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아 가지마라, 우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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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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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멘스 노사, 일자리 유출 방지 위한 노동시간 연장 합의

노조와 기업의 현명한 빅딜, 일자리 지키고 경쟁력 잡는다

 

지난해부터 계속됐던 내수 부진과 국내 투자 감소, 고용 없는 성장이 우리 경제의 ‘살생부’로 등장한 지 이미 오래다. 특히 경제성장 규모에 못 미치는 고용창출 능력과 대규모 제조업체들의 해외 이전은 존재하는 일자리마저 위협하고 있다.
이는 비단 국내의 사정만이 아니다. 전 세계적 산업입지 경쟁 속에서 지금 각국은 자국의 일자리 유출 방지와 고용 창출을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다. 강력한 노조와 좋은 노동조건으로 유명한 독일에서도 생산 공장의 동유럽 이전으로 인한 일자리 축소는 노사 모두의 고민거리다. 이러한 가운데 6월 21일, 세계 3위 규모의 전자회사인 독일 지멘스가 개별 기업 차원에서 ‘일자리 유출 방지와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혁신협약’을 맺어 화제다.

혁신협약 체결, 일자리도 UP! 경쟁력도 UP!
지멘스는 올해 초 캄프린트포트 와 보홀트 지역의 핸드폰 및 무선전화기 생산 라인을 헝가리로 이전할 계획을 세웠다. 공장 이전이 계획대로 추진될 경우 이 라인에서 일하던 노동자 2천여 명의 일자리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독일 금속노조 (IG Metal)소속의 사업장인 지멘스의 노사는 일자리 유출 방지를 위한 협의를 시작했다. 협상의 진행은 순탄치 않았다. 협상 진행 내내 지멘스의 노동자들은 대규모의 거리 시위를 벌였으며 6월 18일을 ‘지멘스 행동의 날’로 정해 약 2만 5천명의 노동자가 참여하는 ‘공장이전 반대, 일자리 유지’ 대회를 격렬하게 벌였다.

경영진과 노조의 갈등은 물론 독일 금속노조 내의 갈등도 있었다. 한편의 간부들은 “생산설비 유출을 막고 일자리 유지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으나 다른 편에서는 “근로조건이 한번 악화되기 시작하면 전산업으로의 확대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의견으로 맞섰다. 금속노조가 과거 강력한 투쟁을 통해 얻어낸 주당 35시간 노동제를 양보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일자리 감소와 실업률에 맞서 당분간의 양보가 필요하다는 현장노사 당사자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거듭된 진통 끝에 노사는 독일 내의 일자리 지키기와 산업 경쟁력 확보를 통한 신규 일자리 창출을 위해 서로 양보해야 한다는 공통분모에 합의했다. 이 정신을 바탕으로 구체적 협약에 착수, 현재 주당 35시간인 노동시간을 주당 40시간으로 연장하는 대신 공장의 해외이전 방침을 철회하기로 결정했다.
‘일자리 유출 방지와 산업경쟁력 강화를 위한 혁신 협약’ (이하 협약)은 2년간만 유지되는 한시적 협약이다. 당장 없어질 2천개의 일자리를 지키고 산업경쟁력 확보를 통해 성과를 분배할 수 있을 때까지를 2년으로 정한 것이다.

노동자들만 양보를 한 것은 아니다.

협약문에 따르면 “연구개발 투자를 통한 경쟁력 확보, 인력개발과 낭비요소 절감 등 기업 수준에서 시도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강구하고도 일자리 유지가 쉽지 않을 경우 최후의 수단으로 노동시간의 한시적 연장을 실시한다”고 전제되어 있다. 한국노동교육원 송태수 교수는 “협약의 명칭인 혁신협약은 기술혁신과 경영혁신을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노동자들의 일방적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참여가 보장된 상태에서의 고성과 방식을 도입하겠다는 전략적 선택과 기업의 혁신 의지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송교수는 또 “이번 협약의 핵심을 노동시간 연장으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독일의 유력 경제주간지 슈피겔은 이번 협상 결과에 대해 “지멘스 노사의 선택은 위기의식 공유에서 비롯되었으며 매우 획기적인 선택”이라고 평했다.
지멘스의 하인리히 폰 피어러 회장은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협약은 일자리 감소에 대한 새로운 해법으로서 매우 의미가 있다”면서 “IG Metall의 노조대표들과 경영진은 독일 내의 일자리 감소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현실적 방도를 찾아냈다”고 평했다.
금속노조는 논평을 통해 “전체 산업의 경쟁력 측면에서 매우 비관적이고 노동자들에게 희망을 빼앗았던 단순한 일자리 삭감을 막을 수 있는 승리를 거뒀다”고 전했다.

