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산업이 흔들린다
전통산업이 흔들린다
  • 참여와혁신
  • 승인 2005.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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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청주의 월드텔레콤 공장.
칼바람 속에
힘든 발걸음을 옮겨 출근한 노동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들을 맞이한 건 텅 빈 공장,
어제까지 말짱하던 기계들이 사라져 버렸다.
S전자에 컴퓨터 헤드 장착 부품,
영상기기 및 음향기기(DVD 플레이어 부품) 등을
생산해 납품하던 노동자들의 일터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

 

이 회사는 1998년 이후 해외공장 투자 악재와
자금난에 빠진 상태에서
S전자의 설비 중국 이전과 겹치면서
2001년 1200여 명이었던 직원들이
올해는 400여 명까지 줄어든 상태였다.
월드텔레콤 노동자들은 S전자를 상대로
고용보장 문제를 제기했으나
결국 지난 6월 공장폐쇄로 이어졌다.

 

산업연구원 자료에 의하면 지난 2001년 2026개이던 300인 이상 제조업 사업장이 지난해에는 1617개로 줄어들었다. 이틀에 한 개 꼴로 기업체가 사라진 것으로 이로 인해 일자리가 하루에 150여개씩 없어진 셈이다.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 그나마 전통산업은 성장의 길마저 막힌 채 기업 규모를 줄이거나 외지에 둥지를 틀기 위해 떠나고 있다. 지난 시기 우리 경제를 이끌어온 전통산업이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날개 꺾인 섬유·화섬업계
1970~80년대 경제 성장의 견인차로 불렸던 섬유산업. 1990년대 초 중국시장을 대상으로 신규업체가 생겨나고 설비를 늘려 한국 경제의 건재함을 보여줬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차입금에 대한 부담과 중국의 급속한 성장은 섬유산업의 목줄을 죄어왔다.


결국 수출부진과 공급과잉으로 인한 채산성 악화, 금리부담이라는 멍에로 날개가 꺾이고 말았다. 많은 기업들이 중국을 위시한 해외로 진출했고, 이에 따라 국내 고용은 줄어들었다. 그 결과 섬유산업의 메카 대구지역의 경우 월평균 종업원수가 2001년 4만4270명으로 1998년에 비해 1.7% 줄어들었다.


고용감소와 함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섬유업계의 경우 20인 미만인 소규모 사업장이 전체의 77%에 달한다는 점이다. 자체적인 경쟁력을 갖추기 힘든 고만고만한 업체들이 난립함에 따라 경쟁력은 물론이고 고용도, 질도 저하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비교적 덩치가 큰 화섬업계도 변화의 과정에서 노사가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갈등을 빚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생산량이 늘어나고 국내 업체의 수출은 줄어들면서 채산성이 떨어지는 품목을 정리하는 상황”이라는 게 한국화섬협회 김영식 부장의 설명이다.


14개의 화섬업체 중 최근 2개 업체가 문을 닫았고, 앞으로도 5개 이상이 더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노조는 고용안정을 해치는 사업부문 축소를 반대하고 나섰고 갈등이 폭발했다.


한 달 넘는 파업으로 노사 갈등이 깊어지고 있는 코오롱 구미 공장이 이런 경우다. 코오롱은 경쟁력을 상실한 화학섬유 부문을 축소하기로 결정하고 구미공장 내 하루 60톤 생산규모의 낡은 폴리에스테르 원사 생산라인의 철수를 추진하고 있다. 이를 대신해 전자소재 등 첨단 고부가가치 제품 생산을 늘린다는 방침이다.
이에 대해 노조는 인원 재배치를 통한 고용보장이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와중에 노동자들의 일자리는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화섬협회에 따르면 2000년 2만2100명이던 화섬업계 노동자는 2002년 1만7700여명으로 4400명이 줄었다.

 

굴뚝 산업의 비애
제조업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전통산업의 경쟁력 상실은 기업의 해외이전과 산업공동화로 이어지고 있다.


