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27>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 정우성 기자
  • 승인 2009.04.0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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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이하의 대우에 분노했다"
소개비 떼면 한달 평균 수입 40만원 불과
보조출연자노조, 첫 단체교섭 성사 눈앞

 “화장실을 설치해 달라”

70년대 어느 노동조합의 복지 요구안이 아니다. 2009년 대한민국의 풍경이다.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위원장 문계순)은 사용자 단체인 대형기획사를 상대로 단체협상을 요구했고, 그 36가지 요구안 중 하나가 바로 ‘촬영장 화장실 설치 문제’다. 그러나 이처럼 너무나 당연한 요구를 하기 위해 보조출연자(일명 엑스트라)들은 수많은 고통과 시행착오를 감내해야 했다.

“우리가 왜 노동자가 아니냐”

2006년 9월, KBS 드라마 <서울 1945>의 막바지 촬영이 진행 중이던 경남 합천 세트장에서 보조출연자들과 반장(기획사 소속의 인솔자)간에 다툼이 있었다. 오후 6시경 당일 촬영분이 끝나 서울로 올라가려는 보조출연자들 50여명에게, 나머지 촬영이 있어 현장에 남아있던 보조출연자들 80여명과 새벽 1시에 올라가라는 반장의 고압적 명령이 떨어졌다. 50, 60대의 보조출연자들은 가뜩이나 30대 초반의 반장들에게 반말과 인격 모독성 언어폭력을 당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야간 수당도 지급하지 않으면서 새벽까지 기다리다 올라가라는 것에 분노했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2시간 후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지만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상경하던 버스가 첫 번째 휴게소에 이르자 버스에 타고 있던 보조출연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현재의 처우에 반발하며 노동단체나 국회에 호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벽 2시, 여의도 KBS 별관에 도착한 이들은 후발대로 올라오는 보조출연자들과 함께 문제 해결 방법을 연구했다. 결국 48명의 위임장을 받은 대표단은 한국노총을 찾아갔다.

문계순 전국보조출연자노동조합 위원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당일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서류를 준비해서 오후 4시 서울시청에 제출했지만 처음엔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이유는 ‘근로자’가 아니라는 것.

이에 문 위원장은 “24시간 일하고 일당 3만7천원 받는 우리가 왜 근로자가 아니냐”고 따져 물었고 오랜 실랑이 끝에 서류를 접수시켰다. 그리고는 3일이 지난 2006년 9월 11일, 덜컥 노동조합 필증이 교부됐다.

“노조만 만들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영화산업노조가 7년 만에 필증이 교부된 것과 달리 단 3일 만에 노조 필증이 교부되자 신이 난 문 위원장과 대표단은 조합원을 모으는 일부터 시작했다. 호응은 뜨거워서 3일 만에 100명, 한 달 만에 300명의 조합원을 모집했다.

그러나 노조만 만들면 모든 것이 다 되는 줄 알았던 문 위원장에게 사무실을 임대하고 간부들을 상근시켜야 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가입된 조합원들이 있었지만 매달 조합비 1만 원을 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사무실도 문 위원장이 구해야 했다. 마침 영화 <황진이>에 스님역으로 섭외가 들어와 삭발의 대가로 받은 출연료 200만원으로 신길동에 조그만 사무실을 열게 됐다.

그런데 노조활동의 진짜 어려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매월 100여만 원의 사무실 운영비를 감당하기 위해 문 위원장은 사비를 털어야 했다. 노조의 수입이라고는 9개 부서의 부서장과 차장이 내는 조합비 20만 원이 전부였다.

3년간의 노조활동으로 문 위원장은 상당한 빚을 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문 위원장은 “내가 조합에 빌려준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조합비를 못 내서 미안해하는 조합원에게는 마음만은 변치말자고 말한다”고 밝혔다.

