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양극화, 일자리가 사라진다
경제 양극화, 일자리가 사라진다
  • 승인 2004.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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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기업에서 9년간 성실하게 일하다가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실직자가 됐다는
‘무명인’. 생산직이라도 어떻게든 일자리를
알아 보려는데 나이 제한에 걸려
아직도 일자리를 못찾았단다.
그리고 한 취업사이트에
“자살 밖에는 길이 없네요…”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자신을 ‘무명인’이라고 쓴 데 대해
“우리나라에서 저라는 존재는 필요 없죠.
알고 싶지도 않을 거고”라면서
깊은 좌절감을 드러냈다.

 

전업주부로 있다가
남편의 실직 때문에 일자리를
알아 보고 있다는 한 주부는
인터넷 상거래나 요리 등을
가르치는 직업훈련을 받아 보려 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직업훈련 기관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경쟁률이 너무 높아져
아예 훈련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꾸준한 성장, 그러나 일자리는
일자리 없는 성장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하다. 사상 유례없는 수출 호조와 반도체, 자동차 등 일부 업종의 호황 등에도 불구하고 국내 내수 시장은 좀처럼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투자도 가라앉은 상태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절망감에 빠져 있다.

 

실제로 지난해 우리 경제성장률은 3.1%였고 수출성장세는 무려 19.3%에 달했다. 그러나 정작 일자리는 3만 개가 줄어드는 이른바‘일자리 없는 성장’의 모습을 보였다.

 

이같은 문제는 심각한 경제양극화에서 비롯된다는 지적이다. 최근 한국 경제는 수출·내수 양극화, IT와 비IT 등 산업 양극화,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양극화, 고용 및 소득의 양극화 등이 심화되고 있다.

 

먼저 수출과 내수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상황이다. GDP대비 수출비중이 2002년 40.5%에서 올 1/4분기 54.1%로 크게 늘어난 반면 내수 비중은 66.3%에서 64.5%로 줄어들었다.

 

이처럼 경기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가장 큰 원인은 우리나라 수출구조가 부품 설비의존도가 높은 IT산업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수출증대가 국내 생산 및 일자리 창출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IT 등 특정 주력품목의 수출비중은 지난 2001년 23.6%에서 2004년 1~5월 중 27.8%로 수출의존도가 더욱 심화되고 있으며, GDP대비 IT산업 비중도 2001년 9.0%에서 2004년 1/4분기에는 12.4%로 늘어났다. 하지만 제조업 종사자 중 IT산업 종사자 수는 같은 기간 중 14.3%에서 14.0%로 오히려 하락했다. 또한 반도체, 무선통신기기 등 IT산업은 부품 설비의 수입의존도가 매우 높다.

 

현재 국내 휴대폰 업체들은 핵심부품인 모뎀 칩을 거의 전량 수입하고 있으며 플래시 메모리, 배터리 등 나머지 부품도 30~40%를 수입에 의존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수익성이 좋은 IT 핵심 부품의 생산 및 공급은 주로 미국 일본 등 외국 업체가 맡고, 국내 업체들은 수익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조립생산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해당 산업전문가들은 “향후 IT산업 중심의 산업재편과 수입 의존적 산업구조가 더욱 심화될 경우 국내 산업간 생산 및 고용연계 효과의 감소로 내수 및 고용불안이 악화되는 추세가 고착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하고 있다.
수출지역 및 품목별 수출비중의 쏠림현상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대중(對中) 수출은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는 반면 대미 수출과 대일 수출은 꾸준히 하락세를 나타내고 있다. 현재 대중 수출 비중은 25.7%(홍콩 포함)까지 상승해 대중화권이 우리나라 최대 수출국으로 부상하는 등 수출의존도가 매우 높아진 상황이다.

 

반도체, 자동차, 무선통신, 선박, 컴퓨터 등 5대 수출품목의 수출비중이 전체 수출물량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 중국 일본에서 우리나라의 5대 수출상품이 상승하는 등 이들 3국간 교역구조의 편중이 심화되고 있다.

