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시장 누비는 지게꾼 무명씨들
동대문 시장 누비는 지게꾼 무명씨들
  • 승인 2005.04.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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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조명 아래

짊어진 삶의 무게

지게에 실린 무게만큼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

 

1905년 광장 시장에서 출발했던 동대문 시장의 역사가 100년을 넘기고 있다. 그간 한국전쟁과 대화재 등 여러 역정을 거치면서도 묵묵히 역사를 품고 있는 공간이다.


그 세월의 깊이만큼이나 변화도 많았다. 재래시장으로 출발한 동대문은 이제 현대식 패션몰들이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루 유동인구만 100만명이 넘고 3만여 개의 점포와 상인들만 10만명이 넘는다는 국내 최대, 세계 유일의 심야 패션시장.


연 매출액이 서울시 1년 예산과 맞먹는 10조원에 이르며 하루 24시간 쉬지 않고 사람과 물건, 차량이 넘실대는,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의 80%가 꼭 거쳐간다는 관광명소가 바로 이곳 동대문 시장이다.


동대문 시장은 수많은 애환과 상처, 그리고 희망을 담고 있다. 그 화려한 불야성의 이면에는 지금도 좁고 불편한 봉제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는 거친 손들의 상처가 남아 있다. 70년대, 오빠 학비를 위해 열 다섯, 열 여섯 나이에 ‘시다’로 시작했던 ‘소녀’들이 이제는 중년의 아낙이 되어서 여전히 미싱 앞에 앉아 있다.

 

세월이 변해도 여전한 지게꾼들
우리나라 패션을 이끌고 간다는 곳. 젊음의 열정과 생기가 넘쳐나는 동대문시장의 어두운 곳에서 묵묵히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또다른 이들이 있다. 바로 패션몰의 물건들을 옮기는 지게꾼들이다.


미싱사들의 손을 거쳐 완성된 옷들은 동대문의 수많은 가게들에 진열되고, 지방과 외국의 상인들에 의해 곳곳으로 팔려 나간다. 소매상들이 선택한 옷들은 지게꾼에 의해 버스로, 승합차로 옮겨진다. 이들 지게꾼들에게는 옷은 더 이상 옷이 아니라 ‘짐’인 것이다.


삶의 무게만큼 어깨를 짓누르고, 삶의 질곡만큼 자주 짊어지는 지게는 ‘이상한 나라’에 들어온 앨리스만큼 낯설어 보였다. 사회가 변화하고, 재래시장이 패션몰로 바뀌는 속도만큼 지게꾼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엘리베이터와 손수레가 이들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


하지만 이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지게꾼 1년차라는 김씨는 “지게꾼은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저 많은 짐들을 어떻게 빠른 시간 내에 다 처리하겠습니까”라며 시장과 지게꾼이 공생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세월이 변하고 시설이 현대화 되더라도 지방의 소매상들이나 외국의 ‘보따리 장사’들이 물건을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옮기고 싶어하는 이상 지게꾼들의 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결국 지게꾼들의 삶은 이곳 시장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쉬는 날도 새벽에 밥 먹어. 이제는 버릇이 돼서…”
동대문의 하루는 저녁에 시작된다. 매장들이 오픈을 준비하는 저녁 7~9시 사이가 지게꾼들에게도 가장 바쁜 시간이다.


한차례 태풍이 몰고 지나간 저녁 11시, 패션몰 주변은 여전히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래도 이 시간은 상인들보다는 쇼핑을 하거나 동대문 시장을 구경하려는 일반인이나 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에 지게꾼들에게는 ‘쉬는 시간’인 셈이다.


잠깐의 여유가 찾아들고 있었다. 한 패션몰 입구에서 담배 한 대를 피워물고 있던 지게꾼 강씨는 지금이 그나마 제일 한가한 시간이라고 설명한다.


“요즘 같으면 새벽 3시 정도 넘으면 별로 일도 없어요.”


조금은 한가한 시간이라는 밤 12시, 그러나 전화는 쉴 새 없이 걸려왔다. 하루에 백여 번씩은 지게를 짊어진다는 이들의 삶은 고단해 보였다. 이들에게 공식적인 휴일은 패션몰이 쉬는 매주 토요일.


여기서 ‘초보 지게꾼’을 만났다. 지게꾼 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20일 됐다는 양씨가 주변 지게꾼들의 신발을 가리킨다. 낡고 허름할 것이라는 편견을 비웃듯 지게꾼들의 신발은 유명 메이커의 로고가 선명한 ‘최고급’들이다. 어쩌면 하루 벌이를 다 털어넣어도 신발값에도 못 미칠 듯 싶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왜 그럴까 했는데, 온종일 뛰어다니다 보니 발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좋은 신발을 찾게 되더라구요.”