 

싼 게 비지떡! 돌아오는 제조업들
지멘스의 사례는 공장의 해외이전으로 인한 일자리 감소를 비용문제로만 접근하는 우리의 시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지멘스의 사업장평의회 노사 대표는 해외 이전을 무조건 반대하지 않았다. 대신 해외로 이전해도 기업 핵심역량에 큰 타격이 없는 저부가가치 부문과 국가 및 기업 경쟁력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부문을 구분, 경쟁력 확보의 측면에서 접근할 것을 요구했다.

이와는 달리 우리 기업의 무차별적 해외 이전과 이를 둘러싼 노동계의 대응방식은 노사간의 힘겨루기와 노동 비용문제로 집중되고 있다.
실제로 산업자원부가 지난해에 발표한 ‘해외 제조업 투자 실상 및 실태조사’에 따르면 해외투자를 한 제조업체들은 ‘현지시장 개척(28%)’이나 ‘시장진출(2.6%)’보다는 ‘인건비 등 비용절감(48.5%)’을 가장 큰 이유로 들고 있다. 반면 독일의 금속노조가 소속 사업장 경영진을 대상으로 올해 초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현지시장 개척’이 60% 이상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무조건 싼 데를 찾아가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기업이 해외의 저임금만을 고려 대상으로 넣고 있는 것은 우리기업의 경쟁력 구조가 매우 취약함을 반증한다. 임금을 줄이는 것 외에는 경쟁력을 확보할 방안이 없다는 뜻이다. 언제까지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떠돌 것인가. 게다가 중국 등지의 낮은 인건비가 몇 년 동안 지속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결국 열쇠는 생산성과 경쟁력이다. 
독일 브레멘대학 이상호박사는 “임금 때문에 해외로 이전한다는 것은 너무 단기적인 관점”이라며 “저부가가치 산업은 해외로 이전하되 고부가가치 산업 육성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노사가 공동으로 연구와 정책 개발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

노조는 단기적 이익에 매달리는 기업의 시각에 제동을 걸고 기업은 산업구조의 고부가가치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사회적 책임을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동유럽으로의 진출 러시를 주도했던 독일의 부품회사들은 올 들어 둘 중 하나가 독일로 복귀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저임금 국가에는 품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인프라와 기술적 노하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노동력의 ‘가격’이 아니라 노동력의 ‘질’이 문제였다. 결국 이들 기업은 낮은 임금의 장점을 깎아먹는 낮은 생산성 때문에 ‘본전도 못 찾고’ 독일로 돌아오고 있다. 인건비 비중이 좀 높아지더라도 노동생산성이 높은 독일의 노동력이 중장기적 경쟁력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경쟁력과 삶의 질, 한 쪽이 무너지면 다른 쪽도 무너진다
독일의 인건비가 매우 높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미 경제성장의 산물로 형성된 임금과 생활의 질을 과거 수준으로 후퇴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독일 노사는 생산성에서 해법을 찾았다. 각종 생산성 협약을 통해 경쟁력을 유지하여 기업의 해외이전을 막고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생산성 향상은 노동자와 기업 모두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필요한 조건이라 하더라도 상호 신뢰에 기반한 사회적 합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독일 지멘스의 혁신협약은 국내 산업의 경쟁력 유지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노사간의 공통분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공통분모를 만들어내고 또, 사회적 자산으로 더욱 키운 것은 노사 신뢰라는 기초체력이다.

독일 금속노조의 클라우디아 라만 국제국장은 “금속노조에게 이번 선택은 별로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기업과 노동자가 서로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고는 헤쳐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산업공동화와 일자리 창출을 놓고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 노사에게 경쟁력과 고용안정, 삶의 질을 함께 고민한 지멘스의 사례는 새로운 선택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전화 인터뷰
클라우디아 라만 독일 금속노조 (IG Metal) 국제국장

혁신협약 체결에 대해 평가를 내린다면?
먼저 독일의 산별 협약으로 체결하고 있는 주 35시간 노동 제도가 완전히 무너졌다는 오해를 불식시키고 싶다. 산별 교섭과 투쟁의 역사로 형성된 주 35시간 노동제도는 여전히 굳건한 산별 협약의 틀 내에서 보호받고 있다. 지멘스의 경우는 매우 특별한 것이다. 지멘스의 작업장평의회 노사대표는 공장의 해외이전에 관한 지속적 협의와 연구 활동을 벌였다. 이 활동의 결과물로 제출된 대안이 노동시간의 한시적 연장이다. 산업 경쟁력이 확보되고 일자리에 대한 위협이 사라지면 이들 노사는 반드시 성과를 공유할 것이며, 또 그렇게 만들 것이다.