 

금융연구원 신용상 연구위원은 “중국의 급속한 산업구조 고도화나 위기발생 여부, 전 세계적인 IT 경기, 주요 교역국의 경기변동 및 교역분쟁 등 대외경제 환경에 따라 국내 경제가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적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경고했다. 최근 미국 금리인상 및 중국의 긴축정책 관련 발언들로 인해 우리 금융시장이 크게 요동친 것이나 국제 원자재 파동으로 조업중단 사태가 발생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나마 현재 잘 나가고 있는 산업분야도 위기가 상존하고 있다. 자동차의 경우 전세계적으로 1500만대의 생산과잉 상태이기 때문에 수출의존도가 높은 우리로서는 언제든지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반도체도 내년 이후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2006년에는 다시 공급과잉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온다.

IT산업과 비IT산업 간의 불균형도 점점 커지고 있다. 올 1/4분기 IT산업 생산 증가율은 25.1%에 달한 반면, 비IT산업은 3%에 그쳤다. 특히 IT분야는 자동화나 높은 부품수입 의존도 때문에 고용창출 효과가 높지 않아 일자리난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나쁜’ 일자리는 사회갈등 부른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는 사회 갈등으로까지 번질 가능성이 있다. 지난해 제조업 기준 대기업의 설비투자는 27.4% 늘어난 반면, 중소기업은 오히려 3.4%가 줄어들었다. 중소기업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85%가 넘는 우리 현실에서 대기업 중심의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삶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대기업 사내하청 업체 면접을 본 김모(29)씨의 사례는 이같은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구직자들 사이에서는 사내하청 업체를 ‘구멍가게’라고 부른다. 국내 소규모 기업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별칭인 셈이다. 이른바 ‘구멍가게’에서 일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간 김씨는 한여름에도 두터운 작업복을 입고 쇳가루 날리는 작업장에서 용접을 하고 있는 작업환경을 목격한다. 면접에서의 질문은 김씨의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면접관이 ‘일년 365일 하루도 안 쉬고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아무리 일자리가 급한 구직자들이지만 너무 한 거 아닌가요? 면접관이 그러더군요. 12시간 맞교대로 일하고 명절에도 출근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다고. 그런데도 월급은 100만원 정도라는데 사람들이 중소기업에 왜 안 가려고 하는지 알겠더라구요. 물론 일자리를 구할 수 없으면 그 자리라도 가야겠지만요.”

결국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동반 성장할 수 있는 산업 구조를 만들어 내지 못하면 고용과 임금구조 또한 양극화가 심해지고, 이는 사회 갈등으로 번지게 될 것이다.

 

경쟁력 강화와 일자리 창출 위한 사회적 합의 필요
이런 가운데 설비 투자 부진도 심각한 상황이다. 지난해 2/4분기부터 연속 4분기 감소세를 지속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2차 오일쇼크 때와 외환위기 때 등 다섯 차례에 불과했다.

 

95년 14.1%였던 설비투자율은 지난해 9.5%까지 떨어졌다. 경제규모가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는데도 투자는 늘어나지 않아 더욱 심각하다. 기업들이 현금을 쌓아놓고도 투자에 나서지 않고 있다. 올 3월말 현재 기업들의 현금보유 비중은 지난해 말보다 0.7% 높아졌고, 제조업 평균 부채비율도 96.7%로 떨어졌다.

이렇게 기업들이 현금을 쌓아두고 있는 현상은 SK와 소버린 간의 갈등에서 보여지듯이 지배구조가 취약한 국내 기업들이 언제든지 해외 투기자본의 적대적 M&A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들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현금을 모아두고 있는 셈이다.

 

특히나 국내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을 통해 상당수 금융기관이 해외자본의 손에 넘어간 상태가 이같은 현상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 이들 금융기관이 국내 산업을 고려하는 영업전략을 펼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다른 원인은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국내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비전을 공유하고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노력하는 것이 필요한데 지금은 여전히 대립과 갈등의 사회 분위기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산업경쟁력 강화와 이를 통한 좋은 일자리 만들기가 쉽지 않을 수밖에 없다.

김영호 전 산업자원부 장관은 “산업의 설 자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노사정의 사회적 대타협이 한국경제를 되살리면서 좋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