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일하는 MZ를 위한 변명(3): 일중독자가 노동시간 제도를 설계?
[기고] 일하는 MZ를 위한 변명(3): 일중독자가 노동시간 제도를 설계?
  • 참여와혁신
  • 승인 2023.05.15 00:15
  • 수정 2023.05.15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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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황기돈 나은내일연구원 원장
황기돈 나은내일연구원 원장
황기돈 나은내일연구원 원장

윤석열 정부 3대 개혁과제 중 첫 번째인 노동시간 제도 개편에 급제동이 걸렸다. 고용노동부 장관은 개편(안)의 기본 취지를 “건강권과 선택권, 휴식권을 통해 실노동시간을 줄이며 포괄임금 오남용, 임금체불, 공짜야근 등 탈법과 편법을 없애”는 것이라고 늘 말해왔다. 취지에 포함된 개념만으론 일견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안인데도, 국민의 강력한 반대 여론에 부딪혀 대통령이 법안의 재검토와 MZ세대 의견수렴을 지시했다. 왜일까?

필자의 견해는 이렇다. 매끄럽지 않았던 과정 관리는 논외로 하더라도, 한국이 “오랜 시간 악명 높은 일 중독 문화”(NBC, ‘23.03.22)가 일상인 나라라는 점이 간과됐고, 그래서 개편의 방향도 일중독 문제의 해결보다 그 반대로 설정된 결과다. 이런 선택은 또 다른 국정 과제인 저출생 대책과도 조화롭지 않아 보인다. “긴 노동시간은 세계에서 가장 낮은 한국의 출산율의 원인”이라는 외신(워싱턴포스트, ‘23.03.12)의 지적이 따가운 이유다.

일중독의 원인이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에 그의 해소 및 완화, 특히 젊은 세대에 전이의 예방도 다차원의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 필자의 앞선 2개의 칼럼, ‘일하는 MZ를 위한 변명(1), (2)’에서 언급했듯이 젊은 노동자의 자율성 기반 창의성, 수평적 의사소통, 보상의 공정성 등 새로운 가치가 일터에서 존중돼야 한다. 아울러 일중독자가 아닌 사람의 눈엔 칼퇴근, 워라밸 중시가 근로의욕 저하나 불성실함의 문제가 아니라 일중독 내지는 번아웃 예방을 위한 필수 가치일 터다.

둘째, 실노동시간 단축도 일중독 문제의 해결에 불가결한 요소다. 일을 하지 않거나, 짧게 하거나 혹은 중단하면 엄습하는 불안증세가 일중독 금단현상이다. 이는 한국이 오랫동안 세상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나라였고, 최근 감소세를 보이지만 아직도 오래 일하는 나라에 속하는 주요 배경이다. 그러나 일중독에 의존하는 경제체계는 일하는 사람의 건강, 기업과 국가경제의 생산성에 해를 끼칠 뿐만 아니라 국격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한국은 세계 10위권 경제규모를 가진 “2022년 세계에서 6번째로 강력한 국가”(US NEWS AND WORLD REPORT)다. 노동시간의 길이를 보상과 경쟁력의 기준으로 삼는 로로드전략에서 하이로드전략으로 국가 경제전략을 전환하고, 실노동시간 단축을 일중독 치유의 출발점으로 보고, 관철을 위한 과감한 사고와 행동이 절실한 시점이다. 기존 개편안처럼 연장근로를 연단위로 관리하는 경우, 상한선을 다소 줄이는 방식으론 충분하지 않다. 그보단 정부가 ‘임기 내 OECD 평균(1,716시간) 수준으로 단축’ 등의 구체적인 목표와 로드맵을 제시해 사회적 논의를 진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셋째, 산재인정기준의 재검토도 필요해 보인다. 뇌심혈관질병은 일중독의 마지막 4단계(하이데, 2002)의 특징인 과로사와 연관성이 깊은 질병이다. 한국 정부도 이러한 위험에 대해 손을 놓고 있지 않았다. 고용노동부 관련 고시는, 발병 전 12주 동안 업무시간이 1주 평균 60시간(발병 전 4주 동안 1주 평균 64시간)을 초과하는 경우, 업무와 질병의 관련성이 강하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WHO는 2021년 ‘주 55시간’ 노동조차 뇌졸중과 심장병의 위험을 키운다고 경고한 바 있다. 한국의 산재인정기준을 일중독 및 과로사의 사후조치가 아닌 예방 중심으로 개편할 필요가 있다. 글로벌 표준을 따르자는 말이다.

장시간 노동은 일중독이나 과로사뿐만 아니라 세계 최저 합계출산율(0.78명, 2022년)의 핵심 원인이다. 저출생과 초고령사회를 대비해 실노동시간 단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올해 봄 발표된 윤석열 정부 저출생 정책의 5대 핵심분야 중 하나가 ‘일·육아의 병행’이고, ‘가족·양육 친화적 환경 조성’과 ‘기업의 일·육아 병행 지원제도의 이행력 강화’가 4대 추진전략에 속한다.

그런데 이 과제와 전략이 노동시간 제도 개편(안)과 조화롭지 않아 보인다. 예컨대 특정 주 5일 내내 오전 9시 출근, 밤 11시 퇴근 등의 주 69시간제가 시행된다면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아이 돌봄이 가능토록 제도를 설계해야겠지만, 외돌봄은? 과문한 탓인지 이들이 감당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장시간 노동하는 나라에서 정부가 직장인들에게 준 선택권은 ‘회사를 그만두거나, 아이를 안 낳거나’ 둘 중 하나”라는 한 시민단체(직장갑질119)의 지적이 뼈를 때린다.

직장인이 마음 놓고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게 하려면 경제적 지원도 중요하지만, 시간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해 보인다. 실노동시간 단축은 물론 출산·육아·돌봄 관련 휴가를 확대하며, 휴가 사용을 권리로 인정하는 기업문화도 조성·확산해야 한다. 사업주가 휴가 사용을 권리로 인정하고, 정부는 이를 촉진하며, 사업주가 각종 지원을 받았음에도 권리 행사를 보장하지 않을 경우 책임을 묻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는 뜻이다. 사업주도 저출생 및 초고령사회 대비라는 국가 대개조 과업에 동참해야 한다는 말이다.

노동시간 재설계가 기업의 필요 등 현안만이 아니라 일중독 해결과 초저출생 및 초고령사회 대비를 위한 국가 대개조의 일환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 설계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다. 최소한 일중독자가 아니어야 한다. 그래야만, “악명 높은 일 중독 문화”가 일상이 되어버린 사회를 문제로 인식하고 변화의 가능성을 활짝 열릴 것이다. 그럴 때 건강한 직장인으로서 자율성, 창의성, 온전한 의사소통, 공정한 보상이 구현되는 일터를 만들고, 자녀를 낳고 기르며 행복하게 살고픈 젊은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을 스스로 설계할 수 있을 터다. 이런 미래 비전을 일중독자가 위계, 권력과 돈 따위로 방해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드높여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