보조출연자의 ‘근로자성’ 인정받아

재정상의 문제만이 아니다. 노조가 결성되고 조그만 사무실도 얻게 되자 보조출연자노조는 방송 3사와 대형기획사였던 월드캐스팅, 한국예술 등에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싸늘함을 넘어서 ‘무시’ 그 자체였다. 교섭에 응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보조출연자노조는 2007년 단체교섭 해태에 의한 부당노동행위로 검찰에 대형기획사를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고발 6개월 만에 서로 교섭을 잘 해보라며 업체들에 대한 기소유예를 결정했다. 보조출연자노조는 2008년 2월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이들 업체들을 고발했고, 이 업체들에게 4월 25일까지 출두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다급했던 업체들은 단체교섭을 진행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몇 차례 실무접촉만을 진행한 채 교섭을 중단시켰다. 업체 사장 중 한 명이 방송국 측에 문의하니 “보조출연자노조가 노동조합도 아니고 이들과 단체교섭을 진행하면 용역계약을 파기하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섭을 중단한 것이었다. 노조에서 다시 지방노동위원회에 고발했지만 보조출연자의 근로자성 문제로 지노위는 업체들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고발을 기각했다.

그런 와중에 서울행정법원은 2008년 11월 25일 보조출연자 김모 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요양불승인처분취소소송에서 “김씨가 외주제작 업체인 태양기획에 고용된 것으로 볼 수 있어 공단이 근로자지위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요양을 불승인한 것은 부당하다”는 판결을 내려 보조출연자의 근로자성을 인정했다.

이런 판결에 따라 중앙노동위원회는 12월 17일 노조의 고발을 받아들여 업체들에 대한 부당노동행위를 인정하고 시정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올해 2월 5일부터 태양기획, 한국예술, 한강예술, 대웅기획을 사용자로 한 단체교섭이 진행 중인 상태다.

일당 3만7천원의 고단한 삶

현재 보조출연자들의 실상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경제위기로 주연배우들이 개런티를 깎아 회당 1500만원을 받기로 했다는 기사들이 오르내리고 있지만, 보조출연자들이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대기와 촬영을 반복하며 받는 임금은 고작 3만7천원이다. 이 금액도 방송국이 규정한 5만3천원에서 기획사들의 소개비를 제외한 금액이다. 무려 20~30%의 소개비를 받는 것이다. 이마저도 일거리가 줄어 조합원들이 평균 받는 한 달 임금은 대략 40만 원 선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조는 단협 요구안으로 △조합원에 대한 조합비 일괄 공제 △시업, 종업 시간의 확정 △촬영 현장의 임시화장실 설치 △출연 시 착용 의상의 세탁 △촬영 현장의 음료수 비치 △후생복지기금 출연 등 가장 기초적인 것들을 제시했다.

특히 촬영장 도착부터 시업으로 인정하는 현행 관례로 인해 보통 지방 이동 시 왕복 4~6시간의 무급시간이 포함되어 실제 근무시간보다 적은 임금을 규정받는 현실에서, 시업시간을 촬영장으로 이동하기 위해 모인 시간으로 규정해달라는 요구는 현재 노조의 중점 요구사항 중 하나다.

이외에 현행 60일 이후 임금이 지급되는 관행이나 몇 년째 오르지 않는 임금에 대한 부분은 교섭을 통해 차차 해결하겠다는 것이 노조의 입장이다. 문계순 위원장은 “노동조합 만들어졌다고 반장들이 반말하지 않고 여성출연자에게 ‘이모님’, ‘어머님’ 하고 부르는 것을 보고 굉장히 보람을 느꼈다”며 “지금 당장은 힘들고 괴롭지만 현장에서 긍지를 가지고 현장의 불합리한 점을 하나씩 해결한다면 우리도 인간다운 삶을 찾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현재는 당당한 여성 위원장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문 위원장이지만 남몰래 울었던 적도 많다고 한다. 그와 같은 노력이 이제 대형기획사들과의 공식적인 단체협상 타결로 결실을 앞두고 있다. 노동인권 사각지대의 또 다른 공간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