 

]협약에 이르기까지 갈등은 없었는가?
자신의 일자리에 대한 노동자들의 애착은 대단한 것이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사가 최적의 협약을 이끌어 내기 전까지 피케팅을 비롯해서 공장 단위의 파업, 거리 시위까지 다양한 갈등이 있었다. 또, 해외 이전의 규모와 범위를 놓고 노사간의 의견 대립이 컸다. 그러나 노사 모두에게 독일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도 당위적인 원칙이었다.

 

협약에 대한 현장 노사 당사자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현장 노동자들은 매우 반기고 기뻐하는 분위기다. 물론 임금의 증가 없이 주당 노동시간이 5시간 늘었기 때문에 불만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모든 것에 앞서 자신들의 일자리가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는데 큰 만족을 느끼고 있다. 게다가 이것은 한시적 협약이기 때문에 잠깐의 양보가 가능하다는 것이 대부분의 정서다.

 

한국에서도 산업공동화로 인한 일자리 감소 문제가 심각하다. 이에 대한 의견은?
한국의 상황에 대해 의견을 줄만큼 식견이 뛰어나지 않다. (웃음)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임금이 낮은 곳으로 기업들이 이전하는 것은 전 세계적 추세인데, 이렇게 해서는 경쟁력도 삶의 질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멘스 노사의 선택은 무조건적 희생의 강요가 아니다. 경쟁력과 삶의 질 확보를 위한 최후의 대안으로 도출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례_고용보장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독일 기업의 노사협약

독일에는 수년 전부터 ‘고용보장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사협약’(이하 협약)이 등장했다.
1993년 독일경제가 심각한 경기 침체에 빠지자 고용보장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경기 악화와 경쟁 심화 속에서 비용절감, 생산성 향상에 부심하던 기업들은 유럽통합의 가속화와 동시에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낮은 동유럽으로 생산설비 이전을 계획했다.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독일의 기업 단위 노사관계 당사자들은 기업 이익과 노동자의 삶의 질을 동시에 높이고자 사업장 단위의 협약을 체결하기 시작했다. 이 사업장협약은 기업측이 독일 국내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고 고용수준을 유지 또는 확대할 것을 명시했다. 사업장평의회는 근로시간, 교대제, 임금제도 등 경영혁신 프로그램에 적극 협조를 약속했다.
독일노동조합총연맹 산하 경제사회과학연구소(WSI)가 1999년부터 2년간 1,390개 사업장평의회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업체의 약 30%가 이 협약을 체결하고 있다.
협약에서 사용자측의 수행 조항은 일정기간의 정리해고 방지(66%), 국내투자 확대(37%), 생산설비 해외이전 금지(27%) 등이다. <표참조>사업장평의회측의 수행 조항은 근로시간 조정 (82%), 근무조직 개편(72%), 임금관련 조항(19%) 등이다.
조직 관련 사항은 기업구조 개편(49%), 교육훈련 강화(46%), 작업조직 현대화(36%) 등 조직구조의 합리성 신장과 기능적 유연성을 강화해 기업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한 방안들이다.

 

 

사례_해외 이전에 대한 현장의 우려

2003년 6월에 금속노조의 강성론자들이 주당 38시간 노동이 일반적인 동부 독일의 사업장들에서 파업을 주도했다.
이들은 서부 지역과 마찬가지로 노동시간을 주당 35시간으로 단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지역의 폴크스바겐공장 현장 노동자들과 대표들은 이 파업이 공장을 동유럽으로 이전하는 또 다른 파장을 촉발하지나 않을까 불안해했다. 동부독일의 전 지역에 걸쳐 수백 명의 노조원들이 금속노조 지도부에 반기를 들고 파업참가를 거부했다.
한달 후 파업은 실패로 끝났다. 이는 금속노조 49년 역사 중 처음으로 맞는 파업실패였다.

 

 

사례_일자리를 위한 노조의 빅딜

지난해 말 다임러크라이슬러는 중부유럽에 엔진 공장 신설을 추진했다. 그러나 중부유럽에 건설될 예정이었던 공장은 독일의 콜레다지역에 세워져서 활발하게 가동 중이다. 이 공장에서 금속노조는 국내에 공장을 건설하는 대신 임시직 채용을 포함하는 새로운 계약조항에 동의했다. 다일러크라이슬러의 CEO 위르겐 슈렘프는 “노조의 협력이 없었다면 공장은 해외에 세워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BMW 또한 새로운 조립공장을 동유럽에 세우는 것으로 검토했으나 최근 연장근로에 대한 유연한 협상결과로 인해 독일 라이프치히에 공장을 건설하는 결정으로 기울고 있다. 루마니아공장의 현대화를 추진 중에 있는 르노는 현재 스페인 근로자들에게 작업시간 유연화를 설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