기에 소박하게 반응하면 되는 것이지요. 당신이 그 아이의 부모든 교사든 언니든 형이든 말입니다.

울게 된 이유에 대해 평가하고 진단을 내리고 해법을 제시하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답니다. 복받친 마음이 솟구쳐 올라 터져 나오고, 뒤엉킨 심경을 깨끗이 비워내고,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울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이 과정에 필요한 대화의 파트너는 작은 손거울처럼 가만히 비춰주는 사람입니다.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아이의 울음에 조용히 참여하는 사람입니다. 

 

어른이라고 다를까요. 속상한 이유야 여전할지 모르고 앞으로도 별로 바뀔 것 같지 않다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나의 울음에 초대할 누군가 한 사람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른이 되면 자신의 울음에 누군가를 초대하지 않게 되지요. 혼자 몰래 울거나 울음을 참는 데 선수가 되니까요.

 

곰곰 생각해봅니다. 지난 여름 저를 찾아와 울었던 그 아이 앞에서 제가 울음을 터뜨린다면, 그 아이는 저에게 어떤 말을 해줄까 하고 말입니다. 아마도 아이는 이렇게 말해줄 테고 저는 엉엉 울 것 같습니다. 

 

울음이 많이 나와요?

 

글쓴이 김종휘는 일, 놀이, 문화 자율의 공동체 하자작업장학교 (www.haja.or.kr) 교사입니다. 지금은 잠시 쉬고 있지만 아이들과 벗하며 새로운 교육과 공동체를 그리는 그의 꿈은 여전히 진행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