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배원, 교수를 꿈꾸다
집배원, 교수를 꿈꾸다
  • 성지은 기자
  • 승인 2009.03.03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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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들의 ‘희망 촉매제’ 되고 싶어
직업 바라보는 세상의 편견 사라지길
집배원 1호 박사 김명환 한국노총 조직국장

누가 시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편물 배달을 마치고 들어와 저녁식사를 하고 책상에 앉으면 밤 10시. 석사 논문을 쓰고 있을 당시였다. 피곤함을 무릅쓰고 공부를 하다 보면 새벽 두시, 세시가 훌쩍 넘었다. 논문을 마칠 때까지 하루 두세 시간 이상을 자 보지 못했다. 우편물을 배달하는 동안 벨을 누르고 기다리는 사이, 벨에 손을 올린 채로 깜빡 졸아 고객에게 핀잔을 듣기도 여러 번이었다. 그렇게 97년에 단국대 행정학 석사를 마칠 수 있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집배원으로 현업에서 근무하다 전국체신노동조합 법규국장을 거쳐 현재는 한국노총 조직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명환 국장. 85년,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집배원으로 집집마다 편지를 배달하던 그의 꿈은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학업을 그만둔 지 12년 만에 석사 학위를 받고 또 다시 12년이 지난 2009년 2월 20일, 정식으로 학위 수여를 받고 ‘대한민국 1호 집배원 출신 박사’가 됐다.

‘열정’이 만든 늦깎이의 공부
“대학을 다니다 그만두고 집배원이 됐지만 공부를 더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직업’에 대한 불만은 아니었죠. 3D업종이라고 불릴 만큼 일이 고되긴 했어도 ‘공무원’으로 그만큼 국민에게 사랑받는 직업이 있을까요?”

대학을 중퇴하고 우체국에 ‘비정규직’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편입을 하고 싶었지만 그 당시 여건이 허락지 않아 결국 공채 시험을 거쳐 정규직으로 ‘입사’를 하게 됐다. 용산우체국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공조실에 책상 하나를 끌어다 놓고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펼쳤다. 스스로 하기 싫어 공부를 그만둔 것이 아니기에 채 갚지 못한 빚처럼,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다.

김명환 국장은 “공부를 했던 것이 당시 ‘집배원’으로 일하던 나와 환경에 대한 불만은 아니었다”고 강조하며 “공무원 중에 그 많은 국민과 소통하고, 서비스 하면서 다정한 이웃으로 불리고 사랑받는 직업은 흔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 속에는 ‘집배원’의 긍지가 담겨 있었다.

그는 또 “내가 집배원이기 때문에, 끈끈한 동료애와 배려 속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최고의 조건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며 “방송통신대에 편입했을 당시, 주간에 시험을 봐야 하는데, 내 구역의 우편물을 대신 나눠서 배달해 준 동료들, 그리고 이해하고 응원했던 사람들에게 가장 감사하다”고 전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사회적 인식과 편견 바꾸고 싶어
노력이 컸던 만큼, ‘집배원 박사’라는 호칭에 대한 관심도 컸다. 그는 자신에 대한 수많은 관심 중 “집배원이 무슨 박사 학위가 필요하냐”고 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마치 ‘집배원이나 한 번 해볼까’라든지, ‘얼마나 못 배우고 어려우면 집배원을 할까’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인식을 바꾸고 싶었다”며 “공공부문에서 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낮은 자리에서 국민들과 함께 하는, 존경받고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전했다.

또한 “요즘 취업난으로 인해 소위 스펙이나 학벌이 ‘꿈’이 아닌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한 조건이 되고, 그 조건을 충족하고 나면 하루하루의 업무에 매몰돼 더 이상 활용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며 “직위나 직업이 그 사람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직업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박사학위를 받고 가장 보람이 있었던 점은 힘들고 어렵게 ‘박사’라는 학위를 얻었다는 것보다 ‘긍지와 자부심을 살려줘서 고맙다’는 동료의 전화를 받는 것, 그리고 그것이 여태껏 소중하게 일해 온 일터와, 노동조합 활동이라는 경험 속에서 이뤄졌다는 것, 어렵더라도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계기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디에서건, 자신의 일을 사랑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 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또 미래를 위해 희망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희망, 꿈, 그리고 일터
그는 이번 박사 학위를 준비하며 <우정종사원의 이직의도 결정요인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썼다. 오랫동안 집배원으로 근무하고 또 체신노조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우체국 내의 다양한 고용형태가 업무 몰입도와 직무 만족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 꼭 한번 연구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김명환 조직국장은 “각 고용형태별로 직무몰입이나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집배원을 중심으로 한 기능직이 가장 높았고 다음이 비정규직, 그리고 일반직이 직무몰입이 낮았다”며 “처음에 의외의 결과라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공채시험을 거친 후 승진과 일에 대한 비전을 갖고 들어 온 일반직이 생각보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나, 승진 기회가 적고, 하는 일이 한정되어 있어 실망감이 큰 것으로 분석된다.

오히려 처음부터 명확한 업무 안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정직하고 순수하게 몸을 움직이는 기능직과,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상시위탁 집배원이 업무 몰입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얼마나 일에 대한 행복감을 높이는지, 그리고 안정적인 직장과 일에 대한 자부심이 생산성을 높이는 데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분석했다.

ⓒ 봉재석 기자 jsbong@laborplus.co.kr

노동자로서의 ‘삶’을 말하다
현장에서 20여 년간 쌓아온 경험과 주경야독을 통해 얻은 결실, 그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보고 느낀 많은 것들이 이제 그가 다시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열정을 만들고 있다.

그는 “한국노총이 앞으로 바람직한 조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조직이 답보하거나 후퇴할 수밖에 없다”며 “이제 막 새로 시작하고 있는 젊은 노동자들은 의식이 많이 깨어 있고 역량이 뛰어나 그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추지 않으면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앞으로 자신의 경험을 살려 경험을 전파하고 ‘교수’로서의 꿈도 반드시 이뤄낼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다.

“등산을 하다 보면 한 발 한 발 걸어갈 때는 정말 힘듭니다. 숨도 차고 다리도 아프지요. 그렇지만 올라간 다음에 뒤돌아보면 내가 딛고 올라온 길이 보입니다. 한 발씩 나아갈 땐 잘 모르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많이 성장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꼭 공부가 아니더라도 좋습니다. 계획을 갖고 자신이 하고 싶은 목표를 향해 꾸준히 한 발씩 나아가 보길 바랍니다. 저도 앞으로 다시 나아가기 위해 지금부터 다시 새로운 꿈을 이뤄 나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