산업자원부 조사에 따르면 2003년에 제조업 해외투자가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중국 투자는 69.8%로 크게 늘었다. 중국투자 중 전자통신장비, 기계장비 등 중화학공업이 53%, 섬유, 의류 등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이 47%를 점하고 있다.
이러한 해외투자 증가세는 지난 2002년까지는 대기업이 주도했으나 2003년부터는 중소기업이 57.6%(2003년 9월 현재)로 처음으로 대기업을 추월했다. 특히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 현황을 국가별로 분류하면 중국 진출이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산업의 쌀이라는 철강업계의 중국진출도 속도를 더하고 있다. 이미 포스코를 포함한 10여 개의 국내 철강사가 다롄지역에 진출해 있고, INI스틸도 1400억원을 들여 공장을 짓기로 다롄시정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상태다. 다롄시 당국이 이 지역을 중국 조선업의 메카로 키우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조선부품단지 조성에 박차를 가하면서 국내 부품사들도 다수 참여 의사를 밝히고 협의중이다.

 

국내 시장이 재편되고 있는 화섬업계의 경우도 중국시장 진출이 줄을 잇고 있다. 동국무역은 2006년까지 중국 광동성 주하이 현지 생산규모를 연산 1만8000톤 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효성도 중국 광동성에 연산 8000톤 규모의 스판덱스 공장을 건립하고 있고, 유럽에도 연산 1만6000톤 규모의 공장설립을 추진, 2006년이면 연간 생산능력이 6만톤으로 늘어나게 된다.


기업들의 중국진출로 인해 중국현지에는 2만2000개의 한국기업이 100만명의 인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지금도 매일 12건씩의 대중국 신규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중국에서 생산하는 물건들이 역수입되면서 산업 고도화를 이루지 못한 기업의 고용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는 2003년 9월에 실시한 ‘중소제조업의 생산시설 해외이전에 관한 조사’에서 해외생산제품의 44.4%가 국내로 역수입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IT산업의 성장, 그러나…
전통산업의 불황 속에서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불리는 IT산업(반도체/컴퓨터/사무기기/통신장비 등)의 눈부신 성장은 굴뚝산업의 현 위치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있다.
전통산업의 산업생산지수(2000년=100)는 2003년 104.7로 소폭 상승한 반면, IT산업의 경우는 같은 기간 129.2로 두 산업간 간격이 급속히 벌어졌다. 이러한 생산격차는 전통산업의 노동생산지수가 99년 이후 지속적으로 하락세를 보이는 반면 IT산업은 같은 기간 50~100%의 높은 성장률을 보여 더욱 커졌다.


그러나 IT산업은 높은 가치 창출에도 불구하고 고용창출에는 큰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GDP대비 IT산업 비중은 2001년 9.0%에서 2004년 1/4분기 12.4%로 확대됐다. 하지만 제조업 종사자 중 IT산업 종사자수는 동 기간 중 14.3%에서 14.0%로 오히려 줄었다.
이는 IT산업 핵심부품의 해외의존도가 높아 수출에 따른 생산 확대가 투자보다는 부품수입 증가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
전통산업의 위기는 전체 취업자중 제조업 종사자 비중 감소에서 확인된다. 1990년 27.2%를 기록하던 제조업 취업자 비중은 지난해 18.9%로 75년 이후 처음으로 18%대에 진입했다. 이같은 제조업 취업자 비중은 70년대부터 제조업 해외이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돼 산업공동화가 심각한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전통산업이 국민경제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여전히 크다. 산업별 경제성장 기여도를 보면, 80년대 제조업 성장이 경제 전체 성장에 기여한 비율은 34%였지만 1997년 이후에는 49.1%로 상승해 제조업의 성장 기여도가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제조업이 경제성장을 주도했으며 경제에서의 제조업 역할이 감소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동계도 최근 기업의 해외 진출과 이에 따른 일자리 축소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제조업 사업장 중 상당수가 해외로 진출했거나 진출할 계획을 갖고 있어 제조업 공동화를 먼 미래의 일이 아닌 발등에 떨어진 불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독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고용유지와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사간 합의는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독일의 지멘스는 근로시간을 35시간에서 40시간으로 늘리는 대신 공장 해외이전을 백지화 했고, 보쉬도 프랑스 공장의 근로시간을 35시간에서 36시간으로 늘렸다.


문제는 노사가 함께 산업공동화를 막으면서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을 찾아 나가는 것이다. 기업은 기업대로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술개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하고, 노조도 일자리를 지킬 수 있는 최선의 대안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