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피크제 시행 1년을 돌아보다
임금피크제 시행 1년을 돌아보다
  • 승인 2004.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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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화 묘약인가, 강요된 희망인가?


고령화 시대의 대안 중 하나로 떠오른 임금피크제가 은행권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실효성을 둘러싼 논란도 가열되고 있다.
지난 10월 14일 우리은행 노사는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 도입에 전격 합의했다. 내년 1월부터 전 직원을 대상으로 적용되는 이 제도는 정년을 현행 58세에서 59세로 1년 연장하되 만55세가 되는 첫 해는 연평균 기본연봉의 70%, 2년차(56세)에는 60%, 3~4년차(57~58세)에는 40%를 적용한다.


기업은행과 산업은행이 별정직 직원 등을 대상으로 일부 실시하고는 있지만 직원 전체를 대상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기는 우리은행이 처음이다. 여기에 제일은행, 국민은행 노사가 임금피크제 도입을 놓고 협상을 벌이고 있어 국책은행에 이어 시중은행으로의 확산 여부가 주목된다.


IMF 이후 은행권 노동자들의 ‘체감 정년’은 40대 후반까지 단축됐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피크제가 실질적 정년연장과 일자리 창출을 위한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지만 실제 도입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말이 좋아 ‘순환 보직’, 실제로는 좌천?

작년부터 임금피크제를 시행하고 있는 신용보증기금 동부채권관리본부 김모씨(56)의 하루는 거리에서 시작된다. 오전 9시, 채권추심을 위해 돌아보아야 할 업체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수첩을 들고 전철역 앞에서 하루의 이동 경로를 그려보는 김씨.


“지점장실에 앉아 업무보고를 받으며 시작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죠. 눈높이가 거기에 가 있으면 이런 일 어떻게 하겠습니까? 퇴직해도 어디 가서 여기만한 일자리 못 구한다, 그렇게 생각해야 속이라도  편하지요.”


신용보증기금에서 임금피크제의 대상이 된 사람은 지난해 9명, 올해 13명으로 모두 22명이다. 이들 중 19명이 김씨처럼 채권추심 업무를 보고 있다. 신용보증기금은 지점장급 직원이 만 55세가 되면 일단 퇴직금을 중간정산하고 퇴직시킨 후 채권추심·소액소송 등을 맡는 별정직으로 재입사시키는 방식으로 임금피크제를 실시하고 있다.


이런 방식의 임금피크제는 기업은행이 2002년 초 ‘교수제’라는 변형된 형태로 처음 도입했다. 만 55세가 된 부장 및 지점장급 이상 간부의 정년(만 58세)을 보장하는 대신 채권회수, 검수업무, 임대차 조사 등 ‘후선업무’에 배치하고 임금도 매년 줄여 나가는 방식이다. 임금은 첫해 10%, 2년차 24%, 3년차에는 50% 정도 삭감된다.


그러나 기업은행의 ‘교수제’는 일정 연령에 다다른 직원 모두에게 적용되지는 않는다. 만 55세가 된 대상자들의 성과를 평가해 지점이나 부서의 성과가 뛰어나면 그대로 부장 및 지점장으로 남고 성과가 떨어지면 교수제의 대상이 된다. 올해까지 기업은행에서 55세가 된 직원은 모두 60여 명 가량인데 성과평가를 통해 부장 및 지점장에 남은 사람은 9명, 나머지 50여 명은 저성과자로 분류돼 검수나 업무 지원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당사자들 사이에서는 성과가 저조한 사람들을 밀어내기 위한 퇴직 종용이라는 반발도 있다. 실질 정년이 58세로 보장되어 있지만 ‘명예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50세 전후에 ‘한직’으로 발령내 강제 조기퇴직 분위기를 만들었던 은행권의 관행을 보기 좋게 포장한 제도라는 것.


실제로 이들 은행에서 임금피크제를 적용받는 사람들이 현재 맡고 있는 업무는 ‘역직위제도’라는 이름으로 이전부터 존속해 왔다. 업무부 업무추진역, 인사부 조사역, 검사부 검사역과 같은 자리는 사고를 내서 회사에 손실을 입혔거나 문제가 있는 사람을 전보시키던 직위였다. 그러던 것이 IMF를 지나면서 명예퇴직을 받아들이지 않는 직원들의 ‘유배지’가 된 것이 현실이다.

 

신규채용과 인사적체 해소 기대

이런 불만에도 임금피크제가 확산되고 있는 이유는 뭘까. 금융권 노동계는 조합원들 사이에 만연한 고용불안 심리를 이유로 꼽는다. 전국금융산업노조의 공광규 정책실장은 “IMF 이후 은행권은 상시적 구조조정 체제가 자리잡았다”며 “은행권에서 정년 퇴직자는 천연기념물이라고 할 정도로 강제 조기퇴직이 만연해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지난 5월 금융노조가 34개 금융기관 1753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임금피크제 도입찬반을 물은 결과 67.2%가 찬성했다. 찬성 이유로는 ‘정년보장’이 82.5%로 가장 많았다.


