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내게 ‘뱃살’이죠”
“연극은 내게 ‘뱃살’이죠”
  • 참여와혁신
  • 승인 2004.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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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자 연극제’를 준비하는 사람들
잠시 접어놓았던 꿈, 내 삶의 빛이 되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을 꾸고,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아라.    

- 제임스 딘

“우리 중에 한 명이 로또에 당첨됐으면 좋겠다. 큰 건물 하나 지어서 방 한 칸씩 주고 차가 끊겨도 새벽 늦게까지 연습하고 다같이 출근할 수 있게.”
“바보, 로또 당첨되면 뭐 할라고 일하냐? 연극만 하면 되지.”
“그래도, 해 오던 일인데 출근은 해야지, 우리가 로또만 갖고 먹고 살 수는 없잖아, 출퇴근하는 차를 하나씩 사 주면 되겠다. 연습실도 짓고, 극장도 짓고…….”
 

 

내일도 다시 만나지만, 오늘의 헤어짐이 아쉬운 사람들. 얼마 남지 않은 공연을 준비하느라 힘든 일상을 쪼개 연극 연습에 몰두하며 땀을 흘리고, 새벽별을 보며 퇴근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근로복지공단이 주최하는 직장인들의 축제의 장 ‘근로자 연극제’가 올해로 25회를 맞이했다. 일하는 사람들의 삶과 희망을 무대 위에서 진솔하게 펼쳐놓고 있는, 오랜 기간 동안 연극제에 꾸준히 참가해 온 여러 극단 중 세 개의 순수 직장인 극단을 통해 무대 뒤의 땀과 희망을 만났다.

78년에 창단해 늘 아이와 같은 순수함을 지켜온 극단 <아해>, 3교대로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와서도 연습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삼성반도체 내 극단 <신예>, 노동자들을 위한, 노동자에 의한 연극을 해 온 따뜻하고 정감 있는 극단 <청년>의 단원들은 노동자로, 연극을 사랑하는 연극인으로서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매일 저녁 집보다 먼저 찾아가는 연습실
“이제 공연까지 20일 정도밖에 안 남았다. 토요일 밤 새면 일요일은 쉬게 해 주고, 아니면 토요일 들어가고 일요일도 나오든지. 어떡할래?”

늦은 저녁 구로공단 지하 연습실, 넥타이를 매고 부랴부랴 들어온 극단 <청년>의 배우와 스텝들이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구성진 가락을 뽑고 연습을 시작한다.
잠시전 왁자지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소품을 준비하는 사람, 앉아서 바라보는 사람, 지시를 하는 연출, 연습을 하는 배우 모두 금세 등에 땀자욱이 밴다.
사는 곳도 각양각색, 직업도 인테리어 디자이너, 신문사 계약직 직원, 인쇄소 기술자, 유치원 교사, 특수차량 판매, 법률사무소 근무 등등 모두 다르다.

이런 다양한 직업 속에서 보이는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 근속년수가 높다는 것이다. 평균 6~7년 정도 극단 활동을 한 단원들 대부분은 <청년>에서 머문 시간과 비슷한 시간동안 한 직장에서 일해 왔다.
연출자 신황철씨는 “연극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도 모두 인정받고 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며 “어디서든 꾸준히, 묵묵히 제 몫을 다 하는 사람들은 대접받게 마련인 것 같다”고 단원들을 칭찬했다.

삼성반도체 내 극단 <신예>의 김천만씨는 ‘당신의 끼를 보여 주세요’라는 카피에 매료되어 무작정 가입했다. 지금은 배우로서 누구보다 열심히 연습한다.
그는 “운동을 하고 난 후의 개운함 같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느낌”이라며 그 느낌을 전해주고 싶다는 듯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극단 <아해>는 공연을 마치고 주말마다 모여 다른 극단의 연극을 보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관극’중이다. 연극이 시작하기 전 잠시 대학로 한 호프집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새내기 변미명씨는 매일매일 보던 얼굴을 이제 주말마다 보려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직장을 다니면서 연극을 하는 것이, 고되고 힘든 것만은 아니다.
“연극을 하면서 일하는 것을 회사에서도 대단하게 생각하고 인정해 주기 때문에 더 힘이 난다”고 말하는 황인준씨는 화법이나 발음, 자신감 등 연극을 하면서 생겨난 여러 가지 장점들이 사회생활에서 아주 많은 도움이 된다고 한다.

또 “생애에 내가 아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모을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없는데, 그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고, 박수를 받는 것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짜릿한 느낌”이라며 웃어보였다.

