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역사(歷史)의 먼지를 털어내자
이제 역사(歷史)의 먼지를 털어내자
  • 승인 2004.07.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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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디앤무의 영향으로 도시의 한 켠이 검붉은 색감으로 뒤덮인
우울한 6월의 어느 날.
전태일기념관을 찾아 거슬러 오르는 길을 따라 보이는 작은 봉제공장들.
70년대에서 멈춰버린 듯한 이 풍경들은 낡은 기억 조각들을 끄집어내게 한다.


언덕 윗자락에 자리잡은 기념사업회 건물에서  황만호 사무국장과 상근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태일기념관은 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해산됐던 청계피복노동조합을 다시 복원하는 과정에서 설립됐다.
이후 기념관은 당시 엄혹했던 군사정권 아래 노동자들의 소중한 모임 및 교육장소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또한 몇몇 지역에 마련된 부설노동상담소는 지역 활동 중심지로 자리매김 했다.

‘구로동맹파업’ 시기 기념관은 파업 사령부였다고 한다.
황만호 사무국장은 “당시 이 곳에서는 각 노동조합 지도부와 김문수(현 한나라당 국회의원), 심상정(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등이 머물며 파업을 지휘했다”고 회상했다. 이제는 허물어졌지만 전경들과 뒹굴던 처마 지붕은 우리네 역사를 기억해 주는 소중한 자료였다고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운동의 양적 성장만큼 질적 성장이 뒤따라 주지 못함일까?
“이제 전태일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그 뜻을 선양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구호만큼 기념사업회 활동에 애정을 못 갖는 것 같다”며 황국장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또한 노동계가 현실운동에 매달리다 보니 돈 많이 들고, 일손도 많이 필요하지만 별로 ‘표가 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어졌다는 것.
운동이 어려웠던 시절, ‘전-태-일’이라는 세 글자를 가슴에 안고 나누던 이들이 이제는 그 이름의 소중함을 지워가는 듯 하다.
하지만 70~80년대 노동운동의 역사를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은 여전히 이 곳, 전태일기념관이다.수북이 쌓여있는 박스들은 지난 시절 설움 받은 이들의 애환이 묻어나 있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는 여전히 ‘박스 안의 역사’로 남아있다.

 

“현재 있는 자료들을 펼쳐 놓으면 한정 없을 것 같아서 박스에 보관하고 있다”며 “어머님(이소선 여사) 집에도 한 트럭분의 자료가 묵혀 있다”고 한다.
역사를 밝혀줄 빛이 되지 못한 채 어둠 속에 묻힌 자료는 그 가치를 상실했으며 훼손의 우려마저 높다는 게 황국장의 고민이다.
그러나 자료의 보관은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였다. 적당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해야 하고 넓은 공간과 많은 인력과 돈을 필요로 하기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기념사업회는 상근자 3명과 자원봉사자들로 운영되고 있다.
회원은 1700여 명. 하지만 실제 기념사업회에 회비를 납부하는 회원은 170여 명으로 한달에 250만원 정도다. 여기에 기념관 설립추진위원회에서 조금 지원해, 한달 300여 만원으로 3명 상근자들의 생활비와 살림을 꾸려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다 보니 이곳의 자료도 기념관이 설립될 때까지 민주화기념사업회의 협조를 구해, 위탁 보관할 계획이다.

70~90년대 지역마다 운동의 거점이 되어줬던 많은 단체들과 연구소들의 발자취가 사라져 가고 있다. 역사의 현장에서 함께 숨쉬던 이들의 목소리와 글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발전시키기 위해 지난 기억을 보전, 관리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대규모 전문노동자료관 설립을 위한 워크샵이 열렸다.
이번 워크샵에서 인하대학교 윤진호 교수는 “자료관은 한 사회의 제도적 기억”이라며 “기억이 없는 개인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사회도 기억 없이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자료관은 역사를 구체적으로 알게 함으로써 교과서 속의 죽은 역사가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생생한 역사의 재현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노동분야에서 자료관의 중요성은 더욱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빈발하고 있는 노사간 갈등의 이면에는 정보와 지식의 불평등 문제도 숨어 있다는 것. 객관적인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줄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러나 현실은 최악이다. 전국 1만 여개 도서관 중 노동전문 도서관은 전무하며 각종 기관의 부설 도서실 수준이 전부이다. 이것도 대부분 공간이 협소하거나 독립공간을 갖추지 못했으며 인력도 1~3명에 불과하다. (표 참조)
노동도서관 설립에 대해서는 노-사-정-학계 모두 동의하고 있지만 문제는 운영주체이다.

황 국장은 노동자료관 설립에 대해 “가장 절실한 것은 수많은 자료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것”이라며 노동운동 주체들의 노력을 요구했다.
재정 문제도 “정부지원도 필요하지만 노동계가 자료와 정보를 주체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 기금을 마련해 참여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를 나오는 길. “모든 자료를 민주노총이 관리해 줬으면 하지만 현 수준이…”라며 말끝을 흐리는 그를 바라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많은 이들이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향해 달리는 동안 우리가 간직해야 하는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허전한 마음에 하늘이 들어와 앉는다.