그랬다. 그들에게는 튼튼한 다리가, 그리고 그 다리를 지탱하는 발이 ‘재산’이고 ‘작업 도구’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유일한 ‘사치’는 ‘신발’이었다.


지게꾼 생활 4년차라는 김씨도 “아침이면 허리, 다리 안 아픈 데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주변에 있던 지게꾼들이 아픔을 토로하는 동안 40대 초반의 ‘젊은’ 지게꾼 이씨는 “이제 이골이 나서 괜찮다”며 한 달에 두 번 들어오는 반품 물량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의 키보다 두 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높이의 짐들을 스무 번 정도 지게로 날라서 그들이 손에 쥐는 돈은 2만3000원. 그 짐들이 하나씩 옮겨질 때마다 다리의 힘은 빠지고 어깨도 아파오지만 그만큼의 희망도 쌓여간다.


층마다, 매장마다 분류하는 그들의 손길은 쉴 새가 없었다. 밤 12시가 다가오니 몇 명씩 짝을 이뤄 식사를 하러 갔다. 저녁시간의 정신없는 발걸음을 뒤로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시간, “우리는 쉬는 날도 새벽에 밥 먹어요. 이제는 버릇이 돼서…”라며 씁쓸한 미소를 보냈다.

 

"지게에 내 몸을 맞춰 살아가는 거지"
지게꾼들에게 언론은 피하고 싶은 존재다.


“여기서 계속 죽치고 있어봤자 지팡이로 맞기밖에 안 한다. 빨리 가라”는 ‘늙은’ 지게꾼의 거친 말이 계속 됐다. 협회 총무라는 사람이 “이곳 사람들은 언론을 싫어한다”며 “딴 데 가서 알아봐라”고 재촉했다. 특히나 사진 촬영은 한사코 마다했다. 가방 속에 내비친 카메라의 모습만으로도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사진은 찍지 않겠다고 말하는데도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언론을 기피하는 것은 몇 해 전 이곳 사람들의 모습이 모 방송에 나가면서 커다란 홍역을 치렀기 때문이다. 방송사에서는 얼굴을 내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정작 이들의 얼굴이 고스란히 화면에 담겼다. 방송의 파급력은 컸다.


지게꾼 생활 10년이 된다는 임재정씨(가명)는 3년째 고향에 못 내려가고 있다. 고향 사람들이 방송에서 지게꾼 생활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본 후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방송 나가고 여기저기서 전화 오는데… 고향 사람들이 ‘아니, 너 서울에서 지게꾼 하냐’는 말에 창피해서 고향에 내려갈 수가 있어야지.”


‘이런 모습 나가면 어떻게 살아가냐’며 언론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되물었다.


“이보시오, 기자양반.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해? 어디 한번 말해봐.”
“지게 매고 사는 게 보기 좋은 일이야?”


적어도 아직도 사회의 편견 속에 살고 있는 그들에게는 직업에 ‘귀천’이 있었다. 그리고 ‘천한’ 직업이라는 시선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게에 내 몸을 맞춰 살아가는 거지”

동대문 시장 내부에서도 ‘귀천’은 분명했다. 새벽 시간에 함께 고생하는 것은 알지만, 그들에게 시장에 가게를 가진 상인들은 올려다보기에는 너무나 ‘높은’ 존재들이었다.


“그 작은 공간에 권리금이 억 단위야. 개중에는 돈만 아는 ‘쓰레기’들도 있어. 그런 사람들한테는 돈이 오물이지 돈이 아녀.”


이들의 말 속에는 가시가 돋아 있었다. 그래도 이들은 사회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뛰는 만큼 돈을 받아간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하루 열심히 발품을 판 돈은 요즘은 평균 10만원 정도 수준. 다른 일거리에 비하면 적지 않은 돈이다. 더구나 일할 공간이 있어 마음은 편하다는 것이다.


초보 지게꾼 양씨도 공사판에서 일하던 시절, 경기 불황으로 일정하지 않은 수입에 걱정했던 시간보다 매일 일할 수 있는 지게꾼 생활이 더 좋다고 한다.


“마음이 편하면 몸도 가벼워져요. 초등학교 다니는 막내한테 미안하지만….”


밤과 낮이 바뀐 생활이기에 가족과 떨어져 조금은 외롭다고 하지만 더 나은 생활에 대한 희망을 가득 안고 살아간다는 이들에게는 오늘 하루가 소중하다. 비록 드러내지 못하는 직업이긴 하지만 그 직업을 통해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자신들의 내일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축구 선수들이 신발에 발을 맞추고 살 듯, 살다보면 지게에 내 몸을 맞추게 돼.”


자신의 삶에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 동대문 시장 밝은 조명에 가려 묵묵히 걸음을 재촉하는 지게꾼들의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