 

야근과 연습, 직장과 연극의 사이길
“오늘 6시 땡 치고 나오니까 사장이 ‘언제든 내가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하면 나오지 마라’ 더군요.” “야, 그럼 백수 되는 거냐? 축하한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김밥과 통닭으로 저녁식사를 하던 <청년> 연습실에서 왁자한 웃음이 터진다.

직장인으로 구성된 극단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특히 연습 막바지에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특히 야근이 겹치거나 하면 거의 초죽음이다.
<청년>의 김승하씨는 “항상 연습 막바지에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를 갈아요. 하지만, 작품 올라가고 무대에서 박수를 받으면 뭐, 알죠? 제가 6년차예요. 6년차”라며 웃는다.

극단 <신예>가 소속된 삼성반도체는 3교대 근무라 배우들의 생활 패턴이 모두 다르다. 또 가끔 ‘투(12시간 근무)’를 뛰어야 할 때, 돌아가는 라인 앞에 서서 묵직한 몸을 가누고 있을 때 더욱 힘들다.
메이크업 테스트를 위해 조명 앞에 선 <신예>의 단원들은 테스트를 위한 잠시 잠깐의 몸짓, 한 마디의 대사에도 열정을 다했다. 서너 시간 정도밖에 못 자고 모였지만 조금만  더 하자고 ‘덤비는’ 배우들의 눈빛은 진지하고, 또 극에 몰두하는 엄숙함이 서려있었다. 

<신예>의 박명호씨는 주인공을 맡아 A4지 8장 가량의 대사를 외워야 하기 때문에 늘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고 다녀야 한다.
“연습시간에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흐름이 끊기는 게 무서워서 죽기 살기로 외운다”는 그는 “대사는 다 외웠나요”라는 연출의 매서운 말 한마디에 금세 대본으로 눈길을 준다.
하지만,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 같은 일을 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고, 또 다른 일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자부심을 느낄 만하다”는 <신예>의 이승현씨는 “연극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을 때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IMF의 시련을 이겨내다
꿈을 이루는 일이 현실에서 녹록하지만은 않다. 전문 극단이 아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힘든 것이 사실이다.
<청년>의 백은경씨는 “첫 회 공연을 하던 시절에 한 달 후 철거를 앞둔 건물에서 다 함께 산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전기는 안 끊기고 들어왔었죠. 돈은 안 냈던 거 같은데……. 태영씨, 거기 전기료는 누가 냈을까?”  

또 다른 초기멤버 정태영씨가 말을 받았다.
“그러게, 내가 안 낸 건 확실해. 아, 그리고 98년에 연습실이 없어진 적도 있었죠. 중간에 말없이 도망간 사람도 있었고, 6년 동안을 단란주점, 남의 연습실, 교회 등등 안 가본 곳 없이 다니다 작년부터 이 지하 연습실을 쓰기 시작했는데, 천국이죠.”

이러한 사정은 <아해>도 마찬가지이다.
15년 동안 <아해>를 지킨 연출 김종희씨는 98년 얘기를 하면 아직도 코끝이 찡하다.
“살기 힘들고, 바쁘다 보니 연습시간에 아무도 안나오는 거예요. 이제 여기서 접어야 하나 했어요. 7시쯤 연습실에 들어가 혼자 앉아 있다가 10시에 문 잠그고 타박타박 돌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켰는지……. 일년만, 조금만 더 버텨보자 한 것이 이제는 다 지난 얘기가 되어 버렸네요.”

 

가족보다 끈끈한 정
<아해>의 배우 조묘숙씨는 연극을 ‘뱃살’이라고 표현했다.
“두둑한 뱃살 보이죠? 오랜 시간 만들어 왔고, 어떻게 보면 부담스럽기도 한 존재지요. 하지만 어쨌든 내 일부잖아요. 떼어내기도 힘들고 잘 떨어지지도 않는…….”
<신예>의 연출자는 ‘척’하는 사람들은 연극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아마든 프로든 극 속의 인물에 대해 이해하고 빠져드는 사람만이 연극을 할 수 있죠. 사람의 삶을 사랑하고, 사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연극이고 제가 연극을 하는 이유입니다.”

연극은 자기만족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할 수 없는 장르다. 늘 똑같은 생활 속에서 좀 더 나은 나를 위해, 즐거움을 잊은 채 살아가는 또 다른 노동자를 위해 치열하게 자신의 꿈을 펼치는 사람들, 그들의 삶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