기업은 인건비 절감과 인사적체 해소를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다. 신용보증기금의 신흥문 인사 부부장은 “55세가 되면 8000만원을 웃돌던 대상자의 평균연봉이 임금피크제 실시 이후 4300여 만원 가량으로 떨어져 연봉 2500만원 정도인 대졸 신입사원 1.3명을 더 채용할 수 있는 재원이 생겼다”고 설명했다.

 

이 회사는 2007년까지 72명이 되는 임금피크제 적용 대상자들의 인건비를 환산하면 모두 80억여 원의 인건비 절감효과를 거둘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실제로 신보는 2003년 하반기, 임금피크제 시행으로 인해 절감된 인건비와 생산성 향상분을 감안해 당초 신규채용 예정인원에 60명을 추가해 160명을 채용했다.


기업은행 인력개발부 유일광 과장은 “인건비 절감도 있지만 인사적체가 해소되면서 조직에 활력이 생긴 것도 큰 성과”라고 말한다. 실제로 신용보증기금과 기업은행의 경우 조합원들의 인사적체에 대한 불만이 노조가 적극 협상에 나서도록 한 요인이 됐다.

 

임금피크제의 대상인 3급 이상의 직원(일반 기업의 팀장급)은 조합원이 아니지만, 인사적체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평직원들은 전부 조합원이기 때문이다. 신용보증기금 노동조합의 한 관계자는 “시중은행에서도 노조가 희망퇴직에 합의해 주게 된 배경에는 조합원의 승진욕구를 무시할 수 없다는 사실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귀띔한다.


두 마리 토끼 vs 미운 오리새끼?
결국 현재의 임금피크제는 임금삭감 및 직급 강등을 정년보장 또는 연장과 맞바꾸는 형식이다. 그러다 보니 금융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노사가 임금피크제 도입 협상을 벌이고 있는 주택은행의 이모씨(41세)는 “이미 단협상에 58세로 보장되어 있는 정년조차 지켜지지 않는데 명목뿐인 정년 연장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한다. 이씨는 “경영진과 노조가 생색내기식으로 임금피크제에 합의하는 것은 오히려 은행원의 조기퇴직이라는 본질적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임금피크제는 성과급이나 직무급 위주의 연봉제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서구에는 없는 제도로,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다. 우리보다 훨씬 빨리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대기업의 77.5%가 정년연장이나 재고용 방식의 임금피크제를 택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정년 연장형’이냐 ‘정년 보장형’이냐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특히 개별 기업 노사의 협상에서는 임금 삭감률, 퇴직금 일괄정산 문제 등이 가장 큰 쟁점이어서 실질 정년연장과 장기근속자의 숙련 및 노하우 활용이라는 본래의 취지를 잘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4월 대한상공회의소가 내놓은 ‘임금피크제 도입기업의 애로 및 업계의견’ 보고서에 따르면 임금피크제 도입기업의 대부분이 ‘적용되는 대상자에 대해 적정한 전문 직무 부여의 어려움’을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지적하고 있다.
고령노동자의 생산성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안을 찾지 못하면 기업에서는 고령자의 임금 비용을 ‘임금 채무’로 생각할 수밖에 없고, 노동자는 임금 삭감과 직무 불만족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다.


은행연합회 노사협력팀 공성길 팀장은 “임금피크제 도입에 따른 새로운 직무개발이 시급하지만 은행업무의 특성상 새로운 업무를 개발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한다. 공팀장은 “굳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지 않더라도 일정 연령이 되면 후선으로 배치되는 게 일반 은행의 관행이어서 은행으로서는 현행 임금피크제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신용보증기금의 경우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서 ‘업무지원직’이라는 직군을 신설해 채권추심, 소송, 신용조사서 감리, 컨설팅, 연수원 교수, 콜센터 상담원 등의 직무를 개발했지만 22명의 해당자 중 19명이 채권추심업무를 수행하고 있고, 1명이 신용조사서 감리업무, 2명이 소액소송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정작 오랜 업무 속에서 습득된 노하우를 살릴 수 있는 컨설팅 업무나, 연수원 교수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은 한 명도 없다.


금융노조 김기준 정치위원장은 “나이와 임금만을 기준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노사가 제대로 된 직무 평가를 통해 고령자의 장점을 살려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공정한 평가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제 막 도입이 논의되고 있는 임금피크제가 진정한 고령화 시대의 대안이 될지 노사 모두의 ‘미운 오리새끼’가 될지는 우리